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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n 29. 2021

외할머니 장례식 소동 (2) 감 놔라, 배 놔라

인기 많은 할머니, 사공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딸내미야, 숙취해소 음료는 숨카놔라


 가까운 가족의 장례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당시 기숙사에 있던 나는 교복 바람으로 하루에 두 번 있는 서울 가는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내려 성 바오로 병원에서 할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염을 하거나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일도 엄마와 숙모들의 몫이었기에 나는 그냥 작은 방에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다가 간간히 심부름이나 다녀오곤 했다.


 이번엔 달랐다. 나에게 ‘총무’라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말이 좋아 총무지, ‘밥 당번’이다.

오시는 손님 수와 밥, 국, 반찬의 남은 양을 가늠해서 장례식 주방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과 함께 손발을 맞춰 총무실에 뛰어가서 “코다리 두 개요.”, “밥 한 통 더 주세요.”, “전 두 바구니 주세요.” 같은 주문을 넣고, 주문서를 잘 정리해서 보관해야 했다.


 장례지도사가 꿀팁을 하나 공유해 줬다.

“딸내미야, 이리 와본나. 니 저 냉장고에 컨디션 있제. 그거 저 뒤짝으로 숨카놔라.”

냉장고에 비치되어 있는 술과 음료수 중에 ‘헛개수’, ‘컨디션’과 같이 단가가 비싼 음료들은 숨겨 놓으라고 했다. 그냥 두면 사람들이 오며 가며 다 꺼내 먹어서 나중에 정산할 때 헉 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그러면서 꼭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에만 슬쩍 꺼내 건네주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장례식장에서 컨디션 같은 숙취해소 음료는 구경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할머니는 떠났지만 남아 있는 우리에겐 자본주의 정신이 살아있었다.



누가 사과 대가리를 다 치뿟노!


 우리 할머니는 한 동네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장사를 하셨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다 찾아왔다.


할머니에게는 오랫동안 “고스톱 친구”로 지낸 멤버들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친척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신데 고스톱에 워낙 진심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고스톱 치다가 마음이 상하면 한동안 고스톱 멤버는 왕래를 덜 하기도 했다. 그 고스톱 멤버들도 하나, 둘 저물어가며 이제 광을 팔 사람이 없어졌다.


할머니가 인기쟁이였던 만큼 할머니 가는 길에 불을 밝혀 주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사공이 이리 많아서 우리 할머니 배가 요단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 어디 노아의 방주를 세울 산에 올라 가는 것 아닐까 싶었다.


여기저기서 ‘감 놔라, 배 놔라’ 소리가 들리고, “아야, 니 쫌 와본나”, “이 누가 이래놨능교?” 소리가 곡소리와 함께 장례식장을 가득 메웠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는 곳에 의자를 줄지어 놓고 우리 할머니의 베스트 프렌드들이 나란히 앉아서는 누가 너무 울면 울지 말라고 같이 울고, 내 직장 동료들이 왔을 때에도 본인들의 손주들이 온 마냥 버선발로 뛰어가 “우리 딸내미 잘 부탁합니다” 하셨다.


그러던 중 논쟁이 붙었다.


할머니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들은 온전히 과일 그대로의 모습이었는데, 누군가 과일 윗동을 다 잘라 놓은 것이다.

상갓집 과일은 이러면 된다, 안 된다, 오늘 해야 한다, 내일 해야 한다 난리가 났다.

누가 이래 놓았느냐고 호통을 치는 할머니들.


나는 진범을 알고 있었지만 더 시끄러워질 것이 뻔해서 모른 척했다.


“할매! 우리 할매는 이런 짜잘한 거 신경 안 쓴다! 누가 맛있게 잡수라고 깎아 줬는갑다,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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