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에 남아 있는 공중전화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추억

by 애나 강



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제는 잘 쓰지도 않는 공중전화 앞에서다.

유리문은 바래 있고, 수화기는 색이 벗겨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앞에 서면 마음이 먼저 과거로 돌아간다.




공중전화가 일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삐삐가 전부였고, 연락은 늘 기다림과 세트로 따라왔다.

그 시절의 나는 유난히 내성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지금의 나라면 웃으며 말을 건넸을 텐데,
그땐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마음속으로만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표현은 못 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계속 키워가던 시절.

그 친구의 집 전화번호를
다른 친구를 통해 어렵게 알게 됐다.
종이에 적힌 숫자 몇 개가
그날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동전 몇 개를 꼭 쥐고 공중전화 앞에 섰다.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번호를 누르다 말고 다시 멈췄다.

연결음이 울리기만 해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괜히 놀라 전화를 끊어버린 적도 있었다.
‘여보세요’라는 한마디를 들을 용기가
아직 내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동전을 넣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공중전화 안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처럼 서성였다.

사실은 아무 말도 못 하면서.

통화가 연결되던 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에
손에 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통화를 끊고 난 뒤,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는 것만 또렷하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왜 그렇게 떨었는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좋아했고,
서툴게 용기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기억은
부끄러움보다 애틋함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그 친구가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살고 있구나.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덧붙였다.
나도 잘 살고 있다고.
그때보다 조금은 더 씩씩해졌다고.




이제 길거리에서 공중전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서면
동전을 쥔 채 망설이던 내가 여전히 있다.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서
전화를 걸던 나의 한 시절이.

사라진 건 전화기일 뿐,
추억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공중전화가 남아 있는 길모퉁이를 만나면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잊고 지냈던 나를
조용히 다시 불러와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