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쓰 애주가의 신호

by 기미닉

나는 애주가다.

“술자리에 기쁨이 빠지는 건 괜찮지만, 기쁜 자리에 술이 빠지는 건 섭섭해서 안 된다”는 둥 온갖 상황을 음주의 이유로 연결하는 재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우리나라 통념상 절대 애주가 타이틀을 가질 수 없다.

“술 좋아해요”를 “술 많이 마실 수 있어요”로 알아듣고, 주량 측정 수단을 소주로만 정하는 게 우리네 전통이잖나.

그런데, 난 소주를 못 마신다. 대학교 3학년 때, 취기를 객기로 이기려 들다가 술병에 된통 걸려 119 앰뷸런스타고 병원에 다녀온 날부터 그렇게 됐다. 애주 자격 미달이란 얘기다. 사실 저런 흑역사가 없었다고 쳐도 상황은 같았을 거다.

난 유전적으로 ‘알쓰’니까. 마뜩잖지만 부정할 수 없는 별명이다.


돌아보면 술과 관련해서 생긴 별명은 알쓰 외에도 더러 있었다. 군복무 시절 불렸던 것들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부대 내 사병의 음주는 당연히 금지 사항이지만, 예외적으로 술잔치가 열리는 날이 있었다. 큰 훈련의 마지막 날이 그런 날이었다. 수련회가 캠프파이어 뒤 과자 파티로 끝나듯, 훈련의 대미는 늘 야간 행군 후 막걸리와 삼겹살로 마무리됐다. 부대에 도착하면 전 부대원은 군장을 생활관에 대충 내팽개치고 식당으로 달려가 잔을 채운 뒤 소리를 질렀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으아아아아앜!”

이제 와 생각해보면 헛소리였다. 우리 부대는 매복이 주 임무라 전쟁이 나도 뛰쳐나갈 일이 없었고, 누구도 구태여 윗동네 인민군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다들 그저 하루빨리 몸 성히 집에 돌아가길 바랐다. 그랬으면서 허세들은...흥.

아무튼, 요란한 건배가 거나한 술판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잔에 든 건 막걸리와 물을 1대 1 비율로 섞은, 술도 물도 아닌 애매한 음료였던 탓이다. 그마저도 10명당 작은 파란색 플라스틱 양동이 하나만 주어졌다.

병사들을 취하지 않게 하려던 간부들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할쏘냐. 나만큼은 그 와중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어졌다. 그 상태의 나를 샤워장에서 본 이들은 내게 이런 별명을 붙여줬다.

홍(紅)익인간, 홍인종, 뽀(꼬꼬마 동산의 작고 새빨간 전파뚱땡이).

1.JPG 뽀가 가장 맘에 든 별명이었다. 귀엽거든. 귀여운 게 최고야. 제일 쎄.

별명 겸 숙명이지 싶다. 이젠 저렇게 부르는 사람이 주변에 없지만, 술 좋아하는 알쓰라 몇 잔 들이켜면 여전히 금세 뽀 또는 무언가가 되고 마니까.


인싸로 살고 싶지만 그럴 재주가 없어 ‘아싸’로 살고 있는데, 이게 의외로 적성에 맞아 혼자서도 식당에서 반주를 즐긴다. 하도 자주 그러다 보니 남과의 자리를 싫어하냐는 오해도 받는다. 정말이지,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느 날 뜬금없이 날아든 “밥 먹자”라는 메시지는 늘 반가워서, 냉큼 대답부터 한다. “콜”

날짜? 장소? 메뉴? 주종? 그런 건 차차 정하면 그만이고, 제일 버거워하는 일이 해결됐다는 사실에 마냥 신이 난다.

네댓 명을 빼곤 다른 사람에게 “만나서 한잔하자”라고 먼저 말 붙이는 게 너무 어렵다.

대개 만나야만 할 타당한 이유가 없어서, 만나자고 하면 전 애인에게 받은 “자니?”처럼 보일까봐 기껏 적어놓고도 ‘보내기’ 버튼 클릭을 백번쯤은 포기한다. 그러니 느닷없이 약속을 잡아주는 이들에게 언제나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다.

시켰으면 넙죽 절도 했을걸?


000003570028.jpg 사람들. Pentax Musuper


문자 한 통 보내는데도 한참을 망설이는지라 만나서도 곧바로 넉살을 떨진 못한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나 궁금했던 것들을 꺼내 보지만 그조차도 보통 10분 안에 고갈된다. 그렇게 생긴 대화의 공백을 이토록 효과적으로 채우는 소리가 또 있을까.

“짠!”

그때부터 시작.

어쩌고저쩌고...“짠!” 이러쿵저러쿵...“짠!” 얼씨구절씨구...“아, 잠깐 화장실 좀”

이쯤 되면 어느새 긴장이 풀어져 있고, 눈도 살짝 풀어져 있다.

나만 그런 건지 저쪽도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술기운으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다 보면 더는 짠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이제 일어날까?”

그러면, 끝.

(경우에 따라 2차, 3차, 4차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잠든다.


눈을 뜨니 목이 탄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잠들기 전, 책상 위 텀블러에 가득 채워둔 물을 단숨에 비운다.

곧이어 속이 탄다.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했지’

뒤죽박죽 섞인 기억에 실수가 끼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간밤의 “안녕”과 “어어 들어가, 또 봐!” 사이에 오간 얘기를 시간순으로 나열하니, 대화라고 착각했던 횡설수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딴 말을 왜 한 거지’
‘아니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밀려드는 쪽팔림에 얼굴을 감싼 채 방바닥을 뒹굴다가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기억을 정돈하니 듬성듬성 빈 부분이 도드라지고 만 거다.

‘아아...망했다...’


1576226335.jpg 신호등 빨간불. Pentax Musuper


붉어진 몸은 자기 신호였을까.

더 지껄이다간 아침에 몸부림을 치고 말 거라는, 그러니 이제 말을 멈추라는.

일시적으로 뇌 기능이 고장 났다며 온몸에 빨간불이 켜진 걸 수도 있겠다.

그뿐인가, 혹시 보지 못할 걸 대비해 볼도 따뜻하게 덥혀주지 않았나.

뛰어난 알림 시스템을 갖춘 신체인 것 같다. 주종을 차치하고 단 한 잔에도 반응한다는 게 문제라 그렇지...


웬일인지 이번 달엔 매주 약속이 있다.

저번 주엔 동태탕에 막걸리를(그러고 보니 왜 안 찍었지. 알이 기똥찼는데) 곁들였고,

이번 주엔 빠에야에 베르데호(그리고 다른 무언가들, 혹은 전부)를 홀짝일 예정이며,

다음 주엔 아마 굉장히 무난한 무언가에 맥주를 마실 것 같다.

조만간 양고기 수육집도 꼭 가봐야지.


다가올 그 모든 날 내 몸은 또 금세 신호를 보낼 거다.

하지만 별수 없잖나. 주문을 하고, 맛을 보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그 모든 걸 하기에 10분은 너무 짧다. 아니, 가능하다고 쳐도 3분 요리만 먹다 죽는 삶은 너무 서글프잖아?

그래서 몸의 신호만큼은 적당히 무시할 작정이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겠지.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뭐 하고 지냈어? 나? 난 뭐 그냥... 숨 쉬어”
“음...”

공기가 멋쩍어진다. 지금이다.

자, 그럼...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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