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해킹
우연을 길들이다‘, 책의 원제인 ’The Taming of Chance'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몇 초만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면 “우연”을 길들이는 게 가능한가? 의문이 든다. ‘우연‘이 길들여진다면 그게 우연이란 단어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호기심 유발과 책의 판매를 위해 붙은 제목이라 생각했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우연을 길들인다는 거구나“하고.
바로 며칠 전, 미국 대선이 있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지지율에서 우세했지만, 개표 결과는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 10월 말 즈음 50%이던 힐러리 후보의 지지율은 이메일사건을 전후로 주춤하다가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47%로 다시 상승했다. 트럼프 후보의 경우 38%에서 시작해 이메일사건에서 45%로 최고점을 찍고 대선 일주일전에는 43%로 약간의 하락이 있었으나, 결국 미합중국의 수장이 되었다. 이것은 복잡하게 얽힌 정치싸움에 의해 운 좋게 트럼프 후보가 네 잎 클로버를 찾은 것일까, 혹은 통계적·필연적으로 당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거의 모든 통계학자·정치학자 들이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당선을 확실시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통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여론조사는 어떠한 확정된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각 후보의 지지율, 신뢰도, 표본오차를 밝힌다. 그런데 가령 A후보의 지지율 47%, B후보의 지지율 43%, 신뢰도 95%, 표본오차 ±3.2%라는 여론조사가 결과가 있다고 하자. 이를 풀어서 말하면 “동일한 여론조사를 100번 하면 그 중 95번은 A후보의 지지율이 43.8~50.2%에서 나오고 B후보의 지지율은 39.8~46.2%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니 트럼프가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확실히 있었음이 납득된다. 여론조사는 확률적인 근사치를 말할 뿐이다. 고전물리학의 세계가 결정론적인 세계라고 할 때, 이러한 여론조사는 근대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확률과 통계는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과학에 편입되었을까? 혼인과 출생 그리고 사망에 대해서는 어떨까? 인간의 자유의지가 크게 개입하는 부분이므로 사전에 계산할 수 없고 통계의 범주에 묶어놓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규모가 큰 나라들에서는 매년 축적되는 기록들에 의해 이러한 사건들마저 기상 변동의 경우처럼 자연 법칙에 부합하면서 발생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언 해킹은 『우연을 길들이다』에서 우연이 과학의 한 부분이 되면서 결정론적 세계가 무너지고 비 결정론적 세계가 등장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우연을 길들이다』속 숙명론과 과학적 실재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내가 이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결정적인 부분이다. 나는 위대한 시리즈 교양강좌 중 ‘위대한 질문’이란 강의를 듣는데, 나노물리학과 주형규 교수님의 ‘불확정성 원리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듣고 난 후 가치관에도 영향을 줄 만큼 큰 흥미로웠다. 이언 해킹의『우연을 길들이다』에서는 “확률“로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필연적인 법칙의 관계를 설명한다. 확률수학자 라플라스는 자신의 저서 <확률에 대한 철학적 시론>에서 ‘ 모든 사건들, 심지어 자연의 거대한 법칙과는 무관해 보이는 대수롭지 않는 사건들조차 태양의 공전만큼이나 필연적인 법칙의 산물이다’라고 했다. 또, ‘자연을 움직이게 만드는 모든 힘들과 모든 존재의 현황을 순식간에 파악할 수 있는 지성체, 즉 컴퓨터와 같은 완벽히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를 가정할 경우, 우주의 거대한 물체들은 물론 가장 작은 원자의 운동까지도 하나의 법칙아래 담아낼 수 있다.또 불확실한 것은 없고 과거와 미래를 전부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완벽히 확률이 통제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의미한 것이며, 인류가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을 하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그 판단에 있어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원인이 은밀하게 감추어진 경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도 저서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자연 법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함은 필연적‘이라고 했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의지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을지라도, 이러한 의지의 발현, 즉, 인간의 행위는 다른 물리적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보편 법칙의 통제를 받는 것이 명백하고 이러한 인간 의지의 발현을 기술하는 것이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통계를 통해 인간 집단을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통계적 운명론”이라는 철학적 난제를 야기했다. 통계적 운명론에 따르면 “도덕적 질서는 통계학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고 자유의지는 오직 이론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양자역학의 영향으로 통계적 확률 이 결정론적 세계를 부정하는 논거로 이해되지만, 이 당시는 확률 법칙의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행위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통계적 숙명론은 통계 정보에 근거하여 집단을 통제한다는 발상이 가지는 근원적인 난제를 드러냈다.
통계 법칙을 통계적 숙명론에서 벗어나도록 한 것은 정상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정상적’이라는 말은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러한 상태의 당위성을 나타낸다. 정상성은 ‘병리성’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콩트는 병리성을 “정상을 중심으로 했을 때 그로부터 벗어난 이탈”이고 보았다. 그가 정상성의 개념을 정치적인 영역에 도입했을 때 정상성은 곧 우리가 노력하여 달성해야 할 정화된 상태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제 정상이라는 개념은 대치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나는 현존하는 평균으로서의 정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진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함의 표상인 정상이다. 뒤르켐은 정상이라는 개념을 현상을 유지하거나 현상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았고, 골턴은 정상이라는 개념을 단지 평균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정상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정상은 평균에서 강하게 벗어난 것이고 비범한 것이며, 해당 종에서 가장 건강한 부류에 속한 것일 수도 있다. 정규곡선에서 정상은 평균이기 때문에, 정상을 좋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며, 어떤 극단적인 존재는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수한 것이었다. 많은 양의 데이터를 얻어 연구한 결과, 그는 생명체들의 특징들이 대체로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특징들이 이루는 분포를 ‘정규곡선’라 이름 붙였다. 정규곡선을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개체들이 평균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동시에, 유전 형질은 통상적으로 정규곡선에 부합한다는 통계적 ‘가정’을 지니게 된다. 케틀레는 정규분포를 설명하면서 “일군의 ‘사소한’ 영향들이 다양한 조합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유전이 일어난다.”고 하는 결정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골턴은 정규곡선을 통해 유전 과정이 편차의 법칙에 부합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현상을 설명했다. 동시에 ‘독립적인 사소한 원인들’을 배제하여 자율성을 지닌 통계 법칙으로 만들었다.
통계가 인과율 개념에 영향을 미쳤고 결정론적 세계에서 비 결정론적 세계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해킹은 통계 법칙의 자율성을 통해 보여준다. 1930년대 양자역학은 ‘환원 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결정론적인 기저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였다. 개별 사건의 설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들이 나타내는 현상은 무엇이며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 사건이 일어나는 확률과 조건이 아니라 그 사건들의 정규분포다. 이 정규분포는 일종의 과학적 실재가 되었으며 자율성을 지닌 무언가가 되었다. 이러한 통계적 자율성은 양자 역학이 등장하기 이전에 결정론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된다.
실재론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최선의 과학이론들이 요청하는 관찰할 수 없는 대상들의 존재를 믿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그래서 흔히 과학적 실재론을 말할 때 예로 드는 대상은 전자나 쿼크 같은 물리적 대상이다. 그런데 이언 해킹은 “생물학적·사회적 실재”와 “심리적 실재”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이러한 대상들에 “실재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과학 적 실재론에 대한 그의 입장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