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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철 Aug 25. 2015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예뻐하니까 예쁜 거다

비엔나텍스트어드벤처 02. 축구

나의 관심사 중 상당수는 '아는 척' 때문에 탄탄(?)하게 형성된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 이런 못된 습관이 들었는지, 사람들이 어떤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밑도 끝도 없이 다 꿰뚫어보는 척하는 평을 내놓는다. 보통은 뜬금포식으로 "거기서는 00만한 인물이 없지"라던가 슬쩍 반박하면서 "사실 000은 너무 잘해서 문제지"처럼 사람들 사이로 문장을 하나 투하한다. 이렇게 툭 날아간 한 마디는, 내용도 없는 주제에 호기심만 유발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내 입을 쳐다보길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 내 머릿속 상상의 근거들을 제시하고, 작은 사실 하나로 커다란 거짓 설명을 늘어놓는다. 이러면 또 무슨 영문인지 사람들은 나를 신뢰하고 수긍하는 표정을 짓는다.


자, 문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대화가 종료되는 순간부터 집에 오는 내내 내가 조금 전에 뱉은 말을 곱씹고, 하루 종일 또는 며칠씩 그 문제에 매달린다. 어제는 허풍쟁이였지만 내일은 부디 건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척하는 음악, 영화, 문학 등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인데 특히 축구 같은 경우가 아주 심각하다. 나는(왜! 도대체 왜!!) 한 번 본 선수를 마치 내가 낳아 키운 선수인양 평을 하고, 한 골을 보고 시즌 전체를 평가하는가 하면, 몇 분의 하이라이트 영상만 보고 90분에 대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래 놓고는 집에 가서 경기를 챙겨보고 기사를 읽고 다른 사람들의 평을 찾아 읽는다. 내가 뱉었던 말의 근거를 조금이나마 찾아보기 위해서인데, 가장 난감할 때는 보면 볼수록 아니다 싶을 때다. 부끄럽지만 이럴 때는 기회를 잘 보고 다시 얘기를 꺼낸다. 비겁하게 주워 담는 거다.

"그땐 내가 그렇게 생각했는데...가만 보니까 또 아니더라"


이러면 주변 사람에게도, 축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이네켄을 마실 때조차 괴롭다. 신성한 축구를 김성철이가 팬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씻어보고자 정식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뉴캐슬  유나이티드'라는 클럽이 나에게 지목당했다. 일도 아니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토요일 밤이면 아프리카 TV에서 90년대 수준의 저질 영상에 알아듣지도 못하는 꼬부랑 말로 재생되며, 툭하면 방폭 되는 중계를 찾아가며 꾸역꾸역 보고 있다. (뉴캐슬은 우리나라에서 인기팀이 아니어서, 우리나라 선수가 소속된 팀과 경기를 치르거나, 주요 팀들과 붙는 경기가 아니면 중계를 해주지 않는다.)


물론 뉴캐슬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또 보통의 건강한 팬들과는 달리 연고는커녕 영국에 가본적도 없는 주제에 "넌 내가 이제부터 좋아하겠어, 거절은 거절한다" 같은 마음으로 시작한 팬 생활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자 어디 가서 축구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도 부끄러움이 덜했고, 그간 던져놨던 말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기분도 들었다.  새 사람이 된 것이다.


새 사람이 되니 새로운 재미도 생기더라.

잠깐 말한 것처럼 뉴캐슬이라는 팀이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선 그저 그런 팀이다 보니 관련 정보가 희박하다. SBS에서 가뭄에 콩 나듯이 중계를 해줄 때 보면, 해설자들도 팀과 선수에 대해서는 나보다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더러 있었다. 틀린 말을 하는 해설자를 보며 아쉬운 마음은 들지만 동시에 묘한 위안을 얻는다고나 할까. 모르면서 떠드는 자는 불안에 시달리지만, 아는 자는 잘못된 정보를 들어도 여유를 갖게 된다. 잘 생각해보라, 지금 떨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과연...아는 것이 힘이다.

아, 어쩌면 내 주변 사람들도 그런 마음으로 내 말을 듣고 끄덕거리는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드니, 자연히 나를 낮추고 주변에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됐다.

특히 우리의 뉴캐슬은 맨날 경기에서 지기 때문에 나는 애써 밝은 면을 끄집어내며 희망을 품는 남자가 됐다. '이런 부분이 좋았는데 오늘은 운이 없었으니, 이대로만 가면 이번 시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어'라거나 '비록 오늘은 졌지만 저 선수는 향후 몇 년 안에 우리 팀의 대들보로 성장하겠군'처럼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특히  하나뿐인 나의 뉴캐슬 친구와 만나면 술 기운에 취해 희망을 증폭시킨다. 정말 기쁨은 두 배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에서 아름다운 모습 하나 더 찾고, 기쁨을 두 배로  만들 수 있는 커다란 재능을 얻게 됐으니 이처럼 감사할 일이 또 없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한 삼십 대 남자가 이렇게 자신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고, 언젠가 경기장을 방문해서 존재를 알릴 수 있는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당장 지금부터 내가 응원하는 팀을 바꾸고 뉴캐슬을 저주한다고 해도(예를 든 것이지만 용서하소서) 뉴캐슬의 경기력은커녕 이 우주의 기운은 털끝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법을 알게 됐다.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예뻐하니까 예쁜 거다.


아, 물론 예쁘면 기본적으로 예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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