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랜드에서 버스로 4시간이 걸려 도착한 도시는 파이히아(Paihia)다. 뉴질랜드 북섬의 주요 관광지로, 뉴질랜드 최초의 수도인 러셀, 와이탕이 조약이 맺어진 와이탕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
와이탕이 조약은 마오리족 족장들과 영국 사이이 맺어진 조약으로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계기가 된 조약이라고 한다. 인구가 많고 큰 도시는 아니지만 이 부근은 길지 않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매우 역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오클랜드를 출발해 소가 유유자적하게 풀을 뜯는 언덕을 여러 개 지나고 고생대 숲처럼 고사리가 크게 자라난 산을 몇 개 넘으면 파이히아에 도착한다. 뉴질랜드는 화산에서 뿜어져나온 마그마가 덮혀 만들어진 땅이라 토질이 좋은 건지 나무 한 그루의 키가 매우 크다. 가지가 하도 높이 뻗어서 나무 끝을 보려면 고개를 한없이 뒤로 젖혀야 한다. 하긴 뉴질랜드의 자랑, 5000년을 살았다는 숲의 제왕 카오리 나무도 여기 뉴질랜드에 있다(와이포우 카오리 숲은 일정상 가보진 못했지만 북부 여행 시 꼭 방문해보라는 B&B 숙소 주인 아저씨의 강력한 추천이 있는 장소였음).
우리나라도 산이 많아서 여행할 때 굽이굽이 산을 돌아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길이 많은데, 뉴질랜드 북섬을 다녀보니 그런 점에서는 여기도 만만치 않다. 도시 거점을 연결하는 버스나 국내선 비행기가 발달한 데 비해 기차가 많지 않은 이유도 산이 워낙 험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베이오브아일랜드의 중심인 파이히아까지 가는 길이 쉽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시 간 이동 수단으로 선택한 인터시티 버스의 차 유리창이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서 깨지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꾸벅꾸벅 조는 사이 뒷자리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잠이 깼는데, 달리는 차 바퀴에 돌이 튀었는지 사이드 유리창이 산산 조각나며 떨어진 거다. 지금이야 웃음이 나지만 그 유리창에 기대 있었다면 큰 일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버스를 내리면 멋진 해안선이 사람들을 반긴다. 뉴질랜드는 남반구라서 우리나라가 여름이면 겨울이다. 북섬 최대의 관광지라지만 가을의 길목에 접어든 파이히아는 비교적 한산한 모습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중심가의 인포메이션 센터 부근에서 여행지를 예약하거나 바다 건너 러셀까지 가는 배 표를 구입할 수 있다. 조약 기념관이 있는 트리티 하우스가 위치한 와이탕이까지도 걸어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데, 걷는 내내 해안가를 따라 가므로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큰 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파이히아는 정말 작은 마을 정도의 크기인데, 해가 지는 저녁 6시 이후로는 중심가의 상점들도 슈퍼마켓과 일부 바를 제외하곤 문 여는 곳이 없고 바닷가 근처는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하다. 우리나라 저녁 6시면 퇴근도 하기 전 시간인데, 아주 색다른 이 풍경에 잠시 당황할라 치면 잠잠한 동네에 파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낮의 햇빛, 자동차 소리, 이야기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파이히아 해안가의 파도 소리다. 파이히아는 밤새 철썩이는 바닷가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는 곳이다. 뭔가 잊고 있던 감수성이 깨어나는 곳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