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ero Jan 08. 2022

생일

특별하지 않은 그냥 목요일

 지난 목요일은 내 생일이었다.


 enero라는 필명이 '1월'을 뜻하는 스페인어인데, 결국 내 생일이 담긴 월을 따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대단한 감성과 고민을 거듭해서 넣은 건 아니고, 내 영어 이름은 너무 흔하고 그렇다고 내 이름을 쓰기는 조금 뭣해서 그럴싸한 게 없을지 잠깐 생각하다 당시 배우고 있던 스페인어 강의에서 들은 '초급 단어' 중 그럴싸한 걸 골랐고, 그렇게 끼워 맞췄다.


 예전에는 생일을 굉장히 대단한 날로 여겼다.

 1월 한 달 내내 친구들과 파티를 했고, 특히 생일이 있는 주간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셨다.

 크리스마스니까, 그리고 일주일 뒤엔 새해니까, 그리고 꼭 일주일 뒤엔 내 생일이었으니 짧게 잡아도 3주는 친구들과 파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무 살 생일엔 '빠른 년생'이라 친구들은 다 가본 클럽을 한 번도 못 가봤던 내게 새로운 경험을 안겼다. 우습게도 '입뺀' (입구에서 출입 불가 안내)을 당했다! 일산에 있는 한 나이트클럽에 다른 빠른 년생 단짝 친구 B와 함께 설레는 마음을 안고 12시 땡! 치자마자 갔다가, 20살은 출입 못한다는 가드의 말을 듣고 돌아섰다. 그게 사실은 촌스럽고 애기 티가 나는 우리에게 '너네는 수질을 흐리는 물고기들이다!'라는 통보였단 걸 한참 뒤에나 알았다.


 스키장에서, 친구 집에서, 클럽에서, 술집에서, 우리 집에서. 생일 전야부터 시작한 술자리는 새벽이 넘어서야 끝났고, 쏟아지는 생일 축하 메시지와 선물을 받으며 행복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 생일은 정말 아무 생각도 감흥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생일이 뭐 별거냐, 하고 생각 든다던데 올해 처음으로 그런 기분이 들었다.

 12시 땡! 치자마자 B로부터 '생일 축하해 내 친구'란 문자가 오지 않았다면, 내 생일인 줄도 모르고 넷플릭스를 보다 잠들었으리라.

 그래도 생일이니 초를 불어야 한다는 B와 S가 불러내 준 덕에 우리는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했다. 20대 때엔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었다. 우리는 조용히 자리에서 친구들이 사 온 귀여운 소품을 머리에 달고, B가 인생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레터링 케이크를 두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일찍 헤어졌다.


 하루 내내 많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집에 택배가 속속 도착해서 현관문 앞을 가득 메웠다.

 나는 이게 내가 내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긴 덕에 이렇게 돌려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이거 다 빚이야."라고 말했다. 내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축하해 준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 준 일이 부담이고 빚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혹여나 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으로 돌려준 게 아닐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그래도 생일에 좋은 점은 있다. 늘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오래간 보지 못해서 서로의 생일마다 연락하는 지인도 있었는데, 정말 올해엔 꼭 보자고 지키고 싶은 약속을 한다. 한 해의 시작점에 내 생일이 있는 덕에 "올해 꼭 만나기"라는 목표를 세우거나, 바로 만날 날짜를 잡기도 편해서 좋다.


 B와 S에게 선물을 받고, 귀여운 케이크를 보면서 "와, 살다 보니 이런 것도 다 받아보고. 너무 좋네!" 하자, 그들은 "그래, 그러니까 살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그냥 목요일이었는데, 사람들이 한번쯤은 내 생각을 하는 날.

 예전만큼 설레지는 않지만 예전보다 감사함을 느끼는 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