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 7km의 가치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 Molinaseca -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iero - Triacastela - (Samos) - Sarria(27.8km)
= 691.1km
결국 마음이 기운대로 사모스를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포장된 도로 19km와 산길 26km 중 후자를 택한 것이다. 어떤 순례자가 사리아로 가는 짧고 편한 길을 놔두고 사모스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면 이유는 무조건 사모스 수도원 때문이다. 6세기에 설립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베네딕토회 수도원. 그렇다고 내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거나 특별히 수도원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도대체 왜? ‘그래도 산티아고 ‘순례길’인데, 수도원은 한 번 가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고, ‘빠르고 편하게 가는 게 중요한 여정은 아니지 않나? 그럴 거면 그냥 여행을 했으면 될 일이고’라는 생각도 있었다. 더 깊은 마음속에는 ‘다른 순례자들이 다 산실 루트로 간다니까 나는 괜히 사모스 길로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일종의 반골기질 또는 인정욕구 같은 거. 그 대가는 진짜 빡셌다. 그래도 보람 있는 선택이었을까?
사모스 수도원은 정해진 시간의 투어로만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사모스까진 고작 10km. 가장 빠른 투어가 오전 10시라 시간이 애매했다. 눈이 떠지는 대로 일어나 출발하니 약 여섯 시 반 정도였다. 고도가 낮아져 그런지, 갈리시아 지방이어서 그런지 이제 출발하면서부터 반팔을 입어도 전혀 춥지 않았다. 사모스에 도착한 시간은 8시 반. 수도원 뒤편의 바 몇 개가 열려 있었다. 늘 그렇듯 초코빵과 오렌지주스, 라떼를 먹었다. 시간이 남아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있으니 한 무리의 자전거 순례자들이 도착했는데, 어제저녁 식사를 할 때 나와 종업원 사이 언어의 장벽을 뚫어줬던 콜롬비아 가족이었다. 도보와 자전거 간의 속력 차가 있으니 다시는 보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늦게들 출발한 모양이었다. 무척 반가웠다. 특히 그 집 딸내미가 예뻐서 더 그랬다. 앉아서 꽤 오래 시간을 보내길래 “너희도 수도원 둘러볼 거야?” 하니 오늘 60km를 가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자전거로 60km면 길어봐야 3시간 컷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그렇구나. 나는 수도원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어” 했다. 온 가족이 함께 자전거를 타고 순례를 하니 참 보기 좋고 부러웠다. 이제 진짜로 또 볼 일은 없겠지.
9시 55분쯤 수도원 문으로 향했다. 초입부터 기념품 샵이었다. 투어 후에 제대로 둘러봐야지. 사실 투어보다도 기념품 샵에 관심이 많았다. 역시 제사보다는 젯밥이다. 여남은 명의 관람객이 가이드를 졸졸 쫓아다니며 수도원 곳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전부 스페인어로 진행돼 나는 군데군데마다 설명을 끝낸 가이드한테 붙어 “영어로 요약해 줄 수 있어?” 했다. 수도원은 1900년대 중반 큰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인상적이었던 건 복도를 따라 길게 장식된 벽화였는데, 복원 과정에서 후원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성인도 아닌데 수도원 벽에 자신들의 얼굴이 박힌다니, 그들 입장에선 충분히 후원을 할 만한 동기였겠다. 본 수도원은 여전히 8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며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제 수도원이기도 하다. 혹시 수도사들을 직접 볼 수도 있나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투어 막판 수도원의 전례 공간을 둘러볼 수 있었다.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등의 대성당들에서 봤던 전례 공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진한 감동이 있는 공간이었다. 부러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봐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지금 글을 쓰며 들기도 한다. 전례 공간 구석에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성모 마리아 앞의 양초에 불을 하나 붙였다. 성호를 긋고 짧은 기도를 했다.
투어를 마치고 다시 기념품 샵에 갔다. 많은 성물과 기념품, 장신구, 꿀과 초코렛이 있었다. 내가 먹을 초코렛과 외할머니를 드릴 묵주, 가방에 달 배지를 하나씩 샀다. 외할머니 묵주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 살 계획이었는데, 오늘 이 사모스는 순례길 중 더 고된 길을 내가 선택하고 온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하나 샀다. 그리고 얼핏 이 성물들이 아무 지원 없이 수도원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다고 봤던 것 같은데 하나 사주면 좋긴 좋잖아. 초코렛은 사리아까지 들고 가 먹으려고 했는데 날씨를 보아하니 또 초코물이 될 것 같아 수도원을 나오자마자 깠다. 뭐 특별한 맛은 아니었고 그냥 일반 밀크 초코렛이었는데 괜히 그냥 영성체 모시는 느낌으로다가 성스럽게(?) 먹어 치웠다.
사모스에서 사리아까지 남은 거리는 약 15km. 사모스 이후로도 길은 험했다. 업다운, 업다운, 업다운. 그 와중에 길을 잘못 들어 길도 안 난 수풀을 헤치고 갔다. 돌아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도를 보니 어찌저찌 다시 순례길과 이어질 것 같아 나아갔는데, 반팔에 민소매를 입고 드러난 팔다리를 가시 달린 줄기들이 할퀴어 대는 통에 무척 쓰라렸다. (잘못된 길이니 당연히) 앞뒤로 아무도 없어 쌍욕을 뱉으며 나아갔다. 산실 루트와 합쳐지는 지점에 자판기가 있었다. 세상에나 이게 오아시스구나. 바로 제로 콜라를 뽑아 벌컥벌컥 목구멍을 찢었다. 방금 막 수도원을 나와 이게 할 말인가 싶긴 하지만 이게 바로 성수다 성수. 그때 시간이 약 한시쯤 됐다.
사리아까지 남은 거리는 약 5.5km. 이대로라면 3시에 문을 닫는다는 배짱 좋은 문어요릿집에 갈 수 있었다. 게다가 길은 평지. 내달려 골인했다. 식당은 순례길 중 처음으로 무려 웨이팅이 있었다. 한 명이라 금방 자리가 나긴 했지만 스페인 아저씨들 틈에 합석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목이 탔지만 레몬 맥주를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물도 안 마시고 참았다. 레몬 맥주 2/3를 들이켜니 추성훈 아조씨 같은 표정이 나왔다. 단일 메뉴라 문어는 영동설렁탕의 설렁탕보다도 빨리 나왔다. 제공되는 바게트를 올리브유에 흠뻑 적셔 문어를 올려 먹었다. 물론 맛은 있었는데 식당 전체가 정신이 없어 제대로 즐긴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그래 나도 여기 와봤다” 느낌으로다가 얼른 먹고 자리를 비워줬다. 짧은 영업시간인데 테이블 많이 돌리셔야지.
알베르게에 도착해 씻고 빨래를 하고 나왔다. 구글 리뷰 왈 ‘한국적인 카페’라는 곳에 갔다. “디저트 메뉴 있어요?” 하니 없단다. 츄로스 집이래서 왔는데. “츄로스 없어요?” 하니 있단다. 얘네한테 츄로스는 디저트가 아니라 그럼 뭘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 달랬더니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하는데 못 알아들어 휴대폰을 내밀었다. 틀린 비밀번호. 다시 한번 천천히 말해달라고 해 내가 입력했는데도 틀린 비밀번호. 이게 맞는 건지 한 번 확인해 달랬는데 맞다며 연결이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겠단다. 아이패드를 휴대폰 핫스팟에 연결해 브런치를 들어와 글을 시작하는데 츄로스가 나왔다. 딱 보기에도 드럽게 성의 없는 츄로스였다. 맛은 더 처참했다. 한 입 먹고 다 남겼다. 커피를 얼음에 붓고 원샷한 뒤 나왔다. 바깥은 33도, 휴대폰 배터리는 18%. 숙소로 돌아가 주방 테이블에서 써야겠다 싶어 근처 마트에서 물과 제로 콜라를 사 돌아왔더니 좁아터진 테이블은 이미 만석이었다. 땀은 줄줄 나지, 갈 덴 없지, 여러모로 짜증이 뻗쳤다. 숙소 바깥 벽에 있던 야외용 테이블과 의자들 번쩍 들어 그늘 쪽으로 옮겨놓고 앉았다. 가쁜 숨을 쉬며 콜라를 마셨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리아에서부터 100km만 걸어도 생장드피에드포르에서부터 800여 키로를 걸은 순례자들과 같은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사실상 완주증이라는 건 크게 의미가 없는 셈이기도 하다. 그게 무언가를 인증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걸 인증받는다고 대단한 명예가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기념품 정도랄까.) 그 탓에 사리아에서부터 순례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개인 순례자들은 물론 한국에서 오는 수많은 단체들까지. 다수의 유튜브에서 사리아 이후의 순례길에 대한 푸념과 한탄을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리아 전체에 사람이 넘친다. 날은 푹푹 찌고 사람은 많고 가게에서 한국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사리아 진짜 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