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KB리그에 돌풍을 일으킨한화 이글스
나는 행복합니다~ 이글스라 행복합니다!
어릴 때부터 술만 취하면 <부산 갈매기>를 불러대던 롯데 광팬 외삼촌과 삼성 팬이었던 아빠 덕분에 야구 시즌이 되면 TV 야구 중계를 보곤 했다.
아주 어릴 때라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직관 갔던 날이었다. 어린 나는 야구 경기를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냥 오랜 시간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주변의 이모, 삼촌들이 질러대는 함성 소리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떼를 부리기 시작했고... 결국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저씨의 하얀 셔츠에 내 발자국을 꼭 눌러 밟아 버렸다. 다른 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 그냥 그 흰 셔츠에 남겨진 내 발자국은 또렷이 기억난다.
내가 연고도 없는 한화 이글스를 좋아하게 된 데는 정말 이상한 이유가 있다.
항상 꼴찌만 하는 팀을 왜 좋아하냐면, 항상 꼴찌만 하기 때문이었다. "엘롯기"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한화는 매 시즌 꼴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서도 매 시즌 돈을 쏟아붓고 선수들은 병살타를 쳐도 일단 열심히 뛰었다. 그래서 그냥 응원하고 싶어졌다. 일산에 사는 나로서는 지하철을 타고 잠실에 가는 것보다 행신역에서 KTX를 타고 대전에 가는 게 더 빠르고 쉽기도 했다.
2015년 한화 이글스는 말 그대로 뉴스의 메인을 항상 장식하는 붐을 일으켰다. 김성근 감독이 영입된 게 단연 가장 큰 이슈였다. 김성근 감독이 워낙 팬층이 두터운 노장이었던지라 그를 따라 한화로 이적한 팬들이 아주 많았다. 그해 시즌 초반은 바야흐로 '한화 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9회 말까지 역전을 거듭해서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고, 연장까지 가는 바람에 한 번 야구장에 가면 밤 9시를 넘기기 부지기수였다.
난 이때 최악의 실수를 하게 된다. 꿈에 부풀어 가을 야구 점퍼를 샀다.
나는 레전드 유니폼부터 해서 컬러 별로 유니폼을 샀고 좋아하는 선수를 마킹했다. 윤규진, 김경언, 이용규, 권혁. 하지만 "직관 필패"라는 나의 징크스 덕분인지 내가 마킹한 선수는 그날 기량을 펼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다음 유니폼부터는 마킹을 하지 않았다.
그 해 시즌에서는 연장을 거듭하다 권혁 선수가 야구 배트를 들고 마운드에 올랐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권혁 선수는 그야말로 '혹사' 당하고 있었으며 해당 시즌 한화 이글스 불펜 투구 수 11,096구를 기록하며 '극한 직업'으로 떠올랐다. 최소 투구 수 1위인 삼성 라이온즈가 7,400구 정도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그래도 나는 선수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리기를 반복하는 걸 보며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221 응원석을 피켓팅하고 목이 터져라 "안타를 날려줘요~!", "Don't stop~ 날쌘돌이 용규!"를 외쳐댔다. 그런데 한화에 정이 떨어질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최진행 선수의 약물 투여 사건이었다. 당시 최진행이 그렇게 좋은 타율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최진행이 약을 했을 리가 없다! 약을 하고도 저 기량일 수가 없다고!" 하며 야구판이 흔들렸다. 배신감도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해 야구 시즌에서 '탈꼴찌'의 영광을 맞았다.
가을야구 점퍼는 개막 전이나 시즌 초, 아직 날씨가 쌀쌀할 때 입을 수 있었다. 잠실 야구장에서 두산이나 LG 홈경기가 승리로 끝나면 펼쳐지는 야외 주막에서 이글스 야구 점퍼를 걸치고 있으면 다들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말을 꼭 한 마디 붙인다.
"그거... 사신 거예요? 혹시 15년도에?"
"네... 시즌 초반엔 춥잖아요.ㅎㅎ"
야구를 모르는 여자 친구들을 데려가면 사실 야구 경기를 정말로 보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지만, 친구들의 만족스러운 셀카 타임과 응원가를 흥얼거리는 걸 보면서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신천(지금의 잠실 새내) 술집에서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시선을 받는 것도 관종인 우리에겐 나름 재밌는 일이었다.
그래도 2019년! 드디어 점퍼를 한 번 입을 수 있었다. 11년 만에 한화 이글스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승리를 거머쥐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한화 이글스 팬이 되고 난 후 처음으로 가을 야구에 가 본 날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글스 팬으로서 가을 야구에 가는 건... 마지막이.. 되면 안 되는데...)
코로나로 직관이 어려워진 게 너무 아쉽다. 이태원에 야구 경기를 중계해주는 스포츠 펍이 있는데, 가까운 친구들이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거나 다들 멀리 산다. 집에서 혼자 야구 경기를 보는 건 괜히 또 재미가 없다.
코로나 시국이 끝나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야구 직관을 가고 싶다. 응원석도 좋고, 아니면 사람 없는 외야에 앉아서 보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