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한 달 살기 마지막 날

휴직 후 부산에서 보낸 한 달을 돌아보며

by Enero
27박 투숙이 맞으십니까?


정확히는 부산에 총 30박을 묵었다.

해운대의 한 레지던스에 숙박하기 전 친구들과 여행을 했고, 외할아버지 댁에도 다녀왔기 때문에 꼭 한 달을 부산에 묵었다.


남들은 ‘한 달 살기’를 한다 하면 제주도나 강원도를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내가 한 달간 휴식을 취할 곳으로 부산을 선택했다 하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내가 부산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곳이기도 하고, 나의 외가 친척들이 부산 전역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울증 환자이므로 언제든 사고를 칠 수 있을 거라는 가족의 걱정이 있었고, 하여 연고도 없는 지역에 혼자 가는 건 꺼려진다 했다.

부산은 생각보다 아주 넓어서 우리 집에서 외할아버지 댁까지는 차로 40여 분을 가야 하지만, 친척들이 많아서 막내 이모 집까지는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적당히 거리를 갖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해운대로 선택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는 한적한 곳에서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원생활을 한다던지 귀농을 하는 것은 내 인생에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일이다. 나는 도시가 좋다.

번잡스럽다 한대도 복작복작 사람 떠드는 소리와 밤늦게까지 도로를 비추는 네온사인이 있어야 오히려 한적한 산과 들에서보다 안정감을 느낀다.

나의 생활 반경 안에는 언제든 꼬북칩이나 담배를 살 수 있는 편의점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맥도널드가 근처에 있는 ‘맥세권’이어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죽을 수 있는 환경이 더 잘 조성되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집 밖에 나와 1분만 걸으면 바다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곧 깨달았다.

부산에는 가족들이 포진해 있고, 해운대는 복작하다 못해 시끄러울만치 사람이 많다.

해가 저물고 해안가에 발이라도 빠져 볼까 싶어 해안가를 서성이면 저 멀리서부터 ‘왜애앵’ 소리를 내며 해양경찰이 “입수 가능 시간 아닙니다. 나가세요!”하고, 공무원들은 계속 돌아다니며 혹시 해변에서 맥주 파티라도 하고 있는 게 아닐지 감시하고 있다.



내일 뭐해? 나 가도 돼?



KTX, SRT 그리고 비행기까지. 서울에서 부산에 올 수 있는 방법은 너무 많고, 가격도 합리적이며 시간도 단축할 수 있다.

나는 또 하필이면 이 여름 성수기에 쉬겠다고 부산에 온 덕분에 친구들에게는 해운대 앞 호텔이라는 로열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도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찬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가족 중 누구도 혼자 사는 나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나의 절친한 친구들은 당일치기가 됐더라도 나에게 와서 내 동태를 살피고 갔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나의 상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내 안부에 대한 이야기는 피하고 왁자지껄 재미있는 이야기들만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갔다.


맥주 캔과 과자 부스러기, 자잘한 모래로 조금 지저분해진 방은 다음날 아침 책과 아이패드를 들고 카페를 찾아 나서면서 프런트에 살짝 “1017호 룸 정비 부탁드릴게요.”하면 해결되었다.

그렇게 크고 예쁜 카페들을 발견하고 책을 읽고 글을 하나 올리고 돌아오면 내 방은 언제 친구들이 다녀갔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가깝던 사람과는 더 가까워졌다.

원래도 숨김이 없는 사이였지만 마음에 있던 것들을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밑바닥까지 다 토해내듯 꺼내 보여주었고, 함께 많이 울고 웃었다. 이제 더 창피한 게 없을 만도 한데 아직도 둘이 있는데도 옷을 화장실에서 갈아입는 귀여운 친구.


얼마 전 브런치에 글을 잠깐 올렸다 지운 적이 있다. 내 유서였다.

그날 그 친구는 나 때문에 놀라 길에 주저앉았다가 바로 내가 사는 곳으로 달려왔다.

나는 화장실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커다란 타월을 끌어안고 샤워하던 그 모습 그대로 울다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불안정해서 내 가족이 힘들고 내 친구들이 힘들 거야.’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일상을 살고 행복했을 텐데.’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남자도 이렇게 마음 쓸 일 없이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낼 텐데.’

‘엄마는 나를 낳고 지금의 나와 친구가 되어 행복하다 하지만 내가 없었다면 더 행복했을 거야.’

따위의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한여름 밤의 매미처럼 울어대는 바람에 나도 같이 울었다.


그 친구는 내게 전화해서 “죽더라도 내가 해 주는 재미있는 얘기 하나만 듣고 가!”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서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가, 생각했다.



조금 가까웠던 사람과는 아주 가까워졌다.


함께 음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시고, 해운대 시장을 구경하고, 차를 빌려 기장과 송정의 예쁜 카페들을 오가며 ‘우리끼리’만 나눌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쌓였다.

혼자 지냈다면 먹을 수 없었을 회도 먹었고, 파도 부딪히는 소리를 메트로놈 삼아 모래를 발로 차며 걸었다.


광안대교 야경과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놀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운 아스팔트, 높이 솟아 화려함을 뽐내던 엘시티 그리고 그 건물 사이를 휘감는 거센 바람.

여름밤 11시, 부산광역시에 켜져 있는 모든 전구의 개수보다 더 많은 단어들이 34도 한여름 날씨에도 녹지 않고 36.5도 사이를 오갔다.


“오래 함께 했다고 잘 맞는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우리는 고작 몇 년 회사에서 함께 한 시간이 전부였는데, 며칠 새 “우리 왜 이제야?” 싶을 정도로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내 마음을 뒤흔든 사건들



사실 아직도 온전히 내가 괜찮아졌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부산에서 한 달간 묵으면서 여러 일들이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30일 기한이었던 내 인생을 조금 더 연장해볼까 하는 마음을 먹었다.



1. 내 인생 최고의 책을 만났다

브런치에서 얼마 전 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과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바로 그 제목의 책.

닉 혼비의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라는 책 덕분에 나는 90년은 더 살아봐야 하나 생각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네 명의 자살 희망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 속을 너무 꿰뚫고 있어서 발가벗겨진 기분마저 들었다.

동반 자살에 대한 소설이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풀어질 수 있는 걸까? 결말을 스포 할 수 없어서 더 말은 못 하겠지만, 드문드문 나오는 표현들이 뇌리에 박혀 사진을 다 찍어뒀는데도 앨범을 열지 않고도 떠오른다.

이 책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영화 같아서 나는 부적처럼 부산에 있는 내내 책을 매일 품고 다녔다.


2. 글을 쓰기 시작했다

휴직이 시작되던 날, 브런치에서 ‘작가 승인’ 메일이 왔다.

내 감정 쓰레기통으로 써 볼까 하던 글쓰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고, 때로는 위안이 된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했다.

은유적, 비유적 표현이나 화려한 수식어를 잘 쓰지 못해 키보드 가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갔을 뿐인데, 내 글이 너무 담담해서 눈물이 났다는 말을 들었고 ‘작가님 힘내세요’ 같은 메일도 꽤 받았다.

알고 지내던 동생도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통영과 부산에서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글을 써 내려가고, 서로의 글을 나누어보면서 감탄하고, 떠오르지 않는 문장들에 대한 영감을 묻기도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고 친한 언니와 주제 하나씩을 주고받으며 릴레이 소설을 쓰기로 약속했고, 나 같은 사람들이 모여 오프라인 책을 출간하는 모임에도 들었다.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아주시는 감사한 독자님들도 만날 수 있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몇 살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우리는 서로 알지 못하지만 글귀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위안이 된다.

별 뜻 없이 내 생일이 있는 1월을 스페인어로 부르는 말인 ‘enero’를 내 필명으로 정했는데, 어쩐지 이 필명은 febrero, marzo, abril… 로 이어질 수 있는 시작이 될 거란 기대감이 든다.


3. 내가 없어도 회사는 괜찮다는 걸 깨달았다

5년 만에 깨달았다.

사실 회사는 내가 없던 5년 전에도 잘 돌아갔고, 내가 부재중인 현재도 잘 돌아가고 있다.

코로나19에도 실적은 오르고 있고, 일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넘쳐나서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파서 쉰다고 해서 갑자기 주가가 폭락한다던지, 프로젝트가 엎어진다던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팀장님은 나더러 꼭 돌아오라면서도 쉬고 싶은 만큼 쉬라고 배려해 주셨고, 회사 일은 절대 신경 쓰지 말라 하셨다.

회사 계정이 모두 막히고 장비도 모두 반납했기 때문에 회사 소식은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었다.

불안감은 휴직 직후 3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내가 당장 돈을 벌지 않고 내 긴 인생에서 한두 달쯤 소비만 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무너지고 망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4. 정우성 배우님을 만났다

이 사이에 끼우기엔 좀 우습긴 하지만, 이만큼 큰 사건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날 나는 바다에 빠지겠다는 결심을 한 아름 안고 해변가에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길이었고… 그랬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톱 연예인, 한국을 대표하는 꽃미남 배우인 정우성 님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다는 사실이 또 다른 불씨가 되었다.

사실 그날 배우님을 뵙고 너무 신기해서 내가 쓴 글을 담아 배우님께 우연히 뵙게 되어 참 감사했다고 DM을 보냈는데, 예상치 못하게 답장을 받았다.

그의 벽이 높았다. 완벽.

정우성 배우님은 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데요”라며, 언젠가 우연히 뵙게 될 날을 기다리며 항상 응원하겠다는 나에게 “우연히 안 봐도 본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기고 본인에 대한 응원을 평생 아끼지 마세요”하며 내 이름을 물어봐 주셨다.

정말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였다.

친구 J는 그 말을 정우성 배우님이 했으니 와닿지, 본인이 했으면 “아 뭐 어쩌라고!”하고 받아 칠 거 아녔냐고 하기에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로 돌아가면 아마 그 전처럼 쓸데없는 책임감에 묻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냥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서, 그냥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게 되면 나는 그전처럼 ‘퇴사 대신 죽어야지’ 같은 생각은 아마도 (기대하기로는) 덜 하게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정도만 쉬어도 좀이 쑤시고 다시 일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솔직히 나는 일을 떠나 온전히 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이 반백수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든다.

현실만 허락해준다면 앞으로도 평생 부산에서 글 쓰고 책을 읽으며 살고 싶다.


아직까지는 출근해서 숫자로 가득 메워진 엑셀 시트를 볼 생각을 하면 먹은 것들이 도로 다 올라올 것 같아서, 딱 한 달만, 아니 추석 때까지만 더 쉬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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