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 ~Catildelgado

현자타임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34.6km)

= 232.8km


발목이 너무 아프다. 출발 전 발목 아대는 챙겼다는 회사 동기의 질문에 나는 무릎이 아프면 아팠지 발목은 튼튼하다고 답했는데, 그 질답이 많이 생각난 하루였다. 발등에서 정강이 사이, 딱 그쯤이 너무 아프다. 발목이 얕은 신발이라 그런가, 걷는 자세가 잘못됐나 갖은 생각을 해봤지만 의미 없는 일. 알아도 아프고 몰라도 아프다. 오늘과 내일 연달아 3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일정인데 큰일이다.




어제저녁 알베르게에서 만난 한국 분들과 늦은 저녁을 먹어 10시 넘어 잠들었다. 때문에 오늘 기상도 좀 늦었고 출발은 7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숙소는 예약을 해둬 걱정 없었지만 갈 거리가 멀어 걱정이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약 20km 떨어진 산토도밍고나 27km 정도 떨어진 그라뇽에서 묵는 일정이었다. 다행인 건 어제 처음 만난 수빈 씨와 진 씨가 나와 같은 목적지로 간다는 점이었다.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라 동행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제법 의지가 됐다.



초반은 출발 시간이 서로 달라 따로 걸었다. 시작하자마자 나온 너른 평원에 순례자들이 앞뒤로 쭉 늘어섰다. 앞서가던 순례자들이 내쪽으로 돌아 사진들을 찍길래 나도 뒤돌아 봤는데 아주 멋진 일출이 펼쳐져 있었다. 그제야 Relive를 안 켠 게 생각나 뒤늦게 출발을 눌렀다. 으, 기록되지 않을 수 킬로가 아깝게 느껴졌다. 어제저녁 내린 비로 땅에는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었는데 오늘은 맑은 날이라 그 위로 햇살이 비춰 멋진 풍경을 만들어냈다. 분명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아픈 발목 탓에 온전히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평소보다 걸음이 많이 느렸고 그 때문에 처음으로 순례자들이 나를 많이 앞질러 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지난번 30km 이상의 여정 땐 20km까진 ‘에걔?’ 싶은 거리였는데 걷다 보니 발목이 점점 아파 와 산토도밍고까지의 거리가 엄청 길게 느껴졌다. 걷는 동안 앞서거니 뒤서거니 프랑스 친구들을 여러 번 마주쳤는데, 아델의 무릎 상태가 많이 안 좋은지 절뚝절뚝 걸음이 많이 느렸다. ”싸바 비엥?” 하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답했지만 지금 내 발목이 나에게 버겁듯 그녀의 무릎도 그녀에게 많이 버거웠을 것이다.



절뚝거리는 그녀를 절뚝거리며 지나치고 있으려니 도대체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 현타가 왔다. 뭘 위해 걷는 건가 절뚝,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 받는 일도 아니고 절뚝, 도대체 왜 나의 귀중한 휴가를 쓰고 절뚝, 이곳에서 이 고생을 절뚝, 하고 있나. 쩔뚝.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싶은 후회라기보다는 정말로 내가 무얼 위해 이 시간 이 과정을 겪고 있는 걸까를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러자 문득 까미노가 인생같이 느껴졌다. 즐겁고 행복한 순간순간이 있고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이 있다. 더 적확하게는, 힘들고 괴로운 시간의 연속선 상 위에 문득문득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알알이 박혀있다. 그래도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각자의 아픔과 고충을 안고 걸어간다. 묵묵히 또는 신음하며 때로는 비명을 지르며. 그 과정에서 만나는 반짝반짝하는 순간들이 아프고 괴로운 전반의 과정을 다 상쇄해 줄지는 순례자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생장이 탄생이고 산티아고가 죽음이라면 우리는 그 위를 ‘누가 칼 들고 협박’ 하지 않아도 걸어간다. 살아간다.



산토도밍고에 도착하자 안토니가 먼저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배탈은 좀 나아졌다고 물으니 아직도 별로라고 했다. 힘이 없을 텐데 어떡하냐며 고기를 좀 먹어야 될 텐데, 하니 어제저녁 시도를 해봤다가 밤에 또 고생을 했단다. 모두 각자의 고충을 안고 걷는 순례자의 길이다.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금방 이탈리아인 테레사와 다니엘, 프랑스인 맥스가 와서 함께 앉았다. 나는 아직도 목적지까지 약 12km가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7키로 정도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만 가는 일정이어서 나만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까스틸델가도까지 간다고 하면 다들 “왜?”하고 물었는데, 글쎄 왜 나는 이 다리를 끌고 거기까지 간다는 걸까 누구도 시킨 사람은 없는데. 누칼협? 근처에 약국이 있어 맥스가 발목 아대라도 사서 가라고 권했다. 근처에 있는 약국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순례자 길 위의 약국답게 부위 별로 종류 별로 여러 아대가 있었다. 양 발의 아대를 사서 약국에 앉아 착용했다.



약국에서 나오자 어제저녁을 함께한 한국인 셋이 쪼르르 오고 있었다. 약국에서 그들도 필요한 물품을 구비해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간 20km 초반대만 걷던 호진 씨도 웬일로 용기를 내 우리와 함께 까스틸델가도까지 갈 거라고 했다. 그는 복숭아뼈 쪽에 염좌가 생겨 샌들을 신고 걷는 중이었다. 약국에서 산 발목 아대가 별 효능을 못하는지 발목은 그대로 아팠다. 수빈 씨가 그라뇽에 가면 꼭 가야 하는 빵집이 있다고 해 다 같이 들렀다. 여러 종류의 빵을 다 같이 사서 근처 바에 앉아 음료와 함께 나눠 먹었다. 나는 얼음물과 에스프레소를 각각 시켜 셀프 아아를 해 먹었다. 쉬는 김에 발목 아대를 다른 방식으로 체결해봤는데 그 편이 훨씬 지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혼자 걷는 것보단 같이 걷는 게 강행군에 도움이 된다. 하다못해 가방에서 물을 꺼내는 것만 해도 가방을 내리지 않고 서로에게 부탁할 수 있으니 매우 편했다. 시답지 않은 소리도 하고 그간 걸으며 각자 경험 한 것들을 나누기도 하며 걸었다.



동행하는 두 여성분들은 일정이 타이트해 생장부터 산티아고까지 단 28일 만에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일정을 잡고 있었다. 여태까지도 앞으로도 묵는 마을들이 나와 비슷하니 걷는 양은 비슷한 건데 중간중간 연박을 하는 나와 달리 그녀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는 셈이니 그 계획을 실행한다는 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실제로도 둘은 스틱도 없이 서로 희희낙락 잘도 걷는다. 풋살클럽에서 만난 친구 사이라고 하던데 그 클럽에선 뭔 훈련을 시키길래 저런 건지. 대단하다. 넷이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약 4시 반. 나에게는 가장 늦은 도착 시간이다. 작은 마을이라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우리 넷이 오늘 묵는 순례자의 전부였다. 알베르게가 아주 아기자기하고 감성 넘치게 예뻤는데, 우리끼리 전세를 낸 셈이니 더 편하고 좋았다. 넷이 빨랫감을 모아 한 번에 맡기니 빨래삯도 1/4이면 해결이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서두를 필요 없이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테라스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다. 내일도 강행군이니 얼른 먹고 얼른 자야겠다. 이쯤 되니 다시 한번,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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