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완주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 Zubiri - Pamplona - Ciraqui - Los Arcos - Logroño - Najera - Catildelgado - SanJuanDeOrtega - Burgos - Hontanas - Boadilla del Camino - Carrion de los Condes - Moratinos - El Burgo Ranero - Leon - Hospital de Orbigo - Santa Catalina de Somoza - Molinaseca - Villafranca del Bierzo - O Cebriero - Triacastela - (Samos) - Sarria - Gonzar - Melide - Santiago de Compostela(54.17km)
= 809.77km
오늘 하루 우리는 54km를 넘게 걸었다.
묵었던 알베르게에는 조식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기왕 조식 값까지 낸 거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4시 50분경 일어나 짐을 모두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전날 밤에 호스트가 준비해 둔 빵, 과일들과 직접 갈아 마실 수 있는 오렌지 주스, 직접 내려 먹는 커피 등이 준비돼 있었다. 냉장고에서 요플레를 꺼내 블루베리를 넣어 먹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오렌지 두 개를 갈아 주스를 만들어 먹었다. 잘게 잘라놓은 케익도 있었는데 서서 한두 개 집어 먹다 보니 맛이 있어 꽤 많이 먹었다. 그리고 출발한 시간이 5시 반쯤. 오늘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19km를 남겨둔 마을인 오 페드로우소까지 약 33km를 가는 날이다(당초 계획은 그랬다. 뒤에서 설명할 예정). 짧지 않은 거리이므로 날이 더워지기 전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부터 가열차게 걸었다. 박명이 생기며 사위가 밝아지자 낮고 짙게 깔린 안개가 평원을 덮고 있었다. 키가 큰 나무들보다도 낮은 안개라 새로운 분위기였다.
11km쯤 가 리바디소라는 마을을 지나는데 바에 앉아있는 현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안에 진, 수빈, 상민도 있었다. 3키로를 더 가면 큰 마을인 아르주아가 나와서 잠시 고민했으나 한 번도 쉬지 않고 온 탓에 바의 유혹을 참기 힘들었다. 아침은 먹고 나와 빵 생각은 안 들었고, 아이스크림과 라떼를 주문했다. 황치즈 색의 귀여운 고양이가 있었는데 사람 손을 잘 탔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엉덩이를 두드리라며 들이대길래 통통통 쳐주니 좋다고 꼬리를 치켜세웠다. 시간을 보낸 뒤 넷과 함께 출발해 금세 아르주아에 도착했다. 화장실이 급해 보이는 아무 바에나 가서 이온음료를 한 캔 시키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진과 수빈을 필두로 한 넷은 이미 시야 밖으로 사라져 있었다. 좀 더 들고 가다 마시려고 이온음료를 손에 들고 걷다가 떨어트렸는데 박살이 났다. 아니 탄산음료도 아닌데 캔이 이리 쉽게 터지나. 2.5유로짜리 화장실에 다녀온 셈이 됐다. 캔을 구겨 좀 더 들고 가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른 얘기지만 순례길을 걷다 보면 도시도 아닌데 군데군데 커다란 쓰레기통이 꽤 많아 편했다. 누가 이걸 다 관리하지.
아르주아를 지나니 거의 오늘의 반을 온 셈이었다. 확실히 사리아 이후로는 사람이 많아진 데다 스페인 방학기간이라 단체로 티를 맞춰 입고 뭉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어지는 길은 쉴 새 없는 오르막, 내리막. 순례자들 사이사이를 뚫고 빠르게 걷다 보니 오르막을 힘들어하는 현준의 뒷모습이 가까워졌고 저어 멀리 거의 트레일 러닝을 하고 있는 진, 수빈, 상민이 보였다. 현준을 따라잡으니 자기도 느린 속도가 아닌데 다들 어찌 된 일이냐고 황당해했다. 현준과 발맞춰 조금 걷다가 길가에 귀여운 고양이가 보여 다가갔는데 전혀 피하지 않길래 또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 손을 반기는 고양이가 어찌 이리 많은지 이번엔 아예 발라당 배를 내고 누웠다. 가슴께를 쓰다듬으니 앞발로 내 팔을 안았다. 친구들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사르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지금 길냥이가 내 손길에 배를 깠는데 뭣이 중허냐‘.
22km 지점 아 칼사다에 넷이 모여있었다. 다 같이 빵과 음료를 시켜 앉았다. 무슨 대화를 하다 이야기가 그렇게 흘렀는지는 지금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웃으며 “그럴 거면 오늘 산티아고까지 가죠”라고 말을 꺼냈던 거 같고, 어느새 보니 나를 뺀 넷이 휴대폰으로 산티아고 숙소를 찾아보고 있었다. 나만 오 페드로우소에 숙소를 예약해 뒀고 나머지는 안 해놨었다. 오늘은 6월 23일. 스페인에선 꽤나 중요한 날인 산 후안 축일이라 전역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큰 마을이면 축제가 더 크고 화려할 테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면 더 즐기기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52.7km를 간다고? 물론 말을 꺼낸 이를 포함해 숙소를 알아보고 있는 모두가 아직까진 농담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나는 “그래 간다면 응원은 할게” 하며 한 발 뺐다. 그렇게 일단은 10km도 넘게 남은 오 페드로우소까지 가보고 생각하자고 했다.
바를 나와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19km를 남겨 놓고 하루를 넘긴다고?’ 게다가 어떤 순례자도 50키로가 넘게 걸었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으므로 이건 해내기만 하면 자랑거리였고 정말 큰 추억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순례 여정 중의 평범한 하루였다면 결코 생각도 하지 않을 거리고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짓이지만 이건 그 끝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었다. 힘은 들지만 다섯 중 누구 하나 어디가 특별히 아프지도 않았다. 해볼 만했다. 옆에 가던 상민한테 넌지시 말했다. “기왕 얘기 나온 거, 가자“ 상민은 웃더니 뒤돌아보며 진, 수빈, 현준에게 ”앞에서 산티아고 진행하라는 명이 떨어졌습니다!“하고 외쳤다. 나는 당장 오 페드로우소의 숙소를 취소하고 전액을 날리겠다고 했더니 다들 진정하라며 일단 오 페드로우소까지 서둘러보자고 했다. 그러다 숲에 사람들이 모여있어 가보니 왁스를 녹여 도장을 찍어주는 가판대가 있었다. 갈 길이 멀고 마음은 급했지만 모두 저건 탐이 났다. 다섯 명 모두 쪼르르 줄을 서서 가위바위보를 했다. 1인당 2유로, 5명이면 10유로를 건 한 판. 진이 걸렸다. 버너로 왁스를 녹여 한 땀 한 땀 도장을 찍고 색칠까지 해주는 탓에 속도가 매우 더뎠다. 거기서만 20분 이상 쓴 것 같다. 다섯 모두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도장을 받고 다시 출발했다. 그야말로 분노의 질주였다. 진과 수빈은 기존에도 빨랐지만 오늘은 나와 상민도 달렸다. 누가 앞장서든 1km에 8분대 페이스였다. 내리막을 달려 내려갈 땐 최대 5분대가 찍히기도 했다. 수빈이 웃으며 자신이 러닝을 할 때도 이 페이스는 안 나온다고 했다.
오 페드로우소에 있는 멕시칸 식당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신발, 양말과 종아리는 흙투성이였다. 뒤에서 떨어져 오던 현준이 말하길 우리 넷이 앞에서 가고 있으면 만화처럼 뒤로 흙먼지가 일었다고 한다. 아마 그날 우리와 같은 길에 있었던 순례자들 모두가 우릴 기억할 것 같다. 10km를 말 그대로 ‘달려’ 온 탓에 모두 진이 빠졌지만 다들 표정이 좋았다. 이때쯤엔 이미 모두가 오늘 완주를 한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주문을 넣고 음식을 기다리며 다 같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5인용 숙소를 알아봤다. 현준이 알아본 곳이 가장 적당해 예약했고 나는 오 페드로우소에 예약해 놨던 내 숙소를 취소해 18유로를 날렸다. 멕시칸은 언제나 그렇듯 참 맛있지만 먹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포크를 안 줬는데 아무도 포크를 달라고 하지도 않고 손으로 게걸스레 집어 먹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범벅으로 양손에 소스를 묻혀가며 먹는 우리 꼴을 스스로 보며 다 같이 웃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