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7. ~Leon

대도시의 순례법*

by 아레카야자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변용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39.3km)

= 482.8km


계획한 루트대로 진행한다면 일정 중 가장 긴 거리를 걷는 날이었고, 로그로뇨에 이어 두 번째로 연박을 하는 곳이다. 그 이름도 유명한 스페인의 대도시 레온. 속도가 하루치 정도 차이 나는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도 부르고스를 모두 거쳐갔듯, 이곳도 웬만하면 빠트리지 않고 묵어가는 곳이다.




근 40km를 걷는 날이어서 해도 안 뜬 새벽 5시에 출발했다.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가 3시 체크인이라 대강 9시간 정도 걷고 한 시간 정도 점심 먹으면 맞게 도착할 것 같아 정한 시간이었다. 차도 옆으로 난 흙길을 걷는 경로였는데, 새벽이라 차도 없어 깔끔한 차도로 걸었다. 헤드랜턴을 최대 밝기로 켜고 걸어 차가 오더라도 날 볼 수 있었다. 날씨는 10도 초반대. 얇은 바람막이 하나로는 꽤 추웠으나 한 겹을 더 꺼내 입기는 귀찮아 그대로 걸었다. 순례길은 늘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걸으므로 해는 뒤에서 뜨고 달은 앞으로 진다. 오늘은 출발하면서부터 크고 밝은 보름달을 볼 수 있었다. 일출의 기미도 없는 이른 새벽,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이라 달이 아주 밝았다. 혹시나 올 차가 걱정되는 것만 아니라면 달빛으로도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주 고개를 돌려 달을 쳐다보게 됐다. 무늬는 화려하고 빛은 아름다웠다.



어플에 표시되는 거리는 38km 정도. 최종 목적지를 생각하고 걸으면 제풀에 지친다. 쉬어갈 곳만 생각하고 ‘이제 몇 키로 남았구나’하면 좀 낫다. 약 12km씩 세 번으로 끊어 생각하기로 했다. 마침 알맞은 위치마다 마을이 있었다. 걷는 동안 달은 점점 기울어 나뭇가지에 맺혔다가 기둥에 가렸다가 뿌리로 들어갔다. 그 사이 아직 모습은 채 드러내지도 않은 해가 분홍빛으로 발광했다. 은은하게 깔린 구름 탓에 사방이 순식간에 밝아오진 않았지만 헤드랜턴을 집어넣고 걸을 만은 해졌다.



첫 마을 렐리고스까지 12.7km를 쉼 없이 걸었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연 바가 한 군데도 없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채워 온 물만 마시고 다음 마을로 다시 걸었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이하 ‘만시야’)까진 6km 정도니 내 속도면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릴 거리다. 마을을 막 빠져나가는데 녹빛 아디다스 바람막이를 커플룩으로 입은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다. 뒤에서 보기에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보기 좋아 한 장 찍었다. 두 분은 느릿느릿 걷다가 무언가 보이면 멈춰서 구경하며 속닥속닥. 이미 사는 동안 수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봤을 나이일 텐데 여전히 서로에게 보여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가 보다. 부엔 까미노, 를 외치고 지나쳐 걸었다.



뒤에서 오던 이탈리아인 다미아노가 왜 차도로 걷냐고 물었다. 자갈이 깔린 모래길보다 여기가 편하다고 했더니 내 발목과 무릎에 모래길이 나을 거고 거긴 차가 와 위험하다고 했다.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어서 알겠다고 모래길로 들어갔다. 우씨, 작은 돌들을 밟을 때마다 물집 잡힌 데가 아프다. 다미아노도 전 마을에서 쉬어갈 생각으로 새벽길을 쉼 없이 걸었는데 실망한 모양이었다. 함께 다음 마을에 도착해 제법 근사한 호텔 겸 바에 들어갔다. 나는 “바텐더, 늘 시키던 걸로”를 외치는 심정으로 초코빵과 라떼 그리고 오렌지 쥬스를 시켰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밖이 더 좋아 나는 마당 자리에 앉고 다미아노는 안에 앉아 각자 시간을 가졌다. 그때 전 마을에서 본 노부부가 들어왔다. 이미 안면을 텄으니 또 한 번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아까 찍은 사진이 생각나 뒤따라 안으로 들어가 두 분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여쭸다. “아까 제가 두 분의 뒷모습을 찍었는데, 혹시 사진을 보내드려도 될까요?” 두 분은 사진을 보더니 아주 맑고 환하게 웃으며 좋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수기로 이름과 번호 등을 적은 명함을 들고 다니셨는데 한 장 받아 왓츠앱으로 사진을 보냈다. 그 밑에 “두 분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는 말을 보탰다.



이제 절반 정도를 온 셈이었다. 실로 멀긴 드럽게 멀다. 첫 마을을 건너뛰고 만시야에서 쉬었으므로 다음 쉼도 조금 미뤄 아르까우에하에서 멈출 예정이었다. 마땅한 장소가 있다면 점심을 먹어도 좋을 시간대였다. 아르까우에하에 도착했을 땐 이미 30km 정도를 걸은 상태였는데 시간은 열두 시도 안 됐다. 근데 이곳도 마땅히 뭘 먹을만한 데가 없었다. 30km를 걸으며 초코빵 하나 먹은 셈이라 배가 고팠지만 차라리 빨리 레온에 가서 맛있는 걸 먹자는 심정으로 물만 마시고 또 걸었다. 쉬는 동안 가족들에게 최근 일주일치 사진을 보냈다. 벌써 연락한 지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레온은 대도시이므로 레온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풍경이 많이 바뀐다. 차도는 넓어지고 포장된 인도가 나타나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즐비하다. 보이는 사람들도 순례자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아지고. 그때 전봇대 아래 한 짝의 크록스가 놓여있었다. 하리보 지비츠가 달린 회색 크록스였다. 순례자 것일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알베르게에 빠트리고 간 것도 아니고, 순례자 말곤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길도 아닌 도심 한가운데 놓여있는 크록스를 주워가는 건 지나친 오지랖인 것 같아 그냥 지나갔다. 그러부터 약 30분쯤 지났을까, 레온에 먼저 도착해 있던 진에게서 DM이 왔다. “지호햄 혹시 오시는 길에 크록스 못 보셨나요….?” 아 세상에. 아예 못 봤으면 모를까 분명히 봤고 주워갈까 말까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차라 더더욱 안타깝고 속상했다. 심지어 며칠 같이 걷고 같이 지냈던 진의 크록스를 못 알아봤다니. 레온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익숙한 실루엣 둘이 보여 다가갔더니 진과 수빈이었다. DM을 하며 걷다가 실제로 마주치니 대도시 레온이 손바닥만 하게 느껴졌다. (결국 크록스는 뒤에 오던 일면식 없는 한국분이 주워다 수소문 끝에 주인을 만나게 해 주셨다는 해피엔딩)



만난 김에 같이 점심을 먹었다. 수빈이 찾아놓은 현지인 맛집이 있어 들어갔는데 맛은 그냥 그랬다. 심지어 인기메뉴라는 ‘돼지 귀’를 시켰는데 돼지 비린내가 너무x100 심해 각자 강한 비위를 자랑하던 우리도 한입 먹고 땡. 식당을 나와 츄러스를 먹고 헤어졌다. 예약해 둔 스튜디오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널찍한 소파가 있는 거실과 분리된 침대방. 세탁기도 잘 돌아갔다. 빨래를 마치고 널어둔 뒤 동네를 한 바퀴 둘러봤다. 갓 오픈한 이탈리안 식당이 평이 아주 좋아 가봤는데 정말 맛있었다. 다른 메뉴들도 분명 맛있을 것 같은데 혼자라 두 개밖에 못 먹어 아쉬웠다. 방에 돌아와 소파에 반쯤 누워 시간을 축냈다. 시간을 축내는 건 연박의 묘미다. 잘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고 눈이 감길 때까지 빈둥거리기. 근 3년 간 이렇게 오래 책을 안 읽은 건 처음이라 슬슬 소설 금단 현상이 왔다. 그래서 모레 다시 걸을 때 들을만한 오디오북을 쭉 다운 받아봤다. 오디오북은 한 번도 안 들어봤는데 어떨지 궁금하다.





한 시쯤 잤는데도 8시니 눈이 떠졌다. 8시면 선방이다. 연박 중인 다른 순례자들한테 물어보니 5시 반 기상, 6시 등 걷는 날에 몸이 이미 맞춰져 있었다. 옷을 주워 입고 모자 눌러쓰고 츄로스를 사러 가다가 그저께 처음 인사한 기원 씨를 만났다. 츄로스 가게에서 초코렛을 하나 사서 돌아가는 길에 주니 고맙다며 함께 앉아 커피를 한 잔 하겠냐고 묻기에 잠시 앉았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었고 10년 다닌 군대를 며칠 전 순례길에서 전역한(!) 예비역 대위였다. 10년을 몸 담은 조직에서 떠난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잘 안 됐는데, 용서의 언덕을 올라 만감이 교차해 오열을 했다고. 신기했던 건 순례길 초반 동행했던 네덜란드, 덴마크(국가는 가물가물하다. 아닐 수도)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 각 국의 장교들이라는 것이었다! 남의 일이지만 기막힌 우연이 너무 신기했고 감탄스러웠다. 막역해진 그들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직전 마을에서 다 같이 만나 함께 산티아고로 걸어가기로 약속했단다. 정말 멋진 일이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낮잠을 자고 대성당을 들어가 볼 생각으로 다시 나왔다가 상민을 만났다. 만나자마자 저쪽에서 진과 수빈도 걸어왔다. 약속한 듯이 한 순간에 한 곳에서 모였는데 우리는 모두 별로 놀라거나 신기해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합류했다. 진, 수빈이 이미 성당에 갔다 왔다고 해 우리는 같이 레온의 유일한 가우디 건축물인 보티네스 저택에 다녀왔다. 바르셀로나에 즐비한 가우디 건축물들처럼 겉모습부터 “나 가우디임”하는 건물은 아니었지만 내부는 확실히 그의 존재감이 뿜뿜이었다. 네모 반듯하지 않은 바닥이며 기울어진 천장이며 갖가지 디테일들. 이 건물의 백미는 건물 모서리의 둥근 마무리였는데, 좁은 엘리베이터 같은 크기와 모양의 그 공간에선 세 방향의 외부를 모두 조망할 수 있어 개방감이 확 느껴졌다. 0층과 1층은 가우디와 관련된 정보들이 있었고 2, 3층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2층의 그림 전시도 좋았지만 특히나 좋았던 건 3층의 <Votes for Women>. 상설전이 아니라 마침 알맞은 날짜 덕에 볼 수 있었는데 스페인에서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1세대 페미니즘과 관련된 전시였다. 남펨인 나에게 당 전시는 참 뜻깊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나 잡지 표지 등 사료들과 함께 스페인 국회 내에서의 에피소드 등 볼거리가 많았다.



전시 관람 후엔 어제 갔던 이탈리안 식당을 진, 수빈, 상민과 함께 또 갔다. 어제 안 먹어본 메뉴들을 심지어 친구들을 끌고 가 다양하게 먹어볼 수 있어 아주 좋았다. 기대대로 다른 메뉴들도 모두 맛있었다. 셋도 모두 맛있게 먹어 뿌듯했다. 그나저나 먹고 나서 계산서를 갖다 주는 이 속도에는 언제쯤 적응이 될까.



식사 후에 젤라또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서 정처 없이 걷는데 프랑스 친구 맥스와 테레사가 가방을 메고 지나갔다. 며칠만이더라, 쫓아가 부르니 엄청 반가워했다. 이제 오는 거냐고 묻자 두 시간쯤 레온에서 놀다가 다음 마을로 더 간다고 했다. 대도시에서 묵기가 싫대서 왜그러넀더니 나는 서울에서 와 모르겠지만 자기들은 프랑스 촌에서 와서 대도시가 별로라나 뭐라나. 순례길 방향으로 함께 조금 걸으며 마저 수다를 떨고 셀카를 남긴 후 보내줬다. 어차피 내일 내가 갈 마을에서 다시 만날 듯. 방으로 돌아와 잠시 쉴까 하다가 그래도 레온 대성당은 한 번 가볼까 싶어 다녀왔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내부에서 보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정말 일품이었고, 성당 뒤편 중정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만들어낸 음영이 예술이었다. 구경 후 나와 또 츄로스 집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이틀 동안 세 번을 왔네. 위치도 메뉴도 다 맘에 든다. 내일은 다시 걸어야 하니 오늘 저녁엔 일찍 자야 한다. 아, 다시 짐 싸기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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