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5. ~Moratinos

달팽이의 속도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31.3km)

= 414.8km


발목도 물집도 거의 통증이 가셨다.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변하고 아픈 부위가 바뀌어가는데, 오늘은 운 좋게도 도드라지는 통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며 가며 까미노 친구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주로는 혼자 걸었는데, 민음사 팟캐스트와 리드미컬한 노래들을 들으며 신나게 걸었다. 스틱도 가방에 꽂아놓고 양팔을 휘적거리며.




오늘은 오후에 온도가 많이 올라갈 예정이라 새벽 일찍 출발을 서둘렀다. 오랜만에 5시대에 출발했는데 헤드랜턴 배터리가 나가 잠깐은 어둠 속을 걸었다. 차도 갓길로 걸어야 했어서 좀 걱정이 됐으나 그 시간에 오가는 차는 거의 없었다. 첫 마을이 17km 거리에 있다. 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 중엔 여태까지 중 최장 거리다. 그래서 물통에 물도 최대한 가득 채우고, 사과 두 알과 하몽도 한 팩 챙기고, 초코렛 바도 하나 챙겼다. 컨디션이 괜찮으면 한 번 정도, 안 좋으면 세 번도 쉴 수 있는 거리다.



며칠간 양말의 구성을 바꿔가며 테스트를 해보고 있는데, 초반부 인진지 발가락 양말과 스포츠 양말을 겹쳐 신던 것이 좀 갑갑하게 느껴져 지난 이틀 정도는 인진지 발가락 양말만 신고 걸었었다. 어제 묵은 까리온엔 순례자들을 위한 매장이 하나 있었는데 적당해 보이는 양말을 하나 새로 샀다. 오늘은 처음으로 발가락 양말을 아예 신지 않고 발 전체에 꼼꼼히 바셀린을 바른 후 새로 산 양말만 한 겹 신었다. 결론은 지금껏 신어본 구성 중 가장 좋았다. 나을 때가 돼서 나은 건지, 양말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발이 편했다.



8키로 정도를 쉼 없이 걷자 허허벌판 한복판에 오아시스 같은 푸드트럭이 나타났다. 푸드트럭이라기엔 제법 본격적으로 차려놓은 곳이었는데, 마을 없이 17km가 이어지는 구간이다 보니 순례객들의 방앗간이 됐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안 써도 알 것 같은 메뉴를 시켜 먹었다. 라떼와 초코빵. 서비스로 위스키 더블샷 잔에 생 오렌지 주스를 따라줬다. 드넓은 평원 너머로 일출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세상이 다 내 거. 내가 들고 온 오렌지 주스를 더 마시고 사과도 하나 먹었다. 든든한 아침이었다.



남은 10키로도 단숨에 빼 드디어 첫 마을이 나왔다. 얼음물과 에스프레소를 시켜 아아를 만들고 바나나 케익을 시켜 먹었다. 함께 앉아있던 현준이 떠나고 나도 출발할 채비를 하는데 케이틀린이 나타나 다시 앉아 좀 더 시간을 보냈다. 케이틀린한테 “도대체 네 가방은 왜 점점 뚱뚱해지는 거야?” 물으니 웃으며 ”그러니까 말이야 나도 모르겠어“ 했다. 프랑스 푸에드뷜레부터 걸어온 케이틀린은 며칠 전 1,000km를 돌파했다. 조금 늦었지만 축하한다고 전하자 이미 며칠 지났다고 쿨하게 받았다. ”우리 케익이라도 하나 사야 되는 거 아냐?“ 하니 ”나 케익은 어차피 매일 먹는데“ 하길래 ”아니 촛불 꽂아야지“ 하니 웃어넘겼다. 오늘은 내 걸음이 제속도가 나서 케이틀린을 뒤에 두고 ”또 보자”며 속도를 올렸다.



무더운 날씨였으나 웬일인지 뚜렷한 통증이 없는 발과 다리 덕에 신명이 났다. 평소보다 좀 비트가 빠른 노래들을 재생하고 양팔을 나빌레라 춤을 추며 걸었다. 오랜만에 눈에 보이는 모든 순례자들을 제치며 나아갔다. 오늘 길에는 유독 달팽이가 많았다. 부르고스에서 본 마트에서 이 달팽이들을 그대로 생물로 팔고 있던데, 딱 에스까르고에 쓰이는 그 달팽이인가 보다. 달팽이들은 정말로 느렸다. 걸어가면서 보면 움직이는지도 모를 만큼 느린데, 가만 멈춰 지켜보면 걸어온 경로를 남기며 느으릿 느으릿 기어간다. 내 보폭 한 걸음만큼을 가는 데에만 족히 한 시간은 걸릴 것 같다. 쟤네한테 이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보다 얼만큼 크고 넓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저 속도로 움직이면 쟤네의 하루는 내 하루보다 얼마나 짧을까. ‘하루’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시점으로 달팽이의 시간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쟤네나 나나 뭐 얼마나 차이가 날까. 더 나아가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자동차니 비행기니 그런 거 다 빼고, 계급장 떼고 단순히 신체 대 신체로 맞짱을 뜬다면 인간의 이동수단인 이 걸음 또한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나.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발가락 다섯 개에 물집이 잡히고 양 발목이 부을 만큼 걸어봐야 400km 남짓.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연필로 내가 걸어온 거리를 그어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지구를 다 가진 먹은 것처럼 오만하게 굴 때, 기실 우리의 몸이란 얼마나 연약한 미물인가 말이다. 지구 앞에,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마음이었다. 바닥에 깔린(아, 미안하다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을 수도) 달팽이를 밟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며 걷는 동안 이런 생각들을 했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는 이탈리아 분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이탈리안 저녁이 일품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사실 자자한 정돈 아니고 그런 리뷰를 하나 봤다. 도착하자 아직 체크인 시간은 안 됐는데, 마당에 들어서자 열흘도 더 전에 처음 만난 이탈리안 순례자 다미아노가 족욕탕에 발을 담그고 우리를 반겼다. 바로 신발 벗고 입수. 뜨겁게 걸어와 찬 물에 종아리까지 담그니 체크인이고 나발이고 점심도 이 상태로 배민 시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체크인 후 씻고 나와 근처 바에 오니 귀여운 고영희들이 나른하게 졸고 있었다. 날이 너무 더워 나는 안에 앉아 이것저것 시켜 먹고 이 글을 남긴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니 새로 나온 국내 만화영화 <이 별에 필요한>을 한 편 봐야겠다. 아 오늘 여러모로 기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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