열두 살, 나 홀로 유학길

부모님 품을 떠난 열두 살의 뉴질랜드 조기 유학

by Enero
엄마, 나도 비행기 타고 외국에 살고 싶어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가족이 뉴질랜드로 떠난다고 했다. 내가 비행기를 그전까지 타 본 일이라고는 어릴 적 가족 여행으로 사이판을 갔던 일뿐이었는데, 함께 이사를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친구네 가족이 외국에 가서 산다니! 나도 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은데?


학교에서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엄마에게 뛰어갔다.


“엄마, J가 뉴질랜드로 유학 간대. 나도 비행기 타고 외국 나가서 살고 싶어. 영어 공부하고 싶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를 시키거나 학원을 보낸 적이 없었던 대신 내가 스스로 욕심이 많은 편이었고, 다행히도 부모님은 내가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 건 전부 할 수 있게 든든한 서포트를 해 주셨다.


이야기를 꺼내고 한 달 뒤, 나는 친구의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오클랜드 행 비행기에 올랐다.


Are you homo?


나는 당시 어학원 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오클랜드의 한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유학길에 올랐던 2000년 초반, 그 학교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우리 반에는 한국인이 한 명 있었고, 학교 전체만 보아도 학년 당 13개 학급 중 총 한국인 숫자가 스무 명 안에 꼽을 정도였으니, 중국인에 비해 한국인 수가 엄청 적었다.


우리 반이 20명이라 치면 그중 10명이 뉴질랜드/호주 아이들, 5명이 마오리족, 나머지 5명이 중국, 홍콩, 한국 등 아시아계 아이들이었다.


나는 용감하게도 A, B, C 알파벳만 익히고 간단한 인사 정도만 알고 그 영어 밭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다 보니, 아이들이 욕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도 잘 못 알아듣고 허허 웃었다.

그래도 전학생이라고 관심은 많이 받았는데, 오히려 한국 친구들은 내가 일본인인 줄 알고 말을 안 걸었다. 그 덕에 영어가 더 빨리 늘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친구들 환심을 좀 사 보라고 들려 보낸 예쁜 학용품들이 신의 한 수였다.

나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한국산 펜, 지우개, 연필 따위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나한테 잘 보여서 그 지우개 하나를 받고 싶어 했다. 열한 살, 열두 살의 어린 친구들이니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K학용품을 꺼내 보이고는 학교 소개를 해준 친절한 Sharon과 Amber에게 예쁜 펜을 선물로 줬다.

인기 스타로 도약하게 된 순간이다.


자본주의의 맛을 본 열두 살 친구들은 그 후로 나에게 숙제 알림장도 적어주고, 이동 수업도 챙겨주고, 쉬는 시간에 책도 읽어줬다.


이미 다문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뉴질랜드 문화 덕분인지, 그 학교의 많지 않은 한국인 중 하나라 신기했던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히도 인종차별 같은 건 겪지 못했고, 꼭 한 달이 지나자 귀가 트이고 석 달이 지나자 꿈에서 한국어를 하던 외국인 친구들이 이제는 영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꿈에 한국 친구들이 나올 때에도 우리는 영어로 대화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간에 전화하니까 딱 좋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있기엔 너무 어리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조그마한 애를 혼자 보냈나 신기하기도 하고, 엄마도 가끔 그런 이야길 한다.


오클랜드에 가서는 거의 한 달은 밤마다 울었다. 국제 전화 선불카드가 닳도록 집에 전화를 했다.

뉴질랜드와 한국은 3시간 (서머타임 적용 시 4시간) 시차가 있었는데, 어느 날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꾹꾹 참고 이불속에서 울다가 뉴질랜드 시간 새벽 2시쯤 전화를 했다. 한국 시간으로 10시~11시 즈음되었을 것이다.


“어머, 이 시간에 전화하니 통화하기 딱 좋다! 거기 몇 시야?”


참나.. 딸내미가 새벽까지 그리움을 참다 전화했는데 이 시간에 통화하는 게 좋다니! 엄마, 나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그래도 친구도 사귀고 다른 혼자 온 유학생들과도 가까워지면서 내 전화는 점차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갔다.



혼자 지냈는데도 비뚤어지지 않고 잘 컸네!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다른 사람들 집에 얹혀살면서 혼자 지냈는데도 비뚤어지거나 엇나가지 않고 공부만 하며 잘 자란 게 신기하다는 것이다.


물론 엄마, 아빠와 지내는 만큼 나는 행복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시기의 일들이 지금의 나를 아프게 하는 일화들도 아주 많았다. 나의 성격 형성에 이 청소년기의 사건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거라 나는 확신한다. 과정에서 ‘눈치 보는 아이’, ‘지나치게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아이’, 혹은 과장하자면 자기애성 성격 장애를 가진 아이로 자랐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는 유학생들이 모두 엇나가지는 않는다. 나는 그 시기의 경험들을 통해 ‘자립심이 강한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줄 아는 아이’,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아이’로 크기도 했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도 감시의 눈을 피해 술, 담배, 대마 등 마약류에 손을 대거나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은 한국에 있나 외국에 있나 똑같다.

내 경험 상…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배경 이미지는 Pixabay로부터 입수된 Free-Photos 님의 이미지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 번의 가출 (1) 열한 살, 가출을 결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