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레카야자 Jun 01. 2020

그곳에서 본 38은 그저 숫자가 아니었다.

'이천' 물류창고 대형 화재…지금까지 37명 사망

지팡이를 짚은 할아버지는 유독 조용한 유족분이었다.

그는 터덜터덜 체육관 밖으로 나와 공장이 보이는 나무 아래로 걸어가셨다.

지팡이때문에 그리 보인건지 당장에라도 넘어질듯 위태로운 걸음걸이. 

나무 아래 서서 타버린 공장을 바라보며 할아버지는 목놓아 울었다. 아이처럼 울었다.

"OO야!", "OO야!" 목놓아 외치던 그 이름은 할아버지의 한없이 소중한 누군가였겠지.


할아버지의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미방분>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울었다.








4월 29일 수요일 당직근무였다.

저녁 무렵 출근하는 길에 회사 뉴스 어플 알림이 울렸다.

이천에 있는 한 물류창고에서 화재가 일어나 

(당시 시점) 7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

무거운 마음으로 각오를 다지며 출근했다.


당연히 이천으로 향했다.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회사에 도착한 시점에 사망자 수는 수 배가 돼있었다.

뉴스 첫 리포트에서 사망자 수는 37명으로 집계 되었다고 했다가

뉴스 말미에 앵커를 통해 그 수는 38명으로 정정됐다. 


현장에는 당일 평근을 한 다른 인원들이 이미 가있었고 

나는 이천병원으로 향했다. 

가장 많은 희생자들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곳이었다.




200430 뉴스투데이 <유가족 '오열'…시신 훼손 심해 신원확인 난항>



이천 병원에는 유족분들이 모여있었다. 

몇몇은 초조한 마음으로 건물 내부에서 신원 확인을 기다렸고

몇몇은 건물 외벽에 기대 앉아 울다 그치다를 반복했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이 흡연실에 앉아 

서로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병원에서 신원확인에 진척이 없자 유족들은 다시 현장 옆 마련된 임시 유족 대기실로 몸을 옮겼다.

새로운 소식이 나온다면 그 곳에서 가장 빨리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나도 그 곳으로 이동했다. 



200430 뉴스특보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도착한 임시 유족 대기시설 '모가체육관'은 어수선했다. 

잠시후 소방본부에서의 브리핑이 있었고 

추가적으로 확인된 신원을 게시해놓은 곳을 안내하자 유족들이 몰렸다.


여전히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의 유족들이나

믿고 싶지 않았을 죽음을 활자로 확인한 이들이나

모두 오열했다. 그 오열은 무섭게 번졌다. 


어떤 영상기자도 가까이 다가서서 스케치 할 수 없었고

어떤 취재기자도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울부짖는 유족들의 소리는 커져갔지만

체육관은 오히려 싸늘히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서른 여덟명의 유족들이었다. 




200430 뉴스투데이 <유가족 '오열'…시신 훼손 심해 신원확인 난항>




미리 와있던 인력들이 빠지고 나는 체육관에 남았다.

시에서는 여러 호텔과 모텔에도 유족들을 위한 방을 마련했지만 

유족들은 체육관 내 텐트로 들어갔다. 


어느 텐트들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오열과 흐느낌이 체육관을 채웠다.

그 소리는 전염성이 강해서 취재진들의 마음에지만 체육관을 비울 수는 없었다.


새벽에는 한차례 소란이 있기도 했다.

이천시 일선 직원이 한 유족에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시신의 위치를 잘못 알려줘 

유족들이 분개한 상황. 

관계자들이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유족은 소리쳤다.



200430 뉴스특보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아침이 되어 뉴스투데이 중계를 마치고 교대조들이 회사에서 출발했다.

그들이 도착하는 시간즈음 예정돼있던 뉴스특보의 중계까지 마쳤다. 

일단, 그 날은 이천에서 돌아왔다. 


이후로도 우리 회사에서는 매일 낮 두 팀, 야간에는 한 팀 씩 이천으로 보냈다.

나는 총 세 번 이천 현장에 다녀왔다. 그 중 두 번은 밤을 새웠고 한 번은 주간 상황을 커버했다.


세 번의 방문 중 마지막으로 이천에 갔던 5월 6일은 

유가족들의 첫번째 합동 추모식이 열린 날이었다.


38명의 죽음은 38이라는 한 숫자의 죽음이 아닌

하나 하나의 죽음이 서른 여덟개가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그 차갑고도 뜨거운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취재진의 접근을 불허하던 1층을 그 날 그 순간만큼은 유족분들이 허락해주셨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 서른 여덟명 중 한 명 한 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 명 한 명의 유족들의 슬픔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사회자 역할을 맡은 유족분이 추도사를 읽자 

하나둘 흐느끼던 장내는 이내 눈물로 가득찼다. 

추도사를 녹취하는데 찍고 있는 ENG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눈물이 전염됐다. 

최대한 한걸음 떨어진 마음으로 지켜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감정이었다.

정말이지 카메라를 놔두고 한바탕 울고싶은 마음이었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이천 참사 현장에 가보지 못했다.











나의 언론사 입사 이후로는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참사였다.  


2020년 4월, 서른 여덟개의 세상이 사라진 곳.

앞으로도 이천이라는 곳은 나에게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관련 리포트 ;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today/article/5749605_32531.html

https://imnews.imbc.com/replay/newsflash/5749952_29233.html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930/article/5761605_32517.html


매거진의 이전글 "얘들아, 선생님 얼굴 보이면 손 한 번 흔들어볼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