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름, 완주>*
*김금희 장편소설. 글에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33.3km)
= 516.1km
소설 금단현상이 일어나 오디오북을 다운 받았다. 귀로 책을 읽어본 적은 없어 어떨까 궁금했는데, 책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뭐가 더 좋다 나쁘다는 아니고, 그냥 정말 다른 매체 같은 느낌. 총 러닝타임이 4시간 52분이었는데, 출발해 레온을 벗어나서부터 듣기 시작해 중간중간 쉴 때를 빼고는 쭉 듣다가 거의 목적지에 도착해 이어폰을 뺐으니 하루종일의 여정을 함께 한 셈이다.
밤새 잠을 설쳤다. 새벽 세시쯤 왓츠앱으로 그룹통화가 걸려와 한차례 깼는데 모르는 번호들이어서 끄고 다시 잤다. 전화는 4시경, 4시 반 경, 5시경 등 끊임없이 걸려왔다. +34, +31, +504로 시작하는 국제 번호들이었는데 순서대로 스페인, 프랑스, 온두라스의 번호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받아 누구냐고 하니 아무 말이 없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만 들려와 끊었다. 정말 짜증 났다. 익숙지 않은 앱이라 어떻게 소리를 끄는지도 모르겠고 놔두다가 5시경 걸려온 전화를 끝으로 세 번호를 차단했다. 메시지로 내 이름을 부르며 맞냐고 물어온 걸로 봐 아예 뜬금없는 스팸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냐고 답해도 말도 없고 아무튼 편안해야 할 호텔에서의 밤잠을 망쳐놨다.
6시에 일어나 6시 반이 좀 덜 돼 길을 나섰다. 오늘의 길이는 약 32km. 어쨌든 30이 넘으니 꽤 긴 거리임에도 이제 이 정도 거리에 큰 마음을 먹지는 않아도 됐다. 일출 후에 출발했으므로 편하게 걸었다. 발목 상태도 괜찮고, 물집도 이제 대부분 굳은살이 됐다. 다만 굳은살 옆쪽으로 또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출발하면서부터 첫 오디오북을 얼른 듣고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도시 안엔 차도 좀 다니고 지도도 자주 봐야 해서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레온을 벗어나 흙길이 나오자마자 김금희 작가의 신작 <첫 여름, 완주>를 재생했다. <첫 여름, 완주>는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의 야심 찬 프로젝트 소설이다. 요즘 하도 유튜브며 예능 프로에 등장해 홍보를 해대는 통에 한 번 들어는 봐야지 싶었는데, 마침 순례길이고 마침 남는 게 시간이고 마침 귀는 내내 열어둘 수 있으므로 제격이었다.
레온에서부터 시작하는 순례자가 많다고 들어 오늘부터는 순례길에 사람이 바글바글 하겠구나 예상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마주치는 순례자가 적었다. 7.2km 지점 마을에 문을 연 바가 하나 있었는데 위치며 분위기가 썩 맘에 들지 않아 11km 경에 있는 다음 마을까지 갔더니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좀 더 가 13km 지점에 가서야 처음 의자에 앉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걸었더니 13km를 가는데 2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 또르띠야와 초코도넛으로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다시 오디오북을 재생시켰다.
<첫 여름, 완주>의 주인공 열매는 여러 개인적 사정으로 ‘완주’라는 곳에 잠시 둥지를 튼다. 워낙 감각적인 묘사와 낭독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더해져 완주는 눈에 보일 듯 훤했고 그곳의 풀 냄새, 물 냄새, 밥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숲 속에서 손열매가 어저귀를 만나는 장면에서 풍기는 다소 초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단순하고 심심한 순례길을 환상 속의 공간으로 둔갑시켰다. 매미 소리 진동하는 땀 냄새 가득한 시골 여름이었다면 오늘의 순례를 다소 힘겹게 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제목이나 작중의 시간적 배경에 반해 소설 속에서 끈적하고 무더운 여름을 드러내는 묘사나 대사는 별로 없어서 예상보다 시원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다음 휴식은 25km 지점의 산 마르틴 델 까미노. 20km쯤에도 마을이 있지만, 쉬고 나서 12키로가 남아있는 것과 7키로가 남아있는 건 마음가짐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좀 더 걸어 멈췄다. 산 마르틴 델 까미노 마을 초입에 위치한 바는 호텔에 달려있던 것인 만큼 매우 번듯하고 깔끔했다. 그곳에선 제로 콜라와 초코빵을 먹었다. 상민과 현준이 뭔가 ‘쎄하다’고 했던 한국 여자분이 지나가셨다. 나는 최대한 남의 평판보다는 내가 직접 겪어본 바를 토대로 판단하고 싶어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고개 숙여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걸 씹길래 이건 뭐지 싶었다. 국적을 막론하고 순례길에서 인사가 씹힌 첫 순간이었다.
상민이 바에 뒤늦게 도착한 현준을 좀 기다려주는 동안 나는 먼저 출발해 남은 거리 7km도 혼자 오디오북을 들으며 자유로이 걸을 수 있었다. 소설의 후반부 완주에 산불이 나게 되고 열매는 사랑하는 어저귀를 잃게 된다. 죽은 건지 미리 불을 피해 대피한 건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말 그대로 ‘사라진’ 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열매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다. 다시 한번 꿈에서 만난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잃었다”고 하소연하는 열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 이, 사랑은 잃는 게 아니여. 내가 내 마음속에 지어 놓은 걸 어떻게 잃어?
열매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치곤 너무 담담해 보이고, 할아버지의 말투도 (최양락 님이 연기하셔서 그런지) 그다지 심각한 게 아닌데도 오히려 내가 그 순간 눈물이 차올라 또 한 번 선글라스 안으로 시야가 뿌예졌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는 몇 마디 말씀을 덧붙였는데, 몰라 그건 잘 듣지도 못했고 그냥 뿌앵 울어버렸다. 간 밤에 마침 그 애가 나오는 꿈을 꾼 참이었다. 그 애가 나오는 꿈은 여태껏 숱하게 꿔왔지만 여전히 우리가 함께인 꿈은 매우 드물었어서 특별했다. 진정된 후 뒤를 슥 돌아봤는데 아직 상민도 현준도 나를 따라잡지 못해 다행이었다.
도착한 마을은 크지 않지만 매우 잘 정돈된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묵기로 한 알베르게도 군데군데 감성적인 가구와 소품이 놓여있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수전을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봐도 샤워기에서 너무 뜨거운 물이 나와 샤워하는 데 애를 먹었다. 찬 물만 나오는 샤워기는 봤어도 뜨거운 물만 나오는 샤워기라니, 아주 생소한 역경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을 끓여 먹으려는 마녀인 줄 알았다. 이 마을에는 순례길 중 가장 긴 다리가 있는데, 지금 나는 그 다리 바로 앞의 식당에서 풍경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파스타와 오징어 튀김을 시켜 먹고 초코푸딩까지 먹고 있어 배불러 죽겠다. 맥스와 테레사가 오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해 그전까지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