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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토 Feb 02. 2020

아버지, 엄마 꿈에 한번 다녀가세요

십 년까지 되돌릴 수 있는 약? 그럼 니 아버지도 만날 수 있겠구나.

   

엄마는 음식을 만들 때 표정이 밝아졌다. 아마도 가족들에게 해 먹이는 즐거운 감정이 어딘가에 저장된 것 같았다. 하지만 껐다는 가스 불 위에서 찌개가 졸아드는 걸 확인했을 때, 엄마가 치매란 걸 다시 상기했다. 


엄마는 색칠하기, 퍼즐 맞추기, 그림책 읽기 등을 숙제처럼 하면서 이런 걸 뭐하러 하냐’고 시큰둥했다. 엄마는 책이나 퍼즐을 대할 때보다 마른빨래를 개거나 도라지 껍질을 벗기는 실제적인 일에 더 적극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고혈압, 혈행 약, 비타민제를 비롯해 잠들기 직전까지 복용하는 약 말고도 눈에 띄는 다른 식구의 감기약을 드시기도 했다. 건강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걸까. 엄마에게 동네 어르신들이 모이는 경로당이나 복지관 얘기를 하면,‘늙은이들이 모이면 남의 흉만 보는데, 그런데는 안 간다.’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고 재밌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다.


치매센터를 찾아 직원의 안내로 상담을 받았다. 담당자는 현재 내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조언했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들의 교육 모임을 소개받고 ‘헤아림(치매가족모임)’에서 8회기 교육 신청서를 썼다. 프로그램으로 모인 분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남편이나 시어머니, 또 나처럼 친정엄마의 치매로 보호자가 되어 각자의 사례를 서로 나누었다.     


우리는 치매환자의 의사소통이나 식사, 옷 입히기, 대소변 등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하면 안 되는지를 배웠다. 다양한 원인의 뇌질환 혹은 뇌손상으로 인지기능이 점점 떨어지는 가족들의 이야기. 앞에서는 답답하고 돌아서면 서러운 그 안타까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다음 해, 쉬흔 초반까지 혼자 지내던 언니가 소개할 사람이 있다고 가족들에게 선포했다. 집을 떠나 억척스럽게 사업을 일궈낸 언니는 늘 집안의 여장부 역할을 감당했다. 엄마는 언니가 소개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땅이 꺼질 듯 실망했다. 딸이 홀로 나이 들어가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사별과 이혼을 경험한 남자를 만난 게 영 못 마땅했다. 한동안 엄마는 그게 너무나 억울해서 잠을 설쳤다.


“내일은 쑥 캐러 가야겠어. 둑방에 가면 천지가 쑥일 텐데, 집에만 들어앉아 있으니 너무 갑갑해.”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는 노래 후렴구처럼 쑥을 캔다고 말했다.  

“엄마, 이 겨울에 쑥 캘 데가 어딨어. 여긴 시골 둑방이 아니에요. 그리고 혼자 나가면 도로에 차가 다녀서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요?     



예전 같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엄마 머릿속에 있는 장면을 지우고 내가 하는 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느라 열을 내며 ‘엄마는 그것도 모르냐’ 핀잔하고 부정적인 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심호흡으로 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고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한다. 치매센터‘헤아림’(치매가족모임)으로 공부했던 걸 응용하는 거다.      


“엄마, 집에만 있으니까 정말 심심하지? 내일 쑥 개러 나랑 같이 나가요.”     



엄마는 벌써 작은 칼을 신문지에 싸놓고 쑥 캘 준비를 다 해 놨다. 엄마의 머릿속엔 나른한 봄 햇살이 퍼지는 들녘에서 쑥을 캐는 즐거운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막상 아침이 되면 엄마가 쑥 개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걸 알았다.      

잠들기 직전, 엄마는 치매 진행을 늦춰준다는 쥐눈이콩알만 한 희고 동그란 알약 한 개씩을 드신다. 엄마가 잠들기 전에 꼴깍, 삼키면 십 년까지도 되돌릴 수 있는 약이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엄마 표정이 진지해졌다.      


“십 년까지? 그럼 니 아버지도 만날 수 있겠구나. 나, 니 아버지 보구 싶어. 야속하게 꿈에서도 한 번 찾아오질 않으시네.”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버지는 10년 전, 알츠하이머 치매로 돌아가셨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평생 고향을 그리며 ‘망향가’로 시름을 달래던 아버지.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혈육인 남동생마저 행방불명된 엄마. 두 분의 만남은 당신들의 외로움이 서로를 인연으로 알아보게 했던 건 아니었을까. 오늘 밤 엄마 꿈속에 아버지가 한 번 다녀가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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