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찌글라 고찌가. 고찌 글민 백리 길도 십리 된다.*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 중 인용. “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26.5km)
= 294.6km
이제 26km는 마음이 가볍다. 게다가 목적지는 순례길 상의 손꼽히는 대도시 부르고스. 내가 순례길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유튜브 ‘차차 세계로’의 차차님이 가장 좋아한 도시이기도 하다. 어제 알베르게가 너무 후졌던 관계로 오늘 부르고스에는 거금을 들여 호텔을 예약했다. 동행하는 수빈, 진, 호진은 공립 알베르게에 묵을 예정이라고 했는데 이곳의 공립 알베르게도 순례길에서 손꼽히게 훌륭한 곳이라고. 게다가 부르고스에는 구글 평점 4.9점의 한식당이 있다. 우리는 걸음을 서둘러 점심으로 한식을 먹기로 계획했다. 나는 교환학생 때조차 내내 한식당을 찾지 않을 만큼 한식엔 크게 미련이 없는 편인데, 순례길을 걷고 있자니 출국 고작 2주 만에 한식이 그 어떤 해외 경험 때보다도 당겼다.
약속대로 6시에 서로의 알베르게 중간쯤에서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 크록스를 신고 어기적 어기적 양치를 하러 갈 땐 이 발 상태로 도대체 어찌 걷지 싶다가도 신발을 신고 가방을 멘 후 허리 후크를 탁 채우는 순간 순례자 모드가 된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다리를 절다 점차 똑바로 걷게 되는 카이저 소제라고나 할까. “다리 저는 애가 범인”의 그 범인 말이다. 6시 반쯤이 일출 시간이라 6시 경에는 이미 어둠은 어느정도 걷혀있다. 시작과 동시에 산길이 시작돼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는데 순례자는 우리 넷 말곤 없었다.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데 왼편으로 나무 너머 갈색빛의 동물들이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게 슬쩍 슬쩍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짙은 갈색, 연한 갈색, 흰색 등 꽤 여러 마리의 무리가 보였다. 꼬리털과 갈기도 보였다. 말 떼였다. 고삐는 물론 목에 방울 조차 없는, 말 그대로 자연 상태의 말들이었다.
아직 세상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시간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우거진 나무 사이로 말 떼가 우리와 함께 걷고 있었다. 비현실적이었다. 꿈같은 풍경이었다. 다같이 줌을 당겨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짙은 색의 말 한마리가 우리 쪽으로 걸어나왔다. 느릿느릿 뚜벅뚜벅. 나무 사이를 헤치고 길로 들어서자 우리는 살살 뒷걸음을 쳤다. 말이 도약하면 순식간에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협하려는 게 아니라는 듯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걸어왔다. “길을 조금만 비켜줄래? 우리 애들이 이쪽으로 지나갈 거라서 말이야” 하는 듯한 부드러운 태도였다.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가까이 말과 눈을 맞추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는 반대편 나무 쪽으로 살짝 돌아 앞쪽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뒤따라 말의 무리가 등산로 쪽으로 우르르 나와 가장자리의 풀을 뜯었다. 우리는 뒤돌아 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느정도 풀을 뜯고 다시 짙은 색의 말이 반대편으로 건너가자 말들은 1열 종대로 그를 뒤따라갔다. 지나가는 모습까지 모두 구경하고 나서야 우리는 가던 길을 나섰다. 한바탕 환상적인 꿈을 꾼 것 같은 풍경이었다. 이 장면을 오래오래 잊지 못하겠지, 생각했다.
마을 하나를 지나쳐 두번째 마을에 도착해 우리는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늘 그렇듯 한 명 뿐인 직원은 한 사람의 주문을 받고 모든 메뉴를 준비해 내준 뒤, 그 다음 사람 주문을 받고 또 그 메뉴를 제조해주고 다시 그 다음, 그런 식이었다. 때문에 그렇게까지 길지 않은 줄임에도 우리가 각자 주문한 빵과 커피를 받아 자리에 모이기까진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초코 도넛과 초코빵과 라떼. 순례길에선 왜이리 초코가 당기지, 라고 하기엔 양심이 없다. 난 원래가 초친자(초코에 미친 자)다. 그저 죄책감 없이 먹을 정도로 칼로리를 태우고 있어 더 자주 먹을 뿐.
생각보다 지체된 시간 탓에 좀 더 속도를 올렸다. 우리가 “고작 26km”라고 했었나. 실언이었다. 거리감은 마음가짐의 문제인 건지, 외려 36km에 달했던 어제보다 만만하게 봤던 오늘의 26km가 더 힘들게 느껴졌다. 내 발목은 걷다보니 걸을 만해졌는데 호진의 발이 문제였다. 벌써 거의 일주일 째 샌들을 신고 걷고 있으니 이제 노출된 발가락이 아파온다고 했다. 그간 소염제를 꾸준히 먹었으니 다시 신발을 신어보기로 했는데 여전히 염좌가 생긴 부위는 아프고 그간 생긴 다른 부위의 통증들도 함께 느껴진다고 했다. 부르고스로 들어온지는 꽤 됐는데도 워낙 큰 도시의 크기 탓에 우리의 목적지까진 아직도 한 시간 반여가 남아있었다. 절뚝절뚝 거리다 멈추기를 수차례. 확실히 걸음이 느려진 그의 보폭에 맞춰 걷다가 나는 고민 고민 끝에 말을 건넸다. “내가 진짜 큰 마음 먹고 하는 말인데, 가방 줄래?”
그는 몇 번을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그럼 10분 만 들어달라”며 가방을 넘겼다. 웬일인지 나는 오늘 후반부부터 발목도 그닥 안아프고 힘이 뻗쳤다. 30대 초반까진 몸의 회복력이 아직 쓸만 한 건가. 웬만한 순례자의 가방은 전부 내 가방보다 가벼웠으므로 그의 가방도 내 가방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걸었다. 그는 “와 진짜 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날아갈 거 같아요 진짜로” 하며 들떴다. 약속한 10분이 좀 더 지나자 가방을 돌려달라고 성화였지만 쭉 들었으면 모를까 다시 가방을 메는 건 그에게 무리일 터, 수빈이 나서 자기가 들겠다고 했다. ‘테토녀’의 진수를 보여주겠다나 뭐라나. 호진의 가방을 수빈에게 넘기고 수빈의 가방을 내가 가져와 멨다. 가방의 개수가 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수빈의 가방보다 호진의 가방이 무거웠으므로 수빈은 자기 몫의 힘을 보탠 셈이 됐다. 수빈의 가방은 내 가방의 반도 안되는 무게라 실제로 하나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호진은 정말 마음이 불편하다며 누차 우리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나는 농을 섞어 “그럼 오늘 꼭 엄마한테 얘기해”라고 받았다.
호진은 물론이고 나 또한 이들과 함께 걸은 지난 며칠 동행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그제 묵은 까스틸델가도에선 이들이 아니었다면 시골집에 나 혼자 묵을 뻔 했고 수빈의 약도 호진의 스페인산 멘소레담도 없었을테니 지금 내 발목이 어땠을지 모른다. 순례자는 자신의 두 다리로 자기의 가방을 메고 자신 몫의 거리를 걷지만, 누구나 앞뒤로 여러 순례자들과 도움을 주고 받으며 걷는다. 그것이 사소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이든 순례자와 순례자 사이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가 이어진다. 혼자 걷는 것은 혼자 걷는 대로 함께 걷는 것은 함께 걷는 대로 매력이 있지만, 모든 여정을 혼자 해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은 결국, 같이 나아간다.
셋의 숙소인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문 밖에 케이틀린이 서 있었다. 멀리서부터 난 그녀를 알아보고 양 팔을 휘적거리며 인사했다. 케이틀린은 저멀리서 눈을 가늘게 뜨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거지?’ 하는 표정을 보였다. 줄에 도착해 하이파이브를 치며 “내 예상보단 빨리 만났네!” 하자 “도대체 어떻게 벌써 부르고스에 온 거야? 도대체? 달려온 거야?” 하며 놀라워했다. 자기랑 걸을 땐 더 많이씩 걸은 날도 있었는데 새삼스레 왜 이런담. “너 다시 보려고 많이씩 걸었지”하고 너스레를 떨자 “푸웁” 하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체크인 하고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갈거라기에 나는 한국인들과 한식당에 가기로 했다고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남겼다. 워낙 빨리 걸으니 다시는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반가웠다. 아닌게 아니라 부르고스는 실로 만남의 광장이었다. 중간 경로를 어찌했든 한 번씩은 들러가는 대도시라 며칠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우리 네 명에 로스 아르코스에서 만났던 현준, 상민까지 여섯명이 한식당에 가 ‘푸파’를 하고 츄로스에 커피까지 하고 난 후 부르고스 대성당에 다녀왔다. 입장료를 내고 어플을 깔아 도슨트를 듣는 거대한 규모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었다. 성당을 나와 나도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씻었다. 역시나 혼자 쓰는 안락한 공간이니 편하긴 하지만 괜히 혼자 호텔을 예약했나 싶은 생각이 지금도 든다. 여기선 공립에 함께 묵고 다른 마을에 호텔을 예약할 걸. 하루치 예산을 정하고 규모있게 쓰는 타 순례자들에 반해 나는 내가 여태 순례동안 얼마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돈은 서울에서나 여기에서나 줄줄 샌다 줄줄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