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자신의 주업(主業)을 밝히면, 대개 주변으로부터 기대치를 사기 마련이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돌발적인 질문이 들어왔더라도, 상대방의 기대치에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 답을 줘야 한다. 그게 평소 내공이자 실력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직장을 병행하는 경제학 박사(과정)'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경제학 박사'로 보고 이에 부합하는 기대치를 가질 수 있다. '직장을 병행하니까 좀 수준이 높지 않아도 이해해주겠지', '아직 졸업 안 했으니까 어려운 질문은 안 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현실 도피이자 아마추어 같은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선배 이코노미스트 분과 편한 대화를 하다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 "내년(2022년)쯤 세계 경제 성장률은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신흥국 경제에 영향을 주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무엇일까요? 등등. 마치 면접 자리를 방불케 하는 질문이었다.
내 전공은 재무(ESG)다. 당사자도 알고, 주위에도 꾸준히 밝혔었다. 그렇다면 관련 질문이 들어와야 하고, 그에 대해 내 연구에 기반한 내용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시경제'라니. 평소 내 분야 논문 읽는데 바쁜 나였으니 충분한 내공을 기반으로 말하는 것이 무리였었다.
당시 그 상황에선 평소 생각하는 논리, 근거를 열심히 대긴 했지만 왜인지 부끄러움이 컸다. 이런 저런 얘길 하다가 중국과 신흥국 경제, 환율까지 어느새 이야기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대화를 돌이켜보면, 논리 구조는 다소 부실했으며, 미래 전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평소 생각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다보니 이리 저리 말이 엉키면서 마치 '경제 뉴스'나 '논문'을 읊는 듯한 인상을 줬던 것 같기도 하다. 마음 속에서 '어른아이'가 열심히 변명했다. '내 전공은 거시경제가 아니라고. 아직 경제학 박사 졸업도 안 했다고….' 그런데, 이런 사실이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그 대화 말미에 그 분이 내게 한 말은 이랬다. "○ 박사. 사람들은 보통 경제학 박사라고 하면 본인이 뭘 전공했는지 관심이 없어요. 그냥 '경제학 박사'라고 생각하지. 그게 대중의 기대치예요."
실제로 그랬다. 주위를 돌아보라. 입장을 바꿔서 누군가 경영학 박사라고 한다면, 법학 박사라고 한다면,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한 동경심이 나도 모르게 생겨나고, 전문가적인 식견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주업(?)인 '경제학 박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거시, 미시, 재무, 금융 무엇을 전공했느냐는 대중에겐 결국 부차적이다. 대중은 나로부터 '거시경제에 대한 최소 내공'을 기대한다. 육아로 바빠도, 회사 일에 바빠도, 내 주업에 대한 내공과 실력은 튼튼해야 한다. 이 날이 내가 그 대화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과거 브런치에서도 수없이 말했지만, 자기계발을 꿈꾸는 수많은 직장인들이 경제학 박사와 경영학 박사에 진학하지만 끝내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본업에 치이고 육아까지 신경쓰는 등 내 삶은 항상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내가 '평생 업'으로 생각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에 대한 철학과 내공은 꾸준히, 평소에 쌓는 것이 중요하다. 꼭 경제학 박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날 대화 이후, 『중앙은행과 통화정책』『21세기 자본』『환율의 이해와 예측』『거시경제학 - 성장과 변동』을 비롯해 거시경제 관련 책을 꺼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노트를 꺼내 필기도 해보며 생각을 정리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방향'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를 평가하는 것은 대중과 전문가 집단인이다. 그 기대치를 부합하고, 또 때로는 뛰어넘도록 신경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