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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l 06. 2021

아빠가 파킨슨병에 걸렸다

우리 집 장군이 아프다니

아빠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건강검진을 받고 온 후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말도 안 되는 소식.

“자세한 건 정밀 검진을 받아 봐야 알아. 일단은 그런 줄 알고 있어.”


  아빠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군인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항상 건강하고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빠의 아픔 따위는 가늠하지 못했다.


 정밀검사 결과, 아빠는 이름도 생소한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사전적 의미로 파킨슨병은 ‘도파민 신경세포의 소실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계의 만성 진행성 퇴행성 질환’이다. 치매 다음으로 흔한 대표적인 퇴행성 뇌질환이라 하는데, 주로 노년층에서 발생하고, 60세 이상에서 약 1% 정도가 파킨슨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판정을 받았을 때 고작 40대였다.

 파킨슨병에는 완치가 없다고 한다. 그냥 서서히 병이 진행되도록 늦추는, 장기 치료 계획을 세워 평생 지속적으로 약물을 투여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아빠는 어디를 가든 약봉투를 챙겨서 다니고 있다.


 우리 집 장군님이 아프다니. 말도 안 돼.



아빠 수전증 있어?


 파킨슨병 진단을 받기 전, 아빠가 유난히 손을 많이 떨었다.


 금연을 한 지 10년도 넘었는데 이제 와서 금단현상? 수전증? 믿기 어려웠다. 부쩍 짜증이 는 것 같기도 했지만 원래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적고 매사에 진지한 아빠를 생각하면 다른 변화를 감지하기는 어려웠다.

 나중에서야 ‘파킨슨병’을 검색해 알아보니 초기 증상 중 동작이 느려지고 손떨림이 나타나고 얼굴이 무표정해지기도 하고 쉽게 화내는 증상이 있다고 한다.


그냥 아빠는 항상 굳건한 강철 같은 사람이라 몸에 이상 증조가 나타나고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사실은 그게 다 일종의 신호였다니. 이런 이유로 파킨슨병은 초기 발견이나 발현 시기를 알기 어렵다 한다.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한 지도 어언 10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아빠의 몸은 점점 구부정해졌고 팔과 다리의 근육도 많이 빠진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활을 위해서라도 운동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아빠는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에 화가 나니 또 짜증을 부리고 앉아만 있고, 그 모진 말을 고스란히 듣는 가족들의 마음도 다쳐간다.


 그래도 아빠는 항상 노력하고 있다.

 큰 딸의 결혼식에 딸 손을 잡고 당당히 버진로드를 걷기 위해 고개를 들고 최대한 똑바로, 그리고 천천히 걷는 연습을 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아빠는 걸을 때 무게가 앞으로 쏠려 차라리 빨리 걷는 게 더 쉽다고 했다.

 그렇지만 딸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걷는 순간을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고, 너무 빨리 걷게 될까 봐 버진로드 중간에 멈추어 서서 하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그리고 그날, 아빠는 축사를 하다가도 울고,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식사를 하시다가도 울었다.



이제는 우리가 아빠 여행  시켜주자


 어릴 때 우리 가족은 곧잘 학교를 빼먹고 놀러 다녔다. 더 어릴 때에는 아빠가 한 번 항해를 나가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양 손 가득 우리 선물이 들려 있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다섯 살 무렵이던가 아빠가 유럽에 갔다가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커다란 인형을 사 왔다. 폭신하고 귀여운 여자아이 인형이었는데, 그날 나는 다섯 살 인생 처음으로 머리가 노랗고 눈이 파란 인간(정확하게는 인간 형태)을 마주한 것이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자지러지게 울고 한동안 그 인형은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정이 들어서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침대에서 나와 매일 밤 함께 자는 애착 인형이 되었다.


 모쪼록 아빠가 더 걷기 힘들어지기 전에 우리 여행 많이 다니자고, 온 가족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서 해외여행도 가고 국내여행도 잘 다니고 있다. 다만, 해가 갈수록, 그다음 여행지가 생길 때마다 아빠는 점점 더 힘들어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지난 생일에는 나에게 지팡이 좋은 걸 하나 사달라 해서 비싼 스틱으로 하나 장만해 드렸다. 그즈음만 해도 가끔, 오래 걸을 때에만 필요했던 그 지팡이는 이제 아빠의 외출 필수품이 되었다.


 아빠와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은 무엇 하나 쉬운 게 없다.


 몸이 편하고 아니고를 떠나 우리 아빠는 지독한 계획 주의자, 원칙주의자에 기준도 까탈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듣자 하니 이건 비단 우리 아빠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더라.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들 아버님들도 그러신단다. 갱년기 아저씨들의 고집, 그런 건가?


 아무튼 아빠가 우리가 열심히 찾은 맛집을 가서 아무 말도 없이 그릇을 비우면 성공이다. 왜냐면 보통 꼭 “짜다.”,  “사람이 너무 없다.” 같은 불만 섞인 사족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그렇게 말해놓고 누구보다 그릇이 싹싹 잘도 비워져 있다.


  내가 엄마, 아빠를 모시고 셋이 다낭에 갔을 때에도 그랬다. 패키지처럼 유명한 곳은 다 가야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자유여행처럼 스케줄은 자유롭고 남들 안 해본 것도 해야 했다. 그래서 쿠킹클래스도 듣고,   루프탑 바에서 맥주도 마셨다. 그리고 마지막 날, 남들 다 탄다는 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아빠는 또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했다.

“다낭은 두 번은 올 필요 없겠다.”

그래서 나도 말했다.

“이번 여행에서 아빠랑 내가 처음 마음이 맞았네!”


 다시는 가족여행 안 가야지 다짐했다가도 또 올해의 가족 여행 계획을 세운다.

 아빠는 바닷가에서 내가 아빠를 향해 뛰어갈 수 있을 때까지 업어주고, 무등을 태워주고,  기다려줬다.


 이제는 내가 걸음을 늦출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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