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 나를 팩트체크하다
오랜 시간 책장에 꽂혀만 있던 '행동경제학'을 드디어 꺼내 들었다. 니체의 책도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 책은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난해했다. 경제라는 세계가 철학보다도 복잡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지만, 그만큼 흥미롭기도 했다. 생소한 용어들, 낯선 실험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페이지마다 이어졌다. (아래 이미지는 지브리풍으로 gpt에게 그려달라고 해봤는데 뭔가 묘해서 넣어봤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사람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기존 경제학이 인간을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존재로 가정해 왔다면, 행동경제학은 그 가정 자체에 의문을 던진다. 사람은 감정과 편향, 습관과 인지적 제약, 사회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책을 읽으며 마주한 개념들은 마치 내 일상 속 장면들을 정리해 주는 듯했다. 내 소비 습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할인 앞에서 흔들리는 마음.. 사실 나는 그동안 꽤 이성적인 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 책은 그런 나의 ‘착각’을 하나하나 팩트체크 해주었다.
정수기 렌탈 서비스, 유튜브 프리미엄, 스포티파이의 무료 체험 기간. 우리는 ‘잠시 빌린 것’ 일뿐인데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그래서 그 물건이나 서비스를 떠나보내는 데 더 큰 저항을 느낀다. 가만히 내 방을 둘러봤다.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고 남겨둔 물건들. 버리자니 아깝고, 쓰자니 필요 없는 것들. 그건 정말 ‘필요해서’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내 것이니까’라는 이유일까. 소유효과는 단지 소비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마음속 집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료이용이 끝나면 구독을 그만할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결국 구독을 이어가고 만다.
심리계좌: 같은 돈, 다른 감정
1만 원이라는 돈이, 어떤 날에는 너무 쉽게 사라지고 어떤 날에는 너무 아깝다. 특별한 날, 혹은 ‘오늘만큼은’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 쓰는 돈에는 이상하게도 덜 죄책감을 느낀다.
책에서는 이처럼 돈을 ‘목적’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구분해 사용하는 경향을 심리계좌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우리는 머릿속에 보이지 않는 통장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교통비’, ‘식비’, ‘선물용’, ‘오늘은 보상소비니까’라는 식으로 돈을 나누어 놓고, 어떤 계좌에서는 쉽게 쓰고 어떤 계좌에서는 아끼는 것이다.
재밌는 건, 똑같은 1만 원인데도 우리가 느끼는 가치의 크기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5만 원짜리 물건이 4만 원으로 할인되면 괜히 먼 곳까지 가서라도 사게 되지만, 110만 원짜리 노트북이 109만 원으로 할인되면 “거기서 거기지” 하고 그냥 넘긴다. 절대 금액은 같지만, 기준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심리적 무게가 달라지는 것. 비슷한 현상은 마트에서도 볼 수 있다. ‘1,000원’ 대신 ‘990원’으로 적힌 가격표를 보면 왠지 더 저렴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숫자의 미세한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그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반응인지는 쉽게 자각하지 못한다.
"지방 20% 함유"와 "80% 순수 고기".
"수술 성공률 90%"와 "실패 확률 10%".
같은 의미지만,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다. 나는 더 긍정적인 문장에 안도하고, 부정적인 표현에는 경계심을 세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누군가의 말에 흔들린다. 타인의 말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에도. “난 원래 이런 걸 잘 못해”라는 말 대신, “이건 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거야”라고 말해본다면, 우리의 가능성은 조금 더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프레임은 외부에서 씌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내가 나에게 씌우는 것이기도 하니까.
우리는 미래의 보상보다 지금의 만족을 훨씬 크게 느낀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나도, 눈앞에 치킨이 놓이면 미래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린다.
책은 말한다.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비합리적일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웃음이 났다. 맞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장치를 미리 걸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배달 어플을 지우고, 자동이체로 저축하고, 간식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두는 것처럼. 결국 환경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나를 바꾼다.
우리는 이미 들어간 노력이나 돈이 아까워 결정을 미루곤 한다. 신발이 발에 안 맞는데도 억지로 신고,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옷을 그냥 옷장에 걸어둔다. ‘비싼 돈 주고 샀으니까’, ‘오래 기다렸으니까’, ‘많이 노력했으니까’라는 이유로.
그런데 책은 말한다.
그 선택을 계속하는 것이, 진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매몰비용은 회수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끊어내지 못하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건 물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관계도,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선택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의 나를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게 진짜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그건 최선의 선택이었어.
우리는 늘 과거의 선택을 정당화하며 산다. 때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그게 최선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걸까.
책에서는 이런 심리를 사후합리화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나서, 그 선택에 어울리는 이유를 나중에 만들어낸다. 가령 누군가를 좋아했던 이유를 떠올릴 때조차, 사실은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유를 찾아내곤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내렸던 많은 판단과 선택이 꼭 ‘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했고, 후에 그 결정이 옳았다고 말하기 위해 이유를 덧붙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살아가고, 때론 그런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다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의식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면,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책에 말하듯, 사람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를 하고, 후회하고, 합리화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충분한 연습과 즉각적인 피드백이 필요하다.
실수가 허용되는 안전한 공간에서, 조금 덜 아픈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경험이 쌓여야 진짜 중요한 순간에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가 반복해서 선택을 점검하고, 편향을 인식하고, 실수를 복기하는 이유는 완벽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행동경제학'은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그렇게 소비하고, 왜 그 말에 흔들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 책은 나를 책망하지 않는다. 대신, 너는 원래 그렇게 작동하는 존재야 말해준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음번에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작은 인식의 변화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행동경제학에서 제가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이나 활용할 수 있는 부분들 위주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제가 다루지 않은 부분에도 좋은 내용이 많지만 이번글의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아 넣지 않았는데 기회가 되신다면 책을 직접 읽어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