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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l 03. 2021

고등학교 1학년, 왕따를 당하다

피해자는 기억하고 가해자는 잊는다


 지금부터 작성한 내용은 지극히 개인의 기억과 시선에서 작성한 것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과는 다를 수 있다.
 다만, 감정이 아닌 있었던 사실 중에는 맹세코 거짓이 없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나는 기숙사가 딸린 시골의 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에는 여학생, 남학생 기숙사가 나뉘어 있었고, 여학생 기숙사에는 각 6명씩 한 방을 이루어 지냈다.

대부분 같은 반 친구들끼리 한 방으로 구성되어 지냈고, 한 학급 당 정원이 25명 정도 되었으니, 같은 반 여학생들은 2~3개 기숙사 방에 나뉘어 배정되었다.


 초반, 서로가 탐색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 안에서도 더 친한 친구, 덜 친한 친구들이 형성되었다.

나는 그냥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던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같은 방에서는 I라는 아이와 가까웠다. ‘가까웠었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1학기 초, 그 아이가 같은 반의 한 남학생을 좋아한다고 했다.

열일곱 소녀들은 그런 이야기에 까르르했다. 밀어주겠다느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느니 시시콜콜 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단합대회가 있었다.


운동장에 체육복을 입고 둘러앉은 반 아이들이 수건 돌리기였던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진 사람은 나와서 장기자랑을 해야 했다.

I가 좋아한다던 남학생이 벌칙 수행을 하러 원 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는 임재범의 ‘고해’를 부르겠다고 했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 ‘고해’는 그야말로 낯 뜨거운 고백송으로 유명했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그럼 그녀만은~ 내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주소서~!


클라이맥스 가사에서 “그녀”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이름으로 개사해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노래가 절정으로 흐를 무렵, “그녀” 자리에는 나와선 안 될 이름이 나왔다.

내 이름이다.


나는 그 상황이 치욕스럽기도 하고 낯 부끄럽고 친구 얼굴도 떠올라 그냥 피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똥 들어온다, 쉿!


 그리고 다음날, 우리 기숙사 방의 공기가 이상했다.


 나를 제외한 다섯 명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들어가자 단숨에 조용해졌다.

눈치를 채지 않으래야 그럴 수가 없을 만큼 적막이 흘렀고, “뭐하고 있었어?” 하는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 종일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거나 내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이 내 공포의 시작이었다.


 내가 방을 나가 물이라도 떠올라 치면, “야, 똥이 물 뜨러 간다” 라던가,

내가 방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I는 소리쳤다.


“야, 똥 들어온다. 쉿!”


 내 물건들이 망쳐져 있거나, 없어지거나, 어딘가 처박혀 있거나, 낙서가 되어 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밤마다 울었다. 어떤 날은 통곡을 하면 그래도 불쌍히 여겨줄까 싶어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아무도 나를 토닥이거나 왜 우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로 다른 친구들이 있는 방에 가서 울었다.

학교 도서관에 항상 옆자리에 있던 옆 반 친구 B와 털털하고 재미있고 남의 소문에 휩쓸리지 않던 여군 같은 친구 G의 방에 주로 찾아갔다.

(이 친구들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그리고 도망칠 자신이 없어서 또 죽음을 꿈꿨다.

유서에는 I와 그를 동조한 친구들의 이름을 적고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강에 뛰어든다던지, 기숙사 뒤의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을 생각을 했다.



미안해, 그 아이가 너랑 말도 섞지 말라고 해서..


 밤에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해 결국 실토했다.  정말 너무 힘들다고,   꺼내 달라고. 그간의 일들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는 알겠다고, 전학 절차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 분했다. 내가 잘못한  없는데  내가 전학을 가야 하지? 피해를 입은  난데,  피해자가 도망을 가야 하는 거지?

나는 가해자보다 성적도 좋았고, 방에서의 일만 아니라면 친구들도 있고 친한 선배들도 생겼는데! 한편으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다음날, 미술 과제를 하기 위해 방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I는 그날 놀러 나갔는지 어쨌는지, 여하튼 주동자를 제외한 방관자들과 피해자 하나가 같은 방에 머무른 셈이다.

그때, 한 친구가 용기를 낸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문을 뗐다.


미안해. 나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I가 너랑 말이라도 섞으면 똑같이 대해주겠다고 했어.

그래서 네가 밤에 울 때도 I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어. 정말 미안해.”


 한 친구가 용기를 내자 뒤이어 다른 친구들의 사과가 이어졌다. 다섯 아이들은 한참을 울며 사과를 했고,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 찰나, I가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가 그날 느꼈던 그 무거운 공기를 바로 눈치챈 듯했다.


그날 밤, I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통곡을 시작했고, 그녀에게 괜찮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빈 말로 “왜 그래?”라고 물었고, 그 아이는 “몰라서 물어?” 하며 밤새 소리 내어 울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쟤랑 친하게 지내지 말랬지!


가해자가 피해자 인 척 행세하게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I는 기숙사 방이나 학년이 바뀔 때마다, 동급생이고 후배고 상관없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찍어 놓고 괴롭혔다.


 이를테면 C가 발목에 깁스를 해서 2층 침대의 윗 층에서 더 이상 생활하기 어려우니 1층 침대와 당분간 맞바꿔 줄 수 없을지 물었을 때,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다른 친구가 1층으로 바꾸어주자 I는 C의 침대를 마구 어질러두었다. 거동이 어렵다고 해도 부축 한 번 해주지 않고 되려 무시하기 일쑤였다.

자기를 보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 후배들에게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본인 기숙사 방으로 밤마다 불러내어 방 한가운데에 앉혀 놓고 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피해자들은 이제 나를 찾기 시작했다.

“너 그때 어떻게 견뎠어?” 라던지, “언니, I언니가 나보고 밤에 자기 방에 오래. 언니랑 친하게 지내서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러면 나는 그 아이가 밤에 울던 게 기억나서 코웃음 쳤다.

“걔, 하나도 무서운 애 아냐. 그냥 무시해.”


 피해자들이 나에게 모여들고, 피해자들이 늘어날수록 그녀의 친구가 적어졌다.

이미 학교 내에 그녀의 나쁜 버릇들은 다 소문이 나 있었고,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 몇몇 친구들만이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친구들을 지키고 싶어 안간힘을 다 했다.


그 방법이 치졸했다. 내가 본인을 왕따 시키고 있다고 눈물로 읍소를 하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친구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나와 대화를 하거나 장난치는 모습이 보일라 치면, 복도 저 끝에서부터 달려와 소리쳤다.


“쟤랑 친하게 지내지 말랬지!”



나 너무 미워하지 마


몇 년 전, 한 걸그룹의 왕따설로 세간이 뒤흔들렸을 때였다.

페이스북에 “나도 고등학교 때 입은 상처 아직도 너무 아픈데. 나를 똥이라고 부르던 걘 아마 잊었겠지?” 따위의 글을 썼고, 당시 상황을 알고 있던 친구들이 댓글로 ‘그때 정말 고생 많았지.’라던지, ‘그 앤 정말 벌 받을 거야.’ 등의 댓글을 남겼다.


I는 아마 그 글을 본 모양이었다. 실수였는지 I로부터 친구 신청이 와서 ‘거절’을 누르고 메시지를 보냈다.

“너 친구 신청 버튼 잘못 누른 것 같아.”

“아, 그랬나 보다! 미안해. 그런데 있지, 나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나도 힘들었어.”


나는 맹세코 그 시절 그녀를 욕하고 다니거나 그녀가 왕따가 되도록 주도한 적이 없다.

다만 그녀를 미워하던 다른 친구들을 말리지도 않았다.


 15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도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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