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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Feb 19. 2022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대리 기사님

괜한 나의 거짓말

 차를 가져왔는데 술을 마셔야 하는 날은, 괜히 더 억울해서 술이 더 당긴다.

 꽤 지독한 술꾼으로 소문난 내게 고작 맥주 한잔으로 대리운전을 부르는 건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친구, 친구 남편과 함께 홀덤을 치며 '마티니 한 잔. 젓지 않은 걸로요.'를 몇 잔이나 마셨다. (*영화 007 시리즈 제임스 본드 대사)

 홀덤을 처음 치는 사람 치고 꽤 많은 돈(? 점당 100원인데 내가 우겨서 100불이라고 호칭해 달라 했다)을 벌고, 대리 기사님을 맞았다.


 나는 택시 기사님이나 대리 기사님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사장님들은 보통 연륜이 나보다 있으셔서 이런저런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신다. 다만, 이상한 이야길 하시면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긴 하지만 몇몇 그런 분들 빼고는 대부분 내가 친절한 만큼 그분들도 친절하셨다.



 오늘 만난 대리운전기사님(이하 나는 호칭을 무조건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장님 혹은 선생님이라 칭하지만)은 또 새로운 의미가 있었다.


 13년이나 된 차 치고 꽤나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있다는 사장님 말에 조금 신이 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다 그 사장님이 어쩌다 대리운전을 하게 되었는지를 말씀 주셨고, 신나게 떠들던 내가 부끄러워 숨이 멎는 듯했다.


 척 보기에 기껏해야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 여하튼 우리 아버지보다는 젊어 보이시는 - 분이셨는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했다. 몇 년간 치료를 받았고 이제는 연명 치료를 중단한 상태라 했다.

 직장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했다. 나더러 퇴사하길 정말 잘했다며 칭찬도 해 주셨다.

 등산을 정말 좋아해서 죽기 전에 히말라야에 꼭 가보고 싶은데, 그 몸으로 어딜 가냐며 말리는 아내분께서 도저히 여행비를 내어 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꼭 그 산에 오르겠다는 마음으로 용돈 벌이를 하고 있다 했다.


 "제가 살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요. 제 어머니, 와이프,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나요. 못 해본 행복한 일도 하고 싶고요."



 나는 또 자칫 선 넘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냥 꼭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사장님, 제가 올해 구정 지나고부터 정말 운이 탁 트인다 했거든요. 귀인이 찾아올 거라 했고요. 

 그래서 저는 요새 설 지나고 뵙는 모든 분이 제 귀인 같아요. 오늘 이렇게 저를 안전하게 데려다 주신 사장님도 제 귀인이시고요. 

 사장님, 제가 점쟁이나 사이비 그런 건 아닌데 항상 예감이 참 잘 맞거든요? 사장님 너무 즐겁게 오래 사실 것 같아요. 히말라야에서 인증 사진도 찍으시고요.

 제가 작년에 죽다 살아서 그런지 그냥 모든 게 감사해요. 오늘 집에 잘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사장님 둘 다 눈물 그렁해져서는 연신 서로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를 전하고 '새해 복'을 빌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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