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6. ~El Burgo Ranero

<에브리씽 에브리원 올 앳 원스>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28.7km)

= 443.5km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이들을 만나지 않고 혼자 걸은 건 꽤 오랜만이다. 잠깐 엘라를 마주치긴 했지만 말 그대로 마주쳐 지나갔다. 오롯이 혼자인 시간은 심심하고 외롭다기보다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오늘 지나는 사아군이라는 마을은 내가 걷는 프랑스길의 정확히 절반 지점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반주증’을 발급해 준다. 사아군은 출발지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이니 두 시간여면 충분한데 발급처가 9시 30분에나 문을 열기 때문에 일찍 나갈 필요가 없었다. 8시 반쯤 사아군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쉬다가 반주증을 받을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하는데 약한 빗줄기가 내렸다. 우산이나 판초를 쓸 정돈 아니라서 가방만 레인커버를 씌우고 ‘오히려 좋아’ 마인드로 걸었다. 날씨가 날씨라 오늘은 일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의 틈으로 해가 빨간 기운을 쏘아 올렸다. 언뜻 저 멀리 마을에서 화재라도 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좀 더 걷다 뒤를 돌아보니 지평선과 먹구름 사이로 동그란 해가 보였다. 어떻게든 떠오르는구나. 불굴의 의지다.


사아군에 도착해 반주증 발급처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와 파운드 케익을 시켰다. 초코빵이 드디어 질린 것은 전혀 아니고 팔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다. 9시 20분쯤 발급처로 갔더니 순례자 둘이 미리 와있었다. 세상에 오픈런은 한국인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어쨌든 반주증을 받아나와 인증샷을 찍고 다시 출발. 목적지까진 17키로가 남았다.



10키로쯤 더 가면 또 다른 마을이 나온다. 점심시간쯤 될 테니 그곳에서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계획으로 가는데, 세상에 마을에 조금 못 미쳐 갖가지 종류의 스무디를 파는 바 겸 알베르게가 있지 않은가. 스무디를 참는 건 유죄. 말도 안 통할 나라에서 재판을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니 저절로 발걸음이 그리로 향했다. 외따로 떨어져 있던 만큼 꽤 큰 규모의 알베르게였는데 아직 체크인 시간은 되지 않아 건물이 한산했다. 파인애플과 망고가 들어간 스무디를 시켰는데 망고가 떨어졌대서 파인애플과 코코넛이 든 걸로 주문했다. 나오자마자 쭉 빠니 반 잔. 과장 않고 다 먹는 데까지 1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출발할 채비를 하는데 처음 보는 한국인이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연일 무리를 해 오늘은 일찌감치 멈추려 들어왔다고. 순례길에 오기 전부터 기대했던 알베르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과 겹쳐 완전히 질려버렸다며 요 며칠 40km씩 무리를 했단다. 통성명을 하고 또 보자는 인사를 한 뒤 나왔다.



조금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린 갈림길이 아니라 둘 다 프랑스길이었다. 다만 여지껏 만난 갈림길 중 가장 길게 갈라져있는 길이었고 어느 쪽을 택하냐에 따라 레온 전에 마주할 마을들이 달라지는 갈림길이었다. 나는 왼쪽 길을 선택해 걸었는데 차도와 평행하게 난 샛길로 쭉 걷는 평탄한 길이었다.



한쪽 길을 선택하면 다른 길은 선택할 수 없다. 한쪽 길에서 겪는 일들과 마주하는 사람들, 펼쳐진 풍경들과 지나갈 마을들을 다른 길에선 경험할 수 없다. 한번의 선택으로 무수히 많은 것들이 바뀐다. 그 무수히 많은 것들의 결과로 나는 변화하고 만들어진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원 올 앳 원스>(이하 <에에올>)가 생각났다. 우리가 살면서 선택하는 무수히 많은 갈래들마다 하나의 평행 우주가 만들어진다는 영화. 그래서 지금의 나는 무수히 많은 ‘나’들 중의 한 모습일 뿐이고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모습이 되어있는 내가 있다. 마침 순례길을 오기 불과 며칠 전에 <에에올>을 다시 한 번 봤다. 처음 봤을 때에 비해 훨씬 감명 깊었고 큰 위로를 받았다. 지금 나의 모습이 퍽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썩 만족스럽지 않을 때, 다른 우주 어딘가에서 또 다른 ‘나’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아닌 게 아니라 나같이 과거의 선택들에 미련이 많은 사람에겐 진짜로 위로가 됐다.



오늘 내가 갈림길에서 선택한 왼쪽 길을 걷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 묵는 알베르게 등은 내가 왼쪽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마주하는 것들.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면 마주할 수 없는 것들. 사실 이 갈림길뿐 아니라 순례길 전체가 그렇다. 그간 내가 만난 사람들과 경험한 것들은 정확히 그 날짜에 이 길을 선택해 걷기 때문에 만난 인연들이고 그것은 과장하자면 필연이고 오바하자면 운명이 된다. 오른쪽 길을 선택해 걷는 나를 상상해 본다. 다른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고 다른 알베르게에서 묵는 나를. 더 거슬러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니라 발리 한 달 살기를, 남미 여행을, 북유럽 일주를 선택한 나를 상상해 본다. 그곳에서 겪을 일들과 만날 사람들을. 그리고 결국엔 그곳을 상상한다. 너와 내가 다른 선택을 해 여전히 ‘우리’인 우리가 이 여정을 함께하는 모습을.



도착한 마을에는 호텔 하나와 호스텔 두 개, 알베르게 두 개가 있었다. 내일은 가장 긴 거리를 걸어야 하는 날이라 호스텔에서 독방을 쓰고 싶었지만 남은 방이 없어 공립 알베르게에 둥지를 틀었다. 매우 친절한 호주인 부부가 봉사를 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데 “영어를 할 줄 아냐”기에 “물론이지. 근데 네가 한국말을 하면 더 좋겠지.”하고 받았다. 농담이었는데 머쓱해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미안했지만 지난 며칠 서양인에겐 주저 없이 영어로 말하면서 나한텐 영어가 가능하냐는 질문을 받길 수차례, 오늘은 같은 질문에 그저 가능하다고만 답하기엔 약간 빈정이 상한 참이었다. 오늘 알베르게에선 취사가 가능해 어제 상민과 현준이 하나씩 기부해 준 짜파게티와 너구리로 저녁을 해결할 생각이다. 마침 그제 사놓은 하몽도 있는데 얹어 먹으면 기가 막힐 것 같다. 이미 하몽이 짤테니 수프는 반씩만 넣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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