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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날

오늘은 그 이름 모를 들꽃도 관심 있게 들여다봐 주었다.

by Boradbury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다.

“암이래요.”

암이 무슨 철 바뀔 때마다 앓는 감기도 아니고, 유행처럼 번지는 바이러스성 질환도 아닌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쨍 하지도, 시원하게 비를 퍼붓지도 않는, 말 그대로 그저 그런 날이었다. 대충 씻은 붓으로 쓱 그린 듯 흐리멍덩한 하늘. 어떤 감정도 만져지지 않는 미지근한 공기. 그것들은 마치 그녀들의 담담한 고백과도 같았다.


A는 지난주에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두 명의 의사가 같이 들어가 자궁을 들어내고, 주변에 퍼져있는 작은 종양들까지 제거하는 제법 큰 수술이었다. 많이 아파요? 아뇨, 하나도 안 아파요. 내 질문에 그녀가 퉁퉁 부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적장애가 있는 그녀는 통증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동작이 둔해지고, 잠을 많이 자면 아, 지금 어디가 아픈가 보구나 하고 주변에서 눈치를 채야 한단다. 보호자인 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진통제 때문인지 그녀가 자꾸 꾸벅꾸벅 졸았다. 잘 보이는 곳에 ‘Get Well Soon’이라고 적힌 풍선을 묶어주고 조용히 병실에서 나왔다.

3일 후, B가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크기도 작고 아직 전이되진 않았지만, 2년 전에도 같은 이유로 시술을 받았던 터라 가족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반대쪽 유방에서도 작은 종양이 발견되면서 결국 더 안 좋은 상황을 맞지 않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양가 어머님이 모두 암으로 사망하신 터라 부부는 힘들지만 빠른 결단을 한 것이다. 누구보다 그 힘든 과정을 잘 알기에 아직 어린 두 남매를 보며 결정을 늦출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쪽 다 절제하는 거, 괜찮겠어? 남편이 물었단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겠어? 그녀는 걱정하는 남편에게 웃으며 담담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 함께 주일학교 교사를 했던 C의 집을 찾았다. 수술실 간호사로 일하던 중 한쪽 눈의 이상을 느끼고 검사를 받았는데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단다. 크기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암세포가 척추 가까이에 위치하는 바람에 뇌와 온 뼈로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어린 두 아들은 암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기도 했고,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많이 놀라지 않은 듯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암에 잘 듣는 항암제가 시험 투약 중이어서 그걸 복용해 보기로 했단다. 약이 잘 듣기만 하면 방사선 치료나 다른 힘든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A의 언니가 말했다. 앞으로 동생과 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B가 말했다. 아이들하고 오랜 시간 함께 하려면 양쪽 가슴 없는 게 뭐 대수겠어요? C가 말했다. 가족과 함께했던 아주 평범한 시간이 모두 달라 보이더라고요.


진짜 소중한 것들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너무 익숙해서 있는지도 모르는 것들이다. 숨 쉴 때마다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아주 당연한 일상. 남편의 얼굴을 보며 일어나고, 자는 아이들을 깨우고, 가족들이 한 상에 둘러 밥을 먹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산책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동료들과 수다를 떨고, 가족들을 위해 장을 보고,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드는, 아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하루. 우린 길게 이어진 그 날 중 어느 한순간을 함께 걷고 있다.

집을 나서다가 이름 모를 들꽃 앞에 섰다. 작년 이맘때도 피었다가 언제 졌는지도 모르게 기억에서 잊혀졌던 그 꽃은 한 해가 지나 또다시 예쁜 꽃을 피웠다. 우리의 많은 날이 저렇게 지나갔겠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너무도 자연스럽고 작아서 그냥 스쳐 지나갔을 하루. 그런 하루가 사실 내 소중한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잊고 살진 않았는지. 오늘은 그 이름 모를 들꽃도 관심 있게 들여다봐 주었다.


A가 수술한 지 2주 만에 교회에 나왔다. 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예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났다. 살이 좀 빠져서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고 칭찬하자 그녀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돌렸다. 월요일엔 B의 딸아이가 놀러 왔길래 엄마의 안부를 물었더니 많이 회복됐다고 소식을 전했다. C는 한 달 후에 약이 잘 작용하고 있는지 다시 검사해 보기로 했단다. 다행히 보험회사와도 이야기가 잘 되어 비싼 약값도 잘 처리될 것이라고 했다.

언니와 동생이, 남편과 아내가, 엄마와 아이들이 영원히 함께하지 못 할 뻔 했던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녀들은 이런 특별하지 않은 오늘의 끝에서 서로의 숨결을 확인하며 평온히 잠들 것이다.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내게 굿나잇 키스를 하고 방을 나갔다. 불을 껐다. 내게도 그저 그런 날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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