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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Oct 24. 2021

아무도 내가 낯 가리는 걸 안 믿어줘

오디오 없는 게 힘든 게 내 성격인걸요

네가 낯을 가린다고?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리 놀라지 않지만, 사람들과 처음 친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꼭 듣는 말이다.

 사실 오히려 나와 친한 친구들은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혹은 그런 자리에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알기도 한다.


 나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오디오가 없이는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고, 먼저 말을 꺼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잘 모르는 유관부서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진행해야 할 때면, 진행병에 걸린 마냥 회의실에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밝게 인사하고 '스몰 톡'을 시도한다.

 특히, 여성 직원만 모여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땐 더 신난다. 나는 그들에게 늘 소리친다.

 "우리 요정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 새로운 친구를 소개받게 될 때에도 그냥 내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꺼내 대화 흐름을 만들고, 팀에 새로 누군가 입사하면 이 회사의 고인물로써 회사 연혁부터 읊어준다. 보통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음소거 버튼이 켜진 탓이다.

 그 덕분인지 나는 모임이 (혹은 예전에 자주 했던 미팅 자리에서) 끝나면 "너 진짜 성격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기에 내가 낯을 가린다는 사실은 금방 친해진 사람들에겐 놀라울 수밖에 없다.

 나는 그냥 좋은 사람,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콤플렉스에 빠진 인간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얼마 전에도 새로운 모임에 함께 있었던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 괜찮아. 너 에너지 다 닳겠다."


 거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녀는 내게 굳이 이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기 위해 내 사연과 에피소드를 다 팔 필요가 없다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항상 그런 자리 이후에는 내가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나는 '집순이'에, 친한 친구 - 특히 단짝 B와 함께 있을 때엔 -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평소에 카톡으로 구구절절 이야기를 많이 나눈 탓도 있겠지만, 나는 집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 시리즈를 앉은자리에서 끝내거나, 혼자 게임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여행도 주로 혼자 다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는 꼭 며칠간은 쉬어야 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에너지를 얻고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자리는 내가 에너지를 애써 발산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새로운 사람이 있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았다.


 MBTI 과몰입이 범람하는 요즘,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0년 넘게 단 한 번도 ENFP가 아닌 유형이 나온 적이 없다. 그런데 남들이 아는 ENFP가 내 성격이 아닌 것 같다. 나는 ENFP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런 선택지에 답하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끼워 맞추며 솔직하지 못한 답변을 클릭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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