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0. ~SantaCatalinaDeSomoza

순례와 초콜릿 공장*

by 아레카야자

*팀 버튼 <찰리와 초콜릿 공장> 변용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27.2km)

= 543.3km


아스토르가는 아주 크진 않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유명한 도시다. 북 스페인에 많지 않은 가우디 건축물이 있는 마을이고, 대성당도 그 명성이 자자하고, 그리고 초콜릿. 그 유래와 역사는 잘 모르겠지만 아스토르가는 초콜릿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초코 폭포에 늘 빠지고 싶어 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대로 초코 쳐돌이로 자랐고, 아스토르가에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스토르가까지는 17km. 아스토르가에 있는 가우디 주교궁이나 초콜릿 박물관(!) 등이 모두 10시 경은 돼야 문을 연다. 출발해 세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가지고 여섯 시 반 경 출발했다. 아스토르가에 도착해 아점을 먹을 생각으로 중간 마을에서는 바에 들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약 두 시간 여를 가다 보니 발걸음을 멈추게 한 기부식 쉼터가 근사하게 차려져 있었다. 멋진 그림이 그려진 외벽은 물론이고 원형 테이블 가득 먹거리가 놓여있으며 직접 오렌지를 짜 주스를 만들 수 있는 기계까지 있었다. 가장 앞서 걷던 나는 주저 없이 들어가 오렌지부터 짜댔다. 뒤이어 상민과 현준이 오길래 사장처럼 자연스럽게 “수모 데 나랑하(오렌지 주스)?” 하니 둘이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주스를 짠 뒤 5유로를 기부하고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예쁜 보더콜리(로 추정) 한 마리가 바람 빠진 공을 들고 나타나 내 발 앞에 내려놓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헥헥거렸다. 그래, 놀자!



공을 차면 민첩하게 쫓아가 다시 공을 물고 왔다. 요리조리 드리블하다 공을 차도 금세 따라붙어 능숙하게 공을 가져왔다. 상민, 현준과 삼각형을 이뤄 강아지를 가운데 놓고 공을 돌려도 몇 차례 못 가 공을 낚아챘다. 그러다 공을 좀 더 세게 차서 생각보다 멀리 가버리면, 딱 자기 나와바리(?)까지만 가서는 뒤돌아 나를 쳐다봤다. 그래 거기까진 안 나가시겠다? 나보고 다시 가져오라 이거지? 그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새끼 고양이 세 마리도 정말 정말 귀여웠다. 부모 냥이들은 어디 갔는지 새끼들만 이리저리 쏘다니며 순례자들의 가방 위에도 올라갔다가 자기들 물통에 가서 물도 마시며 이목을 끌었다. 그 사이 뒤에 오던 다른 순례자들도 나타나 이 귀여운 생명체들의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자전거 순례자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다가 보더콜리에게 공을 차주곤 했다. 다시 출발하려 가방을 매도 강아지가 지칠 줄 모르고 공을 물어오길래 정 그러면 우리랑 같이 순례길 걷자, 하고 공을 몰고 걸어가자 쭐래쭐래 쫓아오다가 주인아저씨한테 혼났다. 어쩌면 내가 혼난 걸지도 모르겠다.



한 시간여를 걷자 아스토르가가 나타났다. 마을 초입부터 1903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초콜릿 공장이 나타났다. 현재는 공장은 가동을 안 하고 있었고 (일요일이라 안 한 건지도 모르겠다) 빵, 초콜릿들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만 운영 중이었다. 우리는 각자 기호에 따라 여러 달다구리들과 커피를 시켜 자리를 잡았다. 다 맛있었다. 어차피 이 동네에 초콜릿 가게가 많을 테니 여기선 당장 먹을 것만 사기로 하고 간단히 먹은 뒤 좀 더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길을 따라 쭉 초콜릿 가게들이었다. 어느 곳에 들어가 밀크 초콜릿을 사고, 다른 데에서 화이트 초콜릿을, 또 한 곳에선 주황색 초콜릿을 샀다. 제주도였으면 무조건 한라봉 초콜릿일 텐데 아직 안 먹어봐서 무슨 맛인진 모르겠다.



그리고 좀 더 걷자 가우디가 지었다는 주교궁이 나왔다. 레온에서 보티네스 저택을 다녀오기도 했고, 이곳의 건물은 그렇게까지 당기지 않아 들어가 보진 않았다. 그때쯤 마을에서 케이틀린을 만났는데 그녀는 오늘 여기에서 묵기로 결심했단다. 같은 마을서 출발했으니 오늘 그녀는 17km 지점에서 순례를 마치고 쉬는 셈이다. 나도 오늘의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는 중이었는데, 아스토르가 마을은 예뻤고 여기서 묵으면 더 많은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텐데도 나는 아스토르가에서 묵을 충동적 결심을 하지 못했다. 뭔가 더 가야 할 것 같고,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까지 며칠 남지 않은 여정에서 오늘 더 거리를 빼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묵어도 일정에 큰 지장은 없었다. 설령 하루 더 늘어나면 또 어떤가. 완주 후의 포르투갈 여행을 하루 줄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20대의 나처럼 좀 더 자유분방해지고자 이곳에 왔으면서도, 더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있었다. 상민, 현준이 없었다면 나는 아스토르가에 묵었을까? 어쩌면 그랬을 지도, 여전히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 핑곌 대려는 건 아니다. ‘만약에’ 게임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므로 의미가 없다.



케이틀린에게 나는 좀 더 가겠다고 하고 마을 끄트머리에 가자 대성당이 나왔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기념품 샵이 있었는데, 그 규모나 물건 퀄리티에 실망했다. 그 때문인지 안에도 들어가 볼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대로 나와 좀 더 걷자 작고 아담하지만 매우 현대적으로 멋들어진 성당이 나왔다. 열린 문 틈으로 내부의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여 슥 둘러볼 심산으로 들어갔더니 안에선 실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주일인 만큼 시간대별로 미사가 많았을 것이다.



순례길에 오기 전 대강 세워둔 계획대로라면 오늘 나는 37km를 갔어야 하는 날이고 그 말은 아스토르가에서부터만 20km를 더 가야 한다는 뜻이어서 일찌감치 계획을 수정했다. 무계획이 계획이었다. 막연히 ‘그래도 30km 정돈 가야 하지 않아’ 싶었는데 아스토르가 이후 날씨가 무더워졌다. 바람막이를 벗고 반팔의 소매를 걷어붙여 걷는데도 뜨거웠다. 상민과 현준은 26km 지점 산타 까탈리나 데 세모사에서 멈춘다고 했다. 다음 마을은 약 5km 후. 아직 시간도 얼마 안 됐고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무척 작은 마을이라 알베르게가 단 하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알아보니 그곳의 알베르게는 이미 풀. 그다음 마을은 그로부터도 6키로쯤 뒤였다. 나도 그냥 이곳에 묵어 가기로 했다. 이럴 거면 그냥 아스토르가에 묵을걸 그랬다는, 아무 의미 없는 후회만 하나 늘리며 짐을 풀었다.



체크인하는 알베르게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하시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곳이었다. 우리가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 알아듣고 영어로만 말하는데도 할머니는 지지 않고 접수부터 시설 안내, 내부 규칙 등 모든 걸 유창한 스페인어로만 설명했다. 그녀의 단호박 태도에 다소 당황했지만 우린 금세 적응하고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진행하며 키득거렸다. 할머니는 언어 사용에만 냉정할 뿐 츤데레 같은 면이 있었다. 일행에 따라 세심하게 방을 배정하고 손빨래를 위한 세제도 나눠줬다.



매일 그렇듯 씻고 빨래하고 나와 늦은 점심을 먹으러 동네 식당에 들어와 각자 피자와 파에야 등을 시켜 바깥 자리에 앉았다. 맥스와 테레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인사했다. 상민과 현준에게 맥스와 테레사를 소개하고 우리 자리에 함께 앉으라고 했다. 그들은 오늘 총 37km를 걸어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 간다고 했으니 아직도 11km 이상이 남았는데 벌써 시간은 세시였다. 나 같으면 불안해서 발걸음을 바삐 옮겼을 텐데 역시나 ‘This is freedom좌’ 맥스는 아무렇지 않게 앉아 함께 밥을 먹었고 네시가 한참 지나서야 다시 출발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려고 그러냐, 숙소 예약은 했냐는 코리안들의 성화에도 맥스와 테레사는 “몰라. 언제나 해결책은 있어. 우린 7시, 8시에 도착한 적도 있어” 했다. 역시 프리덤좌. 상민은 “그래, 우리도 저런 걸 배워야 돼” 했다. 벌써 전생처럼 느껴지는 17일 전 팜플로나에서 맥스와 대화하며 내가 느꼈던 걸 오늘의 상민도 느꼈으리라.



맥스와 테레사는 갈 길이 멀어 정신이 없었던 건지 자기들 먹은 것도 계산하지 않고 떠나 내가 나가며 계산했다. DM으로 생색을 냈더니 화들짝 놀라며 너무 미안하다고 페이팔로 보내줄까, 하길래 “노 프라블럼. 언제 네가 빠에야 사줄 기회가 있겠지!” 했다. 내일 나는 오늘 덜 걸은 몫까지 총 36km를 걸을 생각이다. 문제는 내일이 전체 순례길 중 가장 고도가 높은 ‘철의 십자가’를 지나는 코스라는 건데, 모르겠다 걷다 보면 언제가 됐든 도착하겠지. 맥스와 테레사는 오늘 묵을 곳에서 26km 정도를 걸어 같은 곳으로 올 거니 내일 저녁을 얻어먹든지 해야겠다. 와 철의 십자가를 지나 36km. 걸을 수 있을까? 뭘 걸을 수 있을까야, 걸어야지.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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