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논쟁

비 오는 날의 수채화

by 최기린

몸이 앓았다.

요 근래 며칠 몸이 좋지 않더니 결국 자가진단 결과 코로나 양성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자가진단키트의 결과는 어떠한 법적 효력도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회사를 쉬려면 병원에 신속항원검사를 받으러 가야할 터였다.


억울한 마음이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마스크를 끼고 다녔고, 항상 손 소독제를 덕지덕지 바르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지난 주부터 몸이 좋지 않아 신속항원검사를 받았을 때에는 음성이 나왔고, 오늘 또 검사를 받게된 터라 생돈 40,000원이 지출되었다. 무엇보다 최근 격리지침에 따라 검체 채취일로부터 5일간 격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월요일에 양성판정이 나왔다면 월~금 5일을 쉴 수 있던 것을 수요일인 오늘 확진을 받으면 목~월, 즉 주말 제외 3일만 쉬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지극히 좋지 못하여 3일이라도 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동네 이비인후과로 걸음을 향했다. 입고있던 수면바지에 무신사 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주섬주섬 양말을 신은 뒤 롱패딩을 입어 내가 환자라는 사실을 세상천지에 알리기로 했다. 운동화를 신을까 하다가 도저히 몸을 굽혀 운동화를 바로 신을 자신이 없어 슬리퍼를 신고 차가운 세상(섭씨 6도)으로 향했다.


내가 신은 슬리퍼는 우리시절 모두의 교복이었던 삼선 쓰레빠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삼선 쓰레빠는 원래 아디다스에서 만든 제품인데, 아디다스에서 삼선 쓰레빠에 관하여는 상표권 관리를 강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건지 이젠 아디다스 삼선 쓰레빠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늘 신은 삼선 쓰레빠 역시 낫소에서 제작한 것으로, 삼선에 'NASSAU'라는 자기 브랜드명을 적어놓아 실용신안권 내지 특허권 논쟁에서 빠져나가려는 노력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삼선 쓰레빠를 신고 밖을 나갔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적당히 맞고 갈 수 있는 정도의 강우량이 아니라 우산이 반드시 필요한 수준의 폭우...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양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항상 챙기기에 우산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신고 온 삼선 쓰레빠가 문제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나는 삼선 쓰레빠에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나는 통상적으로 비가 오는 날에 쓰레빠에 양말 신는 걸 정말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집을 다시 가서 양말을 벗고 오는 번거로운 지꺼리를 할 자신이 없었고, 결국 동네 이비인후과로 향하며 관련된 추억에 잠기게 되었다.


(회상 씬)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살짝 민망한 요근래, 여러 논쟁들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 예컨대 '롱패딩 논쟁', '이벤트 논쟁', 그리고 그 유명한 '깻잎 논쟁'까지, 다양한 논쟁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고, 나 역시 이를 즐기며 상대방에게 즐거웁게 돌을 던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쟁의 대표주자로서, '슬리퍼 논쟁'을 소개하고 싶다.


'슬리퍼 논쟁'이란, 로스쿨 재학 시절 비가 올 때마다 친했던 형(이하 "A형"이라고 하겠습니다.)과 치열하게 다투었던 문제로서, 비 오는 날에 슬리퍼를 신는 상황에서 양말을 신어야하는가에 관한 것으로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전문직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예비)석학들의 수준높은 논쟁이었다.


나는 비오는 날에 양말을 신고 쓰레빠를 신을 바에는 그냥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쓰레빠를 신고 양말을 신으면 양말이 모두 물에 젖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 양말은 신을 수도 없고 벗을 수도 없게 된다. 또한, 만약 신발을 벗어야 하는 좌식 식당이라도 가게 되면 물에 젖은 양말이 바닥과 붙었다 떨어지면서 '쫘악 쫘악'하는 다소 유쾌하지 못한 소리를 내게 될 것이며, 결국 양말에 묻은 물이 마르면서 발냄새가 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다시 현재)


회상에 빠져 병원을 향하던 중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물웅덩이를 발견하였다. 힘을 다해 다리를 벌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양쪽 양말 모두가 젖게되는 대참사를 겪었다. 통상 기분이 좋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위 회상에 심취해 있던 나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외칠 뿐이었다.


'A형, 내가 틀리지 않았어.'


(다시 회상)


A형은 내 주장을 듣더니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A형은 부산 출신이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던 부산 남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과 정확히 일치하는, 유쾌하고 상남자스러운 사람이었다.

"기린아, 보거래이(방언은 필자가 대충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서, 현지 방언과 다를 수 있음)"

A형이 자신의 발을 지긋이 가리키며 내 시선을 강요했다. A형의 양말은 전혀 물에 젖지 않아 있었고, 오히려 방금 건조기에서 나온 것처럼 뽀송뽀송했다.


"기린아, 마 니 양말이 젖어삔 건, 마 기술, 그래 테커닉이 없기 때문이다 안카나.(실제 부산 방언과 다를 수 있음)"

난 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가 오는데 보법을 달리하여 양말을 젖지 않게 할 수가 있다니. 그러나 A형은 언제나 자신의 뽀송뽀송한 양말을 내게 강제로라도 보여주며 본인의 주장을 직접 증명해냈다.

"그리고 마 기린 임마야. 좌식 식당에 가는데 니라면 쓰레빠를 신고 가겠노. 그리고 만일에 간다캐도 방석으로 발 잘 가리면 냄새가 날 일이 없다. 씨빠꺼. (실제 방언과 다를 수 있지만, 마지막 비속어는 실제로 사용하였음. 왜 욕을 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음)"


비가 오는 날이면 논쟁은 계속되었고 그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그리고 결국 내가 항복하여 A형에게 '양말이 젖지 않는 보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A형 역시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로스쿨 2학년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3학년이 된 나는 로스쿨로 돌아가 A형에게 보법을 배울 생각에 적잖이 신이 나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때 팬데믹이 선언되었고, 우리 학교는 전면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되었다. A형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팬더믹은 생각보다 길었고, 결국 변호사시험을 보는 날까지 학교 수업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다. A형에게 보법 비기를 배울 수 없었고, A형은 부산으로, 나는 군생활을 하러 강원도로 가게 되며 자연스럽게 연락이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현재)


병원에서 진행한 신속항원검사 결과 예상한 대로 '양성' 판정이 나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집까지 한 번에 걸어가는 것조차도 버거웠기에, 중간에 사람이 없는 상가 건물에 들어가 잠시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유튜브에 들어가 '슬릭백 챌린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물론 슬릭백 챌린지는 유퀴즈 나올 때즈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춤자체가 너무 신기하여 알고리즘에 뜨면 나도 모르게 해당 영상을 시청하게 된다.


슬릭백 챌린지 그 춤은 사실 바닥에 발이 닿는 걸 그렇지 않게 눈속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초전도체 기술로 실제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LAKIM의 슬릭백 펌프가 흘러 나오며, 유퀴즈에 나왔던 학생분이 슬릭백을 추는 장면을 수차례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슬릭백 챌린지. 어쩌면 A형의 양말이 그리도 뽀송할 수 있었던 것은 A형이 비오는 날이면 슬릭백 보법으로 학교에 와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바로 나와서 실험해보고 싶었으나, 춤을 잘 추지도 못할 뿐더러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결국 조심스레 집에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장기를 살려 양말을 지킨 슬릭백의 선구자 A형에게 이글을 바치며 글을 마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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