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잡기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 Molinaseca -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iero - Triacastela - (Samos) - Sarria - Gonzar - Melide(32.9km)
= 755.6km
평범한 하루였다. 30여 키로를 걷고, 걷다 만난 진, 수빈, 상민, 현준과 낄낄거리며 중간중간 오렌지 주스와 커피와 빵을 먹고, 도착해 씻고 빨래를 하고 일기를 쓰는. 이 일상은 어느덧 내 ‘평범한’ 하루가 되었다. 이 일상은 이제 오늘을 빼고 고작 이틀이 남았다.
온 건물이 돌벽인 덕분인지 알베르게가 시원했다. 새벽엔 심지어 좀 춥기까지 해서 숙소에 준비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기도 했다. 어제 오후엔 너무 더웠어서 오늘은 빨리 도착하고자 기상 시간을 더 당겼다. 4시 45분에 알람을 맞추고 연기 없이 일어났다. 2층 침대에 사람이 없이 1층을 쓰는 날엔 준비가 정말 수월하다.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5시 15분쯤 진, 수빈, 상민, 현준네 알베르게 앞을 지나가는데 창 너머로 진과 현준이 보였다. 헤드랜턴을 껐다 켰다 하며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사방에 불빛이라고는 내 헤드랜턴뿐이었다. 앞뒤로 순례객도 없고 초승달빛이 길에까지 닿기엔 구름이 꽤나 두터웠다. 길을 가다 내 헤드랜턴 불빛에 반사된 눈동자 두 개가 번뜩였다. 몇 걸음 더 가보니 “닝겐이 왜 이 시간에?!” 하며 더 놀란 고양이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위가 밝아오며 구름 사이사이로 핑크빛 물감이 칠해졌다. 잔뜩 낀 구름 탓에 일출을 보기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시간이 더 지나자 밝고 둥근 해가 떠올랐다. 어제저녁도 거른 탓에 어느 마을이든 바가 열려 있으면 들어가 초코빵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0km가 넘도록 열려있는 바가 없었다. 그래봐야 시간은 7시 반도 안 됐었으니 그럴 만하다. 그때쯤 며칠 전 처음 마주친 승규 씨를 또 만났다. 매번 걸으며 인사만 해와서 서로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사이였다. “저희 벌써 여러 번 마주쳤는데 성함도 모르고 있네요. 저는 이지호라고 합니다.” 하자 이름을 일러주었다. 늘 혼자 느릿느릿 걷는 승규 씨는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 인상 좋은 청년이다. 처음으로 그를 앞지르지 않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경쾌한 걸음의 진과 수빈이 나타났다. 12km 지점 마을에서 함께 쉬기로 했다.
레스테도 마을 끄트머리에 3성 호텔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 달린 바 야외석에 앉아 각자 커피와 토스트를 먹었다.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준도 나타났다. Pope라는 이름의 아주 귀여운 개가 우리를 반기며 와서 치댔다. 커다란 제 몸집이 아직도 앙증맞은 강아지인 줄 아는지 굳이 테이블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 우리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내 발 위에 제 앞발을 턱 하고 얹고 엎드렸다. 이거 플러팅 맞지? 수빈이 “손. 손.“ 하길래 내가 스페인어로 손은 ‘mano’라고 알려줬다. “마노. 마노”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가 현준이 휴대폰으로 mano를 쳐서 음성을 재생하자 pope가 손을 척 내밀었다! 우리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랐다.
5km 정도를 더 가자 팔라스 데 레이라는 제법 규모 있는 동네가 나왔다. 동네 성당에 예쁜 스탬프가 있다고 해서 다 같이 찍으러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일요일엔 시간 상관없이 늘 열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어 지나쳤다. 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냥 가려는데 상민과 승규 씨가 한 식료품 가게에서 쉬고 있었다. 그곳은 아이스크림과 하몽과 샌드위치, 통조림 등을 파는 가게였는데 사장님이 시식해 보라며 건넨 아이스크림이 너무 맛있어서 모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었고 나는 하몽 한 판을 사 왔다. 가게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니 사장이 나와서 먹어보라며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해 줬다. 상민이 어찌 들고 갈까 하길래 뭘 들고 가냐고 여기서 해치우고 가자고 해서 다섯 명이 돌아가며 길빵을 때렸다.
남은 거리는 약 15km. 다시 한번 ‘매드 코리안’들의 분노의 질주가 시작됐다. 눈앞의 보이는 순례자들을 모두 제치며 산길을 ‘뛰어’ 다녔다. 그냥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내리막을 주로 뛰어 내려갔다. 천천히 내려가면 발과 다리가 더 힘든 것 같고 뛰어서 단숨에 내빼면 그나마 좀 나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 물론 뛰고 나면 다리 여기저기가 쑤시긴 했다. 7키로쯤 가자 카사노바라는 마을이 나왔다. 8키로가 남아 한 번에 다 가긴 힘들 것 같아 쉬기로 했다. 커피와 이온음료 등을 시켜 마셨다. 초코케익과 커피와 얼음을 시켰는데 얼음에 따로 돈을 받는 가게는 처음 봤다. 초코케익도 비주얼에 비해 맛이 별로였는데 다 먹긴 먹었다. 다 같이 먹으라고 서비스로 준 올리브가 맛있어서 봐줬다. 물론 안 봐준들 따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앉아서 쉬는 사이 가게에 가득 찼던 순례자들이 모두 가고 없었다. 우리도 떠날 준비를 하며 상민이 “100초 다 셌다. 순례잡기 가볼까~“ 하는 말에 빵 터졌다. 우리가 하는 짓에 딱 맞는 이름이어서 나는 오늘 내 일기 제목으로 쓰겠노라 전했다.
남은 8km도 진, 수빈을 쫓아가며 순례자들을 제쳤다. 한 서양인 아줌마가 우리를 보고 “speed up! speed up!” 하며 먼저 보내줬는데, 진심 어린 응원인지 바보 같은 순례자들을 비웃은 건지는 모르겠다. 덕분에 목적지 멜리데까지 순식간이었다. 오늘은 다섯 모두 알베르게 예약을 미리 해둔 덕에 침대를 선점할 필요 없이 마을 중심부에 있는 유명한 문어요릿집에 먼저 들렀다. 아주 넓은 규모인데도 웨이팅을 세울 만큼 대박집이었다. 몇 명인지 모를 많은 직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문어를 삶는 거대한 솥 근처에 앉아 직원들이 통문어를 건져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삶은 문어, 구운 문어, 조개찜 등과 맥주, 콜라를 시켜 배불리 먹었다. 게눈 감추듯 먹고 구운 문어를 추가 주문해 먹었다. 누가 사장일까, 하루에 문어 몇 마리를 잡을까 등등 답 모를 이야기들을 하며 오늘 하루 순례의 끝을 즐겼다. 식당을 나와 알베르게로 오는 길에 츄로스 집이 있어 들렀다. 그저께 갔던 사리아의 츄로스 집에서 망쳤던 기분을 회복할 만큼 친절하고 맛있는 가게였다. 얼마 나오지도 않아서, 문어와 츄로스로 기분이 좋아진 내가 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오늘의 순례는 끝났고 모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날에는 20km도 안 걸을 예정이니 30km대의 일상적인 순례는 내일로 마지막이다. 지난 마을들이 벌써 한참 오래전 일 같다. 피레네 산맥? 그런 것도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