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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n 28. 2021

외할머니 장례식 소동 (1) 출생의 비밀

할머니가 떠나고 알게 된 이야기

축하하러 가는 길에 애도를 받다


 친구 N이 세상을 떠나고 꼭 한 달 후 저녁이었다. 20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나 친해진 친구 G가 청첩장을 주겠다고 우리 집 근처로 오고 있었다.

샤부샤부 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걸어 내려가던 중에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의 목소리는 30년 간 들은 그의 목소리 중 가장 무거웠다.


“누나, 외할머니 돌아가셨어.”


 친구를 보내고 꼭 한 달 만인데. 나는 또 길 한가운데서 무너졌다.

G에게 전화를 걸어 밥을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커피 한 잔 간단하게 하자고 이야기했다.

그녀를 축하해 주기 위해 만나던 날, 나는 그녀의 위로를 받고 그녀가 사준 샌드위치를 들고 SRT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할머니 돌아가신 거 아니래


 기차에 올라타자 또 한 번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아직 돌아가신 거 아니래. 할아버지가 유난을 떤 모양이야.”

이런 엄청난 오보라니! 그래도 이미 기차에 올랐으니 나는 부산에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언제 할머니가 떠날지 모르니 나는 한번 더 따뜻한 할머니 손을 어루만져 봐야 했다.


플랫폼에서 기차가 출발하고 5분 정도 지났을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할머니, 돌아가셨대…”


 빌고 빌었지만 이번엔 오보가 아니었다.




엄마, 혹시 우리 집안에 출생의 비밀 있어?


부산에 도착해 곧바로 할머니가 계시던 병원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라 장례식장은 아직 텅 비어있고 어수선했다.

곧이어 고인과 상주의 이름을 알리는 전광판에 이름이 떴다.


김 수 자



할머니 이름을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나는 또다시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자, 우리 엄마는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를 둔 맏이다. 고로 우리 할머니의 “자식” 명단에는 총 네 명이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섯 명이다.

서울에 사는 이모가 맏이로, 그녀의 아들이 (나에게는 육촌 오빠. 하지만 내가 너무 혐오하는) 우리 할머니의 “장손”으로 올라왔다.

상복도 그 수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할머니한테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데 장손 먼저 인사하라며 오빠더러 나오라고 했다.

그래도 이모가 “아니다, 장손은 느그제.” 하며 나와 내 동생의 등을 떠밀었다.


슬퍼 죽겠는 와중에 이게 무슨 상황이지 너무 궁금해서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엄마, 혹시 우리 집안에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있어?”

엄마에게 조용히 물었다. 엄마는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느냐고, 우리 집에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 왜 서울 이모가 장녀로 되어 있느냐고. 장녀는 엄마잖아.”

엄마는 슬픈 눈을 했으면서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 내가 우스웠는지 살짝 웃었다.




우리 엄마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어


 이야기인즉슨, 그 이모의 부모님(뭐라 호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할아버지의 형의 부부쯤 되는 것 같다)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이모가 학생 때 홀로 남겨졌고, 그런 이모를 우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거둬 키웠다는 것이다.

학비도 대 주고 밥도 먹이고 잠도 재워주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모는 할머니 돈을 들고 튄 적도 있는… 아무튼, 그렇게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지금의 이모부를 만났고 아들 하나 낳아 살고 있다 했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그 이모와 이모네 가족들이 싫었다. 명절이면 우리는 서울에 친할머니 댁에 갔다가 그 꽉 막힌 도로를 가로질러 서울 큰 이모 집에 가곤 했는데,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나는 그 집 가족들이 싫었고 그 이모 집에 가는 게 정말 싫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는 오전에 친할머니 댁에 갔다가 항상 바로 스키장 셔틀버스를 타고 스노보드를 타러 간다고 튀었다.


 내 개인적인 감정이 그렇다 보니 더더욱 싫었다. ‘왜 저 이모가 장녀고, 저 아들이 장손이야?’

나는 더 악착같이 “장손 나오세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동생 등을 떠밀며 함께 나갔다.


“외할머니 대단하시네.. 4남매만 키우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우리 외할아버지는 수출입 배의 마도로스로 일흔이 넘은 나이까지 배를 타고 다니셨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온전히 우리 외할머니가 다 독박 쓴 꼴이 된 것 같아서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엄마도 거들었다.


“맞아, 우리 엄마는 참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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