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4. ~Triacastela

인사와 인사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 Molinaseca -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iero - Triacastela(22.2km)

= 663.3km


정권이 바뀌자마자 사내 보직자들의 인사발령이 있었다. 새 부장들의 임기가 시작됐다. 사원 인사는 아직이지만 이미 전임자들의 기간을 초과해도 한참 초과한 나는 국회에서 나가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새 부장의 “이지호 씨, 순례길은 어떠신가?”로 시작하는 카톡은 인사 발령에 대한 통보였다. 그래 맞아, 나 회사원이었지. 파리와 순례길을 포함해 약 4주 간 잠시 잊고 있었던 자각. 다사다난했던, 일 년 반이 넘는 국회 출입을 마칠 시간이었다.




계획을 수정해 오늘은 약 20km 정도만 걸을 생각이어서 알람도 맞추지 않고 늦잠을 잤다. 늦잠이래 봐야 6시 반도 되기 전 일어난 거지만 순례자치고 늦잠은 늦잠이었다. 일어나 보니 내 주위 침대는 모두 비어 있었다. 느릿느릿 침낭을 압축팩에 쑤셔 넣고 엉금엉금 화장실에 가 양치와 세수를 했다. 엉기적거리며 준비를 마쳐도 7시였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의 체크인 시간은 정오, 20km에 4시간이면 충분하니 시간이 남았다. 쉬엄쉬엄 가지 뭐 하고 길을 나섰다.



아니 근데 시작하자마자 또 오르막이었다. 어제 그렇게 올라왔는데 이제 내려갈 차례 아니었나? 물론 내리막도 힘들지만 오르막을 예상치 못했어서 그런지 초장부터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하늘에서 촉촉하게 미스트를 뿌려줘 덥진 않았다. 오늘 경로는 이상하게도 ‘까미노 닌자’ 앱 상에 쓰여있는 마을 목록과 실제 경로가 조금 달라 어디서 쉬어야 할지 미리 계획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되는대로 걸었다. 오르고 오르고 오르고. 빠도르넬로 마을을 살짝 지나니 바가 하나 있어 앉았다. 주인아저씨가 마을 인싸인지 동네 아저씨들과 껄껄 거리느라 주문 처리 속도가 산 꼭대기 데이터 속도보다 느렸다. 브라우니와 또르띠아, 오렌지주스와 라뗴를 시켰는데 오렌지주스는 평균 이상으로 맛있었고 또르띠야는 순례길에서 먹은 것 중 가장 형편없었다. 어제 만났던 루카스가 올라와 함께 앉았다. 그의 아빠는 오늘도 택시를 타고 먼저 가셨다고.



이때쯤 부장한테서 카톡이 왔다. 위에 적은 대로 인사 관련 사항이었다. 6월 23일부로 나는 다시 사회부였다. 2023년 11월부터 2025년 6월 말까지의 국회 출입을 마치게 됐다. 얼마 안 있어 같은 시기 국회에 출입하며 야당을 맡았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간 고생 많았다는 인사였다. 선배는 나보다 출입이 더 오래됐으므로 아마 이번 인사에 선배도 국회를 나올 터였다. 선배는 사실 지난 파리 올림픽 때부터 나가고 싶어 했었는데 계엄과 탄핵, 대선까지 함께하게 됐다. 그래, 다 차치하고 돌아보건대 전에도 후에도 없을 값진 경험이었다.



출입을 시작할 무렵 국힘은 인요한 혁신위원장을 필두로 한 쇄신 작전에 돌입한 상황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결말을 맞았다. 전라도 출신의 덩치 큰 그 아저씨는 결국 비례대표 앞 순번으로 뱃지를 달았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4월 총선이 있었고 당시 국힘의 사령탑은 ‘인기 만점’이던 한동훈 비대위원장. 전국팔도로 출장을 다니며 가족보다 친구보다 한 위원장을 자주 보던 시기였다. 화제의 인물을 앞세운 국힘의 총선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참패. 스스로 공천을 포기했던 그는 여소야대의 정치판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전당대회에서 재등장해 압도적 득표율의 당 대표가 됐더랬다. 그 후로 잠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2024년 말. 전 국민의 밤잠을 설치게 한 그날 이후로 나의 첫 출입처는 전에 없던 폭풍 같은 시간을 보냈다. 파란 뱃지 빨간 뱃지들이야 원래 그게 직업이라 쳐도, 전 국민들까지 극단적으로 갈려 서로를 혐오하고 힐난하고 공격했다. 0.7%p 차이로 당선됐던 엉덩이 탐정은 끝까지 국민을 갈라 제 편을 선동하며 진실을 가렸다. 시기 상 작년 말쯤 있을 줄 알았던 인사 이동은 계엄으로 한 차례, 탄핵으로 두 차례, 대선으로 세 차례 미뤄졌고 결국 오늘 카톡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난했던 내 국회 출입이 끝났다.



산길을 조금 더 걸으니 오늘의 중간지점쯤 되는 폰프리아가 나왔다. 거리상으론 중간 지점이지만 그전까지 오르막이었다면 여기부턴 고도가 일정하거나 살짝 내려가 실제로는 거의 다 온 셈이었다. 좀 더 가다 또 다른 바가 나왔는데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어차피 시간도 남겠다 이온음료나 한 캔 사 마시려고 멈췄다. 바깥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주문을 하러 가게에 들어가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밖에 앉아 있던 순례자들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와 알았다. 나도 내 가방을 챙겨 안으로 옮겨놨다. 이온음료 한 캔은 그새 커피와 치즈케익으로 변해 내 테이블에 놓였다. 하늘은 급하게 비를 쏟아낸 만큼 급하게 시치미를 떼고 해를 띄웠다. 나오는 길에 이온음료 한 캔을 사서 손에 들고 산보를 걷는 느낌으로 내리막을 성큼성큼 내려왔다.



마을에 다다라 남은 거리를 마저 채우는데 담벼락 아래 수풀에서 자그맣게 “미야오”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멈춰 내려다보니 미치게 귀여운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아니 근처에 한 마리까지 총 세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진과 비디오를 찍다가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서 가방을 풀어놓고 담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구경했다. 지나가는 모든 순례자들을 붙잡아 “와서 쟤네 좀 봐봐!” 했다. 몇몇은 나처럼 가방을 풀어놓고 호들갑을 떨었고 몇몇은 “어머 너무 귀엽다” 하고는 가던 길을 마저 갔다. 내 고양이도 아니면서 웃기게도 ‘아니 어떻게 쟤네를 보고 그냥 지나갈 수가 있지’하는 생각을 했다. 검은 무늬의 꼬물이가 가장 말이 많았다. “미야오 미야오” 뭐라고 자꾸 말을 걸었다. 아기 냥이들이 올라오기엔 높은 담장이었어서 혹시 올려달라는 건가 싶어 담벼락에 배를 대고 팔을 쭉 뻗으니 돌 틈으로 쏙 숨어 큰 눈망울만 꺼내고는 나를 호기심 어리게 쳐다봤다. 올려달라는 건 아닌가 보구나 싶으면서도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꼬물이 세 마리는 고개를 휙 휙 돌리며 시선을 옮겼다. 맘 같아선 내 물통만 한 녀석들을 가방 옆 주머니에 쏙 쏙 넣어 데려가고 싶었다. 그렇게 한 3-40분을 앉아 있으니 며칠간 못 봤던 진, 수빈, 상민, 현준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도 당연히 꼬물이들을 보여줬는데 엷은 감탄을 내뱉고는 가버렸다. 흥.



씻고 빨래하고 근처 식당에 가보니 멕시칸 레스토랑이었다. 부리또와 레몬 맥주를 시켰는데, 둘 다 맛있었다. 심지어 냉동실에 넣어둔 얼음 낀 잔에 맥주를 따라줘 감동 또 감동.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 덕에 유튜브로 지락실 클립을 보며 부리또를 먹고 농땡이를 부리고 있으니 진, 수빈이 왔다. 각자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며칠 안 남은 일정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일은 ‘사모스 루트’와 ‘산실 루트’로 나뉜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험난한 데다 무려 7km나 길지만, 스페인을 포함한 서구권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 있는 사모스 마을을 지나게 되는 만큼 고민이 된다. 심지어 목적지인 사리아에는 유명한 문어요리 집이 있는데 오후 3시까지밖에 영업을 안 하는 ‘대박 식당’의 전형을 자랑해 고민이 깊어졌다. ‘To be or Not to be’ 보다도 지금은 사모스 수도원이냐 문어요릿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제 내게 본인이 직접 만든 묵주 팔찌를 선물해 준 사제 존과 그의 친구 사제 제이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너희는 내일 어느 루트로 갈 거야?” 했더니 제이가 “당연히 짧은 길. 우리가 수도원에서 얼마나 오래 지냈는지 알아!” 해서 나는 빵 터지며 “아 맞네 맞아. 내가 그 생각을 못했다 미안” 하고 답했다.



알베르게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데 로비 공간 또 하나의 뽀시래기가 삐약 삐약 말을 걸었다. 오늘 하루 뽀시래기들의 축복이 끝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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