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6. ~Gonzar

돌아가야 할 곳. 돌아가야 할 이유.

by 아레카야자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 Molinaseca -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iero - Triacastela - (Samos) - Sarria - Gonzar(31.6km)

= 722.7km


오늘 걷는 중 100km가 깨졌다. 표지석에 표시된 남은 거리는 이제 두 자릿수. 보일 때마다 숫자가 팍팍 주는 게 느껴진다. 끝이 보인다. 순례길 유튜버들이나 순례를 다녀온 지인들이나 순례길서 만난 순례자들 모두 아쉽다고 하던데, 시원섭섭한 마음에서 시원과 섭섭 중 하나만 고르라면 희한하게도 난 시원함이 앞선다. 순례길은 때로 힘들지만 분명 즐거운 여정이고, 하루빨리 서울에 돌아가고 싶은 건 절대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다.오늘 걷는 중 100km가 깨졌다. 표지석에 표시된 남은 거리는 이제 두 자릿수. 보일 때마다 숫자가 팍팍 주는 게 느껴진다. 끝이 보인다. 순례길 유튜버들이나 순례를 다녀온 지인들이나 순례길서 만난 순례자들 모두 아쉽다고 하던데, 시원섭섭한 마음에서 시원과 섭섭 중 하나만 고르라면 희한하게도 난 시원함이 앞선다. 순례길은 때로 힘들지만 분명 즐거운 여정이고, 하루빨리 서울에 돌아가고 싶은 건 절대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제부터 24일까지 스페인 전역에서 산 후안 축제가 열린다. 사리아도 작지 않은 동네였던 만큼 저녁부터 새벽까지 꽤나 떠들썩한 축제가 있었나 본데, 잔뜩 더위를 먹은 나는 가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빨리 잠에 든 것도 아니어서, 밤 열 시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앞으로 남은 일정들의 숙소를 모조리 예약해 버렸다. 남은 나흘 치 순례길과 포르투갈의 일정. 진짜 끝이 오는구나, 생각하며. 대로변에 있는 우리 알베르게의 순례자들은 새벽 내내 바깥이 시끄러워 다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5시에 맞춰놨던 알람을 한차례 미뤄 5시 반쯤 일어났다. 오늘은 30km가 조금 넘는 거리라 특별히 쉽거나 어려운 거리는 아니었는데, 어제 같은 무더위면 어떡하나 싶어 걱정이 됐다.



6시에 출발하는데도 헤드랜턴이 없으면 걷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그래도 날은 선선해 이참에 거리를 빼자 하고 쉼 없이 걸었다. 오늘은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아주 작은 동네들을 여러 개 지나는 경로였는데, 이른 시간 연 바는 없고 8km 지점쯤이었나 음료와 스낵을 파는 자판기가 있어 잠시 멈췄다. 앉을자리도 없어 선 채로 해치우고 또 바삐 길을 나섰다. 조금 가다 보니 진, 수빈, 상민, 현준이 바에 앉아 쉬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섯이 함께 걸었다. 매번 쓰는 것도 지겹지만 매번 새삼스레 느끼기 때문에 또 한 번 적자면 진과 수빈은 진짜 연구 대상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나와 상민 현준은 부지런히 뒤를 밟으며 도대체 저 속도는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를 토론했다.



머잖아 100km 표지석이 나왔다. 지나가던 서양인이 우리 다섯의 단체사진을 찍어줬고 각각이 인증샷을 남겼다. 표지석 근처에 100km를 기념하는 스탬프가 있다고 했는데 아무도 찾지 못했다. 순례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순례 완주를 한다는 건 목적 달성에 가까워진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휴가의 끝이 도래한다는, 서울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온다. 나는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왜 돌아가야 할까, 뭘 위해 돌아가는 걸까 하는 따위의 생각들. 여러 가지 면에서 답답하고 절망적인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왜? 가족과 떨어져 지내도 상관없었다. 여러 친구들 중 꼭 보고 싶은 녀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국 밖으로 들고나갈 수 없는 대단한 부를 한국에 쌓아놓은 것도 물론 아니고 직장이 꼭 그곳이어야 할 필요가 있나 하면 그것도 글쎄. 그 와중에 주현은 떠올랐다. 이미 3년을 떨어져 지냈는데 이제와 또는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스스로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지만 내가 서울에 있어야 우리가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생기지 않나,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가 될까 하는 생각. 그러나 주현은 늘 “내 행복은 서울에 있지 않아”라고 해왔었다. 뭐야 그럼 그것도 땡. 결국 휴가 기간이 끝나고 내가 서울로 돌아가는 건 그저 돌아가지 않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장 안정적으로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더 큰 행복을 좇을 용기가 없어서.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멋없는 어른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십 대 중반에 쥐어든 명함을 꽉 쥐고 고작 삼십 대 초반에 무겁디 무거워진 엉덩이 때문에.



조금 더 가다 보니 기념품과 음료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실제 왁스를 녹여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그걸 2유로나 받았다. 우리 다섯 명은 손을 모으고 스탬프 비용 내기를 했는데 현준이 걸려 10유로를 냈다. 나와 상민은 몬스터를 하나씩 사 마셨다. 영화 <코코>에 나오는 예쁜 해골이 그려져 있어 하나 사봤는데 맛도 있었다. 망고가 들었으면서도 상큼한 맛이었는데 한국에도 있나? 어제 사모스에서 사 왔던 초코렛이 내 앞가방에서 나왔다. 이걸 언제 여기 넣어놨지 싶었는데, 녹았던 초코렛이 밤 사이 추워진 날씨 덕에 다시 굳은 모양이었다. 다 같이 나눠먹으며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해서 사온 초코렛인지 아냐”며 생색을 냈다.



전진, 또 전진. 쉼터에서부터 포르토마린까지는 각자 제 속도에 맞춰 걸었다. 포르토마린은 정말 예쁜 마을이었다. 마뉴 강으로 둘러싸인 언덕 마을이었는데, 강물이 잔잔한 호수 같고 윤슬이 아주 예뻤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호텔이나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었다. 비싼 동네 같아 보였다. 언덕을 올라 성당 근처 바에서 커피와 간식을 먹었다. 성당에 들어갔더니 스탬프는 2시부터 찍을 수 있다고 안내돼서 있어서 황당했다. 스탬프가 왜 특정 시간에만…? 포르토마린은 큰 마을이어서 이곳에서 볼 일을 보고 떠나기로 했다. 나는 atm기에서 현금을 뽑고 기념품 가게에서 배지를 샀다. 나머지 넷은 저녁거리 장을 봤다.



남은 거리는 약 8km. 슬슬 안개가 개고 해가 떠 날이 더워졌다. 우리는 다시금 선크림을 덧바르고 길을 나섰다. 내가 풍경 사진을 찍는다고 잠시 멈춰 벌어진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다. 진과 수빈은 길 끝에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멀어졌다. 포르토마린에서 둘이 잔뜩 장을 보길래 내가 농담 삼아 “이제 가방이 더 무거워져 너희 속도가 덜 날 테니 다행이다”라고 했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나는 어제 사립 알베르게에 예약 전화를 해뒀고 나머지는 예약이 없어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오늘 알베르게는 침실까지도 모든 벽면이 다 돌벽이라 특이하고 매력 있었다. 동네가 작디작아 별도의 레스토랑은 없고 이 알베르게에 달린 식당에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하게 생겼는데 와이파이가 잘 안 되네. 아오, 처음으로 낮잠이나 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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