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6. ~ Logroño

걷는 법을 가르쳐 줬던 사람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28.5km)

= 168.7km


발이 커졌다. 연일 강행군에 팅팅 부은 것이다. 3일 동안 100km 넘게 걸었으니 얘도 무리하긴 했다. 평소 신는 사이즈보다 트래킹화는 10mm 크게 신으므로 아주 꽉 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타이트해진 게 느껴졌다. 걷는데 왼발 새끼발가락이 눌리는 게 느껴졌다. 내 (물)집 마련의 징조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 양말을 벗어보니 역시나 당첨이었다. 으, 물집 마련은 이리 원치 않아도 쉬이 생기는구나. 부동산 필패라던데 왼발은 좋겠다. 벌써 집도 마련하고.




어제 묵은 알베르게는 8유로짜리 공립이었다. 순례객들끼리 “8유론데 뭐”, “8유로잖아” 하며 서로를 달랠 만큼 시설은 열악했다. 32도에 달했지만, 에어컨? 알유키딩? 잇츠 8유로스.조금만 뒤척여도 침대는 삐그덕 댔고, 옆 침대와 분리해 놓은 칸막이도 틈새 없이 딱 붙어 있어 침대 프레임이 칸막이를 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 덕에 알람도 없이 일찍 잠에서 깰 수 있었고 더 자긴 애매한 시간이라 일찍 채비를 마치고 출발했다. 3일 만에 다시 30km 미만의 거리이고 특별히 업다운이 심한 구간도 아니어서 수월할 줄 알았는데 부어버린 발과 몸에 쌓인 피로로 마냥 쉽진 않았다.



첫 마을은 6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양이가 많은 곳이었는데 바가 없어 고양이 사진만 찍고 근처에 붙어있는 바로 다음 마을로 향했다. 오늘 경로상엔 많은 마을이 있는 게 아닌지라 케이틀린과 캘리포니아 여자분(이름이 생소해 두 번이나 듣고 또 까먹었다), 알릭스 등 같은 경로를 지나는 아는 얼굴들을 대거 만날 수 있었다. 막 오픈했는지 또르띠야도 빵들도 모두 갓 나온 거여서 맛있는 아침을 먹었다. 케이틀린은 크리스가 알려준 뉴질랜드 트래킹 코스에 관한 책을 오디오북으로 발견했다며 들으면서 가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오브콜스. 각자의 걷는 방식은 각자가 정한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걷다가 얼마 안돼 케이틀린이 잠시 쉬었다 가겠다며 나를 먼저 보냈다. 오잉 그럴 애가 아닌데 싶었지만 오늘따라 피곤하다는 말이 생각나 천천히 오라고 한 뒤 길을 나섰다.



다음 마을까지는 10km. 꼼짝없이 걷기만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중간에 푸드트럭이 두 개나 있었다. 먼저 나타난 곳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셨는데 실제 오렌지를 100% 갈아낸 주스어서 정말 정말 맛있었다. 제일 큰 컵으로 주문 한 뒤 연신 감탄하자 아저씨가 또 채워줬다. 지나는 모든 순례객에게 따듯한 환대를 해주는 유쾌한 아저씨였다. 즐거운 휴식을 만들어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떠났다. 다음 마을에서는 어제 만났던 한국인 현준 씨를 만났다. 20km 대 초반씩만 걸어 오늘 거리도 부담된다더니 걸음이 제법 빠른지, 아침에 바에서 마주친 후 이제야 따라잡은 거였다. 먼저 쉬고 있던 현준 씨를 보내고 혹시 케이틀린이 터덜터덜 오지 않을까 좀 더 기다려보다 오지 않아 나도 출발했다.



이제 목적지까지는 다시 또 약 10km. 부은 발과 통증이 느껴지는 골반에 힘겹게 걸었다. 동행도 없으니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데 아주 오래전 즐겨 들었던 블루파프리카의 <햇살 좋은 날>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양 옆으로 가로수가 즐비한 그늘길이 나왔는데, 그 모습이 꼭 5년여 전 제주도에서 찍었던 스냅사진의 배경지 같아 보였다. 그 스냅사진에서 우리는 각자의 브롬톤을 끌거나 타며 서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쭉 뻗은 가로수길 저편으로 나를 향해 자전거를 타고 오는 5년 전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걸어가고 자전거를 탄 커플은 다가오는데도 환영은 사라지지 않고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계속 살아있었다. 나에게 산을 걷는 법을 가르쳐줬던 사람.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는 걸 알게 해 준 사람. 내리막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자 나를 보고 깔깔 웃던 사람. 나에겐 산길을 걷는 느낌이나 신사동 아스팔트길을 걷는 느낌이나 똑같다고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사람. 이제는 나한테도 나무 냄새를 맡으며 돌과 흙이 섞인 길을 밟는 것과 관광객으로 가득 찬 신사동을 걷는 건 아주아주 다른데, 나도 이제 그걸 충분히 알게 됐는데, 더 이상 산길도 아스팔트길도 함께 걷지 않게 된 사람. 뒤이어 블루파프리카의 <긴긴밤>이 나오자 선글라스 안에선 땀 외에도 다른 종류의 뜨거움이 흘렀다.



목적지까지는 평탄한 길이 이어졌고 프랑스 길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인 로그로뇨로 들어서자 저 멀리 아파트나 유리건물 같은, 어느새 생소해진 풍경이 보였다. 나는 오늘과 내일 이곳에서 2박을 할 예정이다. 일정 상의 첫 번째 연박이라 꽤 널찍한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침대 공간과 소파 공간이 분리 돼 있고, 쓸 일은 없겠지만 조리공간도 있었다. 세탁기도 있다. 돈도 안 넣고 혼자 쓰는 세탁기라니. 출세했다 출세했어. 쉼 없이 걸어 도착은 열두 시 정도였는데 체크인은 칼같이 두 시부터라 무거운 가방을 들고 절뚝거리며 숙소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근처에 일본 라멘집이 있어 “맵게 해 주세요 맵게” 강조한 후 밥까지 말아 맛있게 먹었고, 대각선으로 젤라또 집이 보여 레몬맛과 블루베리요거트맛을 먹었다. 이것도 새콤달콤 아주 맛있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와 처음으로 낮잠을 잤다. 나 혼자 쓰는 욕실에서 한껏 시간을 들여 샤워하고, 거리로 향해있는 창문을 활짝 열어 뜻 모를 스페인어를 화이트노이즈로 깔아놓은 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맞으며 널따란 침대에 누우니 말 그대로 극-락. 두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이 글을 쓴다. 내일은 늦잠을 자고 나서 버스를 타고 근처 도시 빌바오에 다녀올 예정.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과 그로 인해 재생된 도시의 경관을 관광하고 올 거다. 최대한 안 걸어야지. 순례자들끼린 우스갯소리로 오랜만에 바퀴 달린 걸 타면 멀미한다는데 약국에서 키미테라도 사야 하나. 손짓발짓 하며 “아 여기 귀 밑에 붙이는 거 있잖아요 거“ 하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할 스페인 약사의 표정을 떠올리는 실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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