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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정을 느껴도 괜찮아.

내가 나를 아끼기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긴다.

by 엔조

요번 주에는 '악마와 함께 춤을'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책으로 밀리의 서재 상단에 자주 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나 역시 최근에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감정기복이 있었기에, 내가 왜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는 알려주고 이후의 내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읽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제거할 대상이 아니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고쳐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쁜 감정은 결코 삶을 방해하는 존재가 아니다. 억누르거나 좋게 바꾸려 하지 말고, 그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라고 조언한다. 감정을 해석하거나 분석하거나 덮어두려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그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나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도, 긍정적으로 바꾸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신호이자 안내다.


나쁜 감정은 삶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다.


왜 우리는 분노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례한 동료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내가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비롯되고, 타인을 부러워하는 감정은 나도 그만큼 잘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결국 나쁜 감정은 자기애의 흔적이며, 삶을 의미 있게 여기기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감정은 때때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진실을 드러낸다. 직장에서 매일 좌절감과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지금의 삶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일 수 있다. 어떤 사람 앞에서 이유 없이 긴장되거나 들뜬다면, 그건 연애 감정일 수 있고, 친구와 함께할 때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그 관계는 이미 불균형한 것일 수 있다. 감정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이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할 때가 있다. 감정을 언어로 명확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슬프다’고 느끼지만, 왜 슬픈지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순간처럼.


감정은 행동이 아니라 인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을 느끼는 즉시 우리는 무언가 행동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감정은 행동으로 이어질 때 종종 문제를 만든다. 질투가 날 때는 “나 지금 질투하고 있구나” 하고 그냥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감정을 분석하거나 위로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불편하더라도, 그 감정 속에 조용히 머물면 된다. 그렇게 감정은 지나간다.


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을 덜 느끼고 싶어 한다. 분노, 질투, 악의를 덜 느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 믿는다. 간디 같은 인물들을 삶의 이상향으로 삼으며 그 경지에 도달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 경지는 평범한 인간의 삶에 대한 관심을 끊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다. 결국 그런 삶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그러한 성인들은 어딘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도 그렇고 내가 생각하기에 성인들은 썩 보기 좋은 삶을 아닌 것 같다.


마음의 단련과 감정이라는 나침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 완전히 휘둘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좌절이나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내면의 회복력과 평정심을 기르기 위한 단련이 필요하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다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을 직접 적어보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는 연습이 필요하다. 반복해서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두려움은 점점 익숙해지고, 그렇게 조금씩 사라지게 된다.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지만, 인식하고 익숙해지는 과정은 우리를 덜 흔들리게 만든다.


감정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드러낸다. 두려움은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며, 분노는 모욕을 감지하는 시스템이다. 시기심은 현재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내면의 목소리다. 감정은 삶의 나침반과도 같으며,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혹은 나의 진짜 욕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긍정의 강박을 의심하라.


우리는 흔히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삶은 늘 긍정적일 수 없다. 고통과 두려움, 우울함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긍정은 때로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가 진짜 직면해야 할 진실을 보여준다.


좋은 생각은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생각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은 사실상 ‘삶은 우리의 통제 안에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물론 긍정적인 태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밝고 좋은 생각만 하려는 강박은 오히려 삶을 비현실적으로 만들고,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억압하게 만든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라거나,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조언은 감정을 덜어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건, 우리가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감정은 삶의 일부일 뿐이다.


감정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도구도 아니다. 우리가 기분 좋을 땐 그것을 문제 삼지 않지만, 나쁜 감정이 찾아올 땐 조급해진다. 하지만 감정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독소도, 파괴적인 무기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망치지도 않고, 극복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감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균형 잡힌 삶은 부정적인 감정과도 공존할 수 있는 삶이며, 늘 밝고 긍정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태도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시기와 질투, 우리가 쉽게 말하지 못하는 감정


시기와 질투는 사람들에게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감정이다. 이 감정을 드러내면 왠지 더 추해 보일 것 같고, 괴물처럼 보일까 두렵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부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놓칠까 두려워한다.


질투는 특히 연인 관계에서 쉽게 나타난다. 사랑은 서로만이 공유하는 특별함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 배타적인 애정의 공간에 제삼자가 등장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상대방의 마음을 뺏길까 봐 두렵고, 경쟁자를 향한 감정이 생겨난다. 누군가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코 병적인 것도, 이기적인 것도 아니다. 질투는 순수한 사랑을 더럽히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 중 일부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고 싶어. 당신이 힘들 때 찾는 사람이고 싶고, 당신이 웃게 되는 이유가 되고 싶어.” 이런 욕구가 유치해 보일 수 있어도, 사실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질투는 단순한 소유욕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깊은 애착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기는 질투와는 다르게 자기 자신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그만한 자격이 없어 보이는데도' 성공하거나 칭찬받는 모습을 볼 때 시기심을 느낀다. 시기의 본질은 ‘왜 나는 아닌가’에 있다. 그래서 시기는 타인의 성공을 ‘나의 실패’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 감정은 자존감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시기는 괴물이 아니다. 문제는 시기를 느끼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우리는 시기를 자신을 발전시키는 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고, 불공정한 구조를 인식하고 바꾸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노력을 통해 얻은 성공’에는 시기심을 느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시기는 불공정해 보이는 결과에 대해 더 강하게 반응한다.


질투와 시기는 둘 다 고통스럽고, 솔직하게 마주하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이 감정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삶과 관계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다치기 쉬운 위치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 감정들에 너무 수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시기와 질투는 우리가 어떤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드러내주는 감정이다. 중요한 건, 이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숨기기보다는,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욕망과 상처를 이해하려는 태도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기애의 흔적이다.


우리가 시기하고 분노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아끼기 때문이다. 나쁜 감정을 없애려는 건 자기 자신을 억누르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감정을 억제하기보다, 정직하게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모욕당할 자아는 없다’고 말한다.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낸다. 고통의 순환을 끊으려면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우리는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하고, 공동체와 타인을 더 많이 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감정은 그 여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비게이션이다.


분노와 잘 살아가는 법


분노는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실제로 부당한 대우였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노는 흔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때로는 자신에게도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를 위험하고 다뤄야 할 감정으로 여기지만, 저자는 다르게 말한다. 분노는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감정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감정이며,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다루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분노”와 “나쁜 분노”를 나누고, 정의로운 분노는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정의로운 분노는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저 분노와, 그 분노에 대한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분노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도 않고, 더 큰 사람이 되게 하지도 않는다. 분노는 올바르게 느껴지는 일에 향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고장 난 시계가 하루에 두 번 맞는 것과 같은 우연이다.


분노를 억누르거나, 길들이거나, 애써 통제할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노를 솔직하게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분노를 느낄 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가 더 중요하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별것 아닌 사람’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낄 때 분노한다. 그 감정은 내 삶을 방해받았을 때,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나쁜 감정 중에서도 분노는 특히 자기애와 깊은 관련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무시하거나 침해하거나 모욕할 때, 우리는 분노를 통해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그래서 분노는 자신을 옹호하려는 감정이며, 삶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노는 항의의 감정이기도 하다. 무언가가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때, 혹은 누군가의 악의적인 행동이나 무책임함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분노한다. 그렇기에 분노는 반드시 두려워하거나 억눌러야 할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분노를 ‘올바른 분노’로 만들려는 시도보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지나가게 두는 것이 더 건강한 태도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노를 통해 누군가를 응징하려 하기보다는, 분노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듣는 것이다. 그것이 분노와 잘 살아가는 방법이며, 감정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실수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자신의 결점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과 자신, 그리고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 나쁜 감정이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의 일부라면, 그것은 또한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의 일부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화를 내는 건, 그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 삶이 소중하다는 건, 나에게 의미를 주는 관계 또한 소중하다는 뜻이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 안의 연약하고 불안정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솔직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감정은 수도꼭지처럼 잠글 수 없다. 대신 그저 감정이 지나가도록 두면 된다. 질투심이 든다면, “질투가 난다”라고 말하고 거기서 멈추면 된다. 설명도, 자기 위로도 필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 감정을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가 나쁜 감정이 주는 고통을 견디기보다, 빨리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로운 행동을 하거나 누군가를 해치기도 한다. 하지만 감정이 말 걸어오는 것을 피하려 들기보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삶이 의미 있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감정은 삶의 일부이며,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시기심을 느끼는 건, 지금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신호고, 그 자체가 상처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냥 아파하면 된다. 굳이 시기심을 동기로 삼거나,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짜야할 필요는 없다.


나쁜 감정을 사랑한다는 건, 그것을 정직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감정은 정당화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다.


삶이 의미 있는 건, 그 안에 나쁜 감정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고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니까. 그저 그 감정을 감정 그 자체로만 느끼고 넘겨버려라. 부정적인 감정이 곧 자신에 대한 애정이고 관심이니깐. 가끔 내가 잘 가고 있는 자가체크정도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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