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0.~San Juan de Ortega

지랄 정도 0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 Juan de Ortega(35.3km)
= 268.1km


긴 거리를 앞두고 발목 상태가 걱정됐는데, 호진이 준 스페인 산 멘소래담과 수빈이 준 소염진통제, 그리고 내가 산 발목 아대가 제 몫을 다 한 것 같다. 삼위일체. 거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수준. 덕분에 어제보다 긴 거리였음에도 훨씬 수월하게 걸었다. 동행이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주진 않을까 더욱 걱정이었는데 제속도로 걸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왓츠앱으로 미리 숙소 예약을 해둔 나를 빼고는 셋이 숙소 예약을 제대로 못 해놔 우리는 오늘 아주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4시 반 기상, 5시 출발. 4시 반 기상까지는 순조로웠는데 일행 중 진이 심한 감기에 걸려 함께 걷지 못하게 됐다. 택시를 불러 우리의 목적지에 먼저 가있기로 하고 셋이 먼저 출발했다. 5시는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암흑이었다. 셋 중 나만 헤드랜턴이 있어 앞장서 걸었는데 어둡기도 하고 주변이 공사 중이라 길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이 길이 아닌가벼” 하고 옆길로 갔더니 온통 진흙밭. 신발 밑바닥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는 좀 더 가보니 어플상 경로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어 또 빠꾸. 결국 처음 들어섰던 길이 맞았다. 그 길로 돌아와 조금 걷다 보니 아주 작은 돌에 가리비 문양과 화살표가 보였다. 주위는 어둡고 갈 길은 먼데 길은 모르겠던 차에 그 표식은 아주 큰 길잡이가 돼주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걷자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헤드랜턴을 끄고 쉼 없이 걸어 벨로라도에 도착한 시각이 약 7시 반. 바에 들러 커피와 레몬 케이크 한 조각씩을 먹었다. 벨로라도는 벽화가 많고 아기자기한 바가 많은 정감 가는 동네였다. 많은 순례자들이 머물러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 앞에 길냥이 한 마리가 우리를 보고 냐옹 냐옹 울며 치댔다. 서울이었으면 츄르라도 몇 개 들고 다닐 텐데, 줄 수 있는 게 없어 아쉬웠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레몬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 던져주니 그나마라도 먹었다. 만지거나 들어도 큰 반항 없던 귀엽고 순한 길냥이.



벨로라도는 오늘 걸을 거리의 1/3 정도 되는 지점이었고, 2/3 쯤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또다시 10여 키로를 걸었다. 또래 한국인들과 함께 출발해 쭉 걷는 일정은 처음이었는데 쉼 없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며 걸으니 한시도 지루할 일 없었다. 진이 탄 택시비가 얼마 정도 나왔을까 셋이 음료 내기를 했는데 내가 꼴찌를 했다. 수빈이 50유로, 호진이 60유로, 내가 80유로를 불렀는데 정답은 55유로. 숙소에 도착한 진이 호진과 수빈의 침대까지 예약을 해놨다고 해 안심이 됐다. 비야프랑카에 도착하니 평점 좋은 바가 지척에 두 개가 있었다. 좀 더 자리가 많은 바에 들어갔더니 아직 점심시간 전인데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많았다. 먹고 싶은 걸 잔뜩 시켜 테이블 한가득 늘어놓고 셰어 해 먹었다. 일찍 일어난 데다 배가 불러지니 다들 노곤노곤 해졌다. 약 12키로가 남았으니 이제 3시간 여. 오래 쉬고 나서 다시 출발할 때는 적응된 부상 부위가 다시 아파와 괴롭다. 호진의 “12키로? 다 왔네요”하는 귀여운 허세에 다 같이 웃으며 다시금 힘을 냈다.



마을의 건물들이 나무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고 목적지까지 약 10여 분이 남았을 무렵 진 씨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도착했다. 숙소 주인이 오전에 얘기해 둔 호진과 수빈 몫의 침대 예약을 잊고 워크인 순례자들을 받아버려 내 침대만 남아있다는 거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났다. 도착하면 ‘지랄 정도’를 몇으로 따질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은 거리를 걸었다. 호진, 수빈과는 “가서 알베르게 주인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자”며 각오를 다졌다. 주인아줌마의 대응을 우리끼리 예상해 보며 “아 그러면 화 내기 애매한데”, “아 그렇게 나오면 진짜 달려들지” 하며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도착하니 진이 전달한 그대로였다. 남은 침대는 아예 없고 미리 예약한 내 침대와 이미 체크인을 한 진의 침대뿐이라는 것. 그 순간 내가 여기서 상대의 잘못을 꼬집어 지랄을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달라지는 건 그저 내 기분과 우리의 분위기뿐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후.. 그래 ‘지랄 정도 0’. 화낸다고 라꾸라꾸를 펴줄 것도 아니고. 아 성숙하다 성숙해. 주현이 이 모습을 봤어야 되는 건데. 내 침대를 수빈에게 양도해 진과 함께 자라고 양보한 뒤 나와 호진은 근처에 위치한 후지디 후진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체크인 후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데 손빨래 구역에 바구니조차 없었다. 침대 2층에 달린 펜스는 낭떠러지에 매달린 조난자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공립보다 후진 사립 알베르게였다. 호진과 빨랫감을 챙겨 나와 진, 수빈 숙소에 있는 세탁기를 사용했다.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에 앉아 얼음물과 더블 에스프레소를 시켜 아아를 만들고 치즈케이크를 시켰다. 기가 막힌 치즈케이크였다. 기분 사르르르르. 하나씩 더 사 먹었다. 진짜 맛있다. 저녁 먹고 또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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