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싫은 책을 읽다가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손 가지 않던 책을 펼쳤다
<유한계급론>
어쩌다 서점에서 그냥 사긴 샀는데, 도저히 손이 안 갔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이 책은 펼쳐 보긴 했냐며 웃었다.
언젠가 회사 대표님이 최근 읽은 책으로 <유한계급론>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대표님이 추천한 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많았는데, 이미 내가 재미있게 읽은 책(<팩트풀니스> 같은 사회학을 위트 있게 풀어낸 책)을 추천하신 적도 있었으므로 믿고 사 봤다.
일단, 제목이 문제다. 대학교 전공 서적 같은 이름이다. 첨언하자면 나는 <경제학원론> 수업을 듣고 과를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그리고 끔찍한 학점으로 졸업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친구들도 내가 요즘 <유한계급론>을 읽고 있다 말하면 꼭 이 말을 덧붙인다.
"마르크스?"
"아니, 마르크스 아니고 베블런. '베블런 효과'의 그 베블런."
두 번째 문제는 책 자체가 그리 두꺼운 건 아닌데, 책 표지가 심오하다.
심오하다기보다는 해외 명화가 무척 당혹스러워 펼치기 어려운 고서 같은 기분이 든다. 첫 페이지를 열어봤자 옛날 번역체로 점철된 어려운 단어의 조합만 늘어져 진도가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그 책을 열었다.
책 읽기 좋은 장소
나는 개인적으로 책 읽기에 최적인 장소로 두 군데를 꼽는다.
지하철과 미용실.
일산에서 학교까지 지하철로만 한 시간 반 거리를 다녔으므로 그 긴 시간 내내 할 게 없어서 이것저것 했다.
첫 과외비로 용산에 가서 '닌텐도 DS'를 사서 게임을 했고, '애니팡'이라는 한 시절을 풍미한 게임이 나왔을 무렵, 붐비는 사람들 틈새에서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특유의 도전정신이 발휘했다. 덕분에 애니팡 게임 개발자로부터 '이 점수는 나올 수 없다'는 말도 듣고, 한 인터넷 뉴스와 게임 비결에 관한 인터뷰까지 했다.
그러다 결국 찾아낸 질리지 않는 취미는 독서였다.
옛날 TV 프로그램 중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을 찾아 인터뷰하고 상품을 주던 게 있었는데, 어쩌면 나의 이 고상한 취미를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좋고, 생각보다 백색 소음 속에서 집중도 잘 되던 게 '책 읽기'였던 듯 싶다.
미용실이야말로 최적이다. 한번 미용실에 가면 3-4시간은 기본으로 걸리는 데, 더는 스타일리스트와 할 말도 없고, 굳이 시시콜콜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느니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이사이 머리를 감거나 자리를 옮겨야 할 때 잠깐 눈을 쉬게 해 주고, 무제한으로 주는 커피나 주스를 마시며 집중하기 딱 좋다.
차를 사면서 지하철에서 책 읽는 시간이 없었는데, 최근 차 수리를 맡긴 탓에 지하철을 타고 미용실에 갔다. 그러니까, 책 한 권 읽기 딱 좋은 타이밍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숙원 사업처럼 꽂혀 있던 <유한계급론>을 꺼냈다.
필사를 시작하다
의외였다. 이 책은 1899년 초판 출간 이후 1921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베블런이 말하는 사회와 소비 심리가 마치 어제 쓴 글 같았다. 미용실에서 책을 끝내지 못해 근처 바에 갔다.
어두컴컴한 바에서 조명이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싱글몰트 위스키 한 잔을 시켜서 계속 읽다가 웃음이 터진 구절을 발견했다.
과시적 소비의 기준을 높이는 과정에서 남들보다 더 소비하려는 심리가 앞서서 저축 성향이 크게 억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명성의 기준이 가져오는 결과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위스키를 찔끔찔끔 마시기', '한 턱 내기', '공공장소에서 담배 피우기' 등을 들 수 있다.
보통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곤 했는데, 사진으로 남기니 이 책이 무엇이었고 언제 어떤 페이지에서 내 마음을 녹였는지 확인이 어려웠다. '진짜 내 것'이란 생각도 잘 들지 않았다.
홀린 듯 바를 빠져나와 문구점에 들렀다. 탄탄하고 예쁜 노트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올 때마다 글자로 남겼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부담감이었다.
책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을 덜자
무엇이 부담이었느냐면, 책의 문장을 페이지와 함께 쓰기 시작했으니, 이 책을 끝내야 다음 책을 시작하고 노트 위에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노트의 시작점에서 앞에 다섯 장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지배했는데, 뜬금없이 <연애의 행방>이나 <페스트>를 적어 넣어도 되려나 싶었다. 나는 원래 이 책 저 책을 기분에 따라 옮겨 읽기도 하고, 시작했다가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 책은 자신 있게 포기한다. 그런데 글로 옮기기 시작하니, 초등학교 급식을 남기지 않으려 참고 억지로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책을 끝내 놔야 다른 책의 문장을 적어야 자연스럽지 않나 하는 괴랄한 압박감.
이건 그냥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내 필사의 목적은 책을 간추리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문장과 단어를 옮겨 적는 데 있다.
좋은 문장은 새기고, 배워서 내 글에 담아내고 싶어 시작한 일이지, 책 한 권을 몇 가지 중요 문장으로 집약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부담을 덜자 필사 노트는 중구난방이 되긴 했지만, 좋은 문장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내 독서에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복직 이후 기획안과 메일을 작성하며 내 글쓰기에 조금 지쳐있었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서점은 신간으로 가득하고 읽어야 할 책은 많다.
<유한계급론> 덕분에 어릴 때 읽었던 고전을 어른의 마음으로 보려 또 제목이 지독한 책을 샀다. 그와 함께 며칠 전, 내 글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는 독자님의 메일에 적혀있던 책도 한 권 샀다.
글을 쓰고 싶은데, 처음 글 쓸 때보다 자꾸 미루게 된다. 질린 것도 아니고 쓸 수 있는 글감이 없어서는 아니다. 다만, 잘 쓰고 싶어서 잘 읽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뿐이다.
사실 브런치 플랫폼 말고, 따로 google docs에 적고 있는 새로운 테마의 글도 있다. 언젠가 그 글도 퇴고와 수정을 거쳐 누군가의 필사 노트에 들어가는 날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