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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몽거

엄마, 난 나중에 세컨드 잡으로 치즈몽거가 될 거예요.

by Boradbury

오크통을 위아래로 눌러놓은 듯 허리가 제법 두툼했다. 한 바퀴를 뺑 돌아도 똑같은 모습이 속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무게 40kg의 덩치가 나무 탁자 위에 올려지며 쿵, 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덩치의 등장에 장 보던 사람들의 눈길이 바늘에 찔린 듯한 반사신경으로 한데 모였다. 순간, 그것이 노랗고 굽실거리는 수염, 트랭거(멜빵)로 겨우 붙들어 맨 뚱뚱한 배, 레더호젠 차림의 스위스 남자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운이 참 좋군요. 재미난 구경을 하겠어요.

곁을 지나던 중년 여자의 말에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는 아이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도 저마다 잘 보이는 자리를 선점하고 빨리 쇼가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멋진 칼들을 든 한 남자가 등장했다. 치즈몽거.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후 들고 온 작은 칼로 덩치의 가운데에 선을 긋더니 정수리 부분과 양쪽 옆구리에 작은 칼 3개를 깊이 박아 넣었다.

엄마, 난 나중에 세컨드 잡으로 치즈몽거가 될 거예요.

치즈몽거가 뭔지는 잘 몰라도 왠지 소믈리에나 쇼콜라티에, 파티쉐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리고 동시에 ‘왜?’라는 한 글자가 가만히 견디지 못하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딸아이는 치즈 전문가가 한번 되어 보고 싶단 말만 덩그러니 남긴 채 자기 방으로 사라져버렸다. 하필 치즈 전문가일까, 다른 것도 많은데. 평소에 치즈를 많이 좋아했던가, 샌드위치에 치즈 넣는 것도 하바르티가 아니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꼬리꼬리한 냄새가 난다.

유럽에선 어떤 분야의 전문가, 장인을 마스터, 마이스터, 길드로 부르며 체계적으로 양성한다. 프랑스의 치즈몽거는 필기시험과 계량기 없이 치즈 자르기, 눈감고 60가지 치즈 종류 맞추기, 인터뷰 등을 거치고도 2년 후에나 장인으로 불릴 수 있다.

유럽 최고의 발효 식품이 치즈라면 한국엔 김치가 있다. 그런데 김치 명장 1호 김순자 씨는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대한민국식품명인법이 제정됐을 때, 전통주와 한과 같은 건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데 반해 김치는 모든 집에서 다 담가 먹는 음식이라며 자격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결국, 끈질긴 노력 끝에 그녀는 지난 2012년, 김치 분야로는 1호로 장인이 됐다.

더 기가 막힌 건 식품 명인 전수자 중 친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건 그녀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명인의 기술이 대부분 가계를 통해서만 전수되고 있단 점이다. 물론 수십 년, 수백 년을 이어온 명장 가문이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전통 기술을 친인척으로만 전수한다면 그건 명맥을 오래 이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요즘 깨어있는 기업 소유주들도 가족이 아닌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긴다는데 그녀가 30년이나 함께 해 온 직원을 전수자로 선택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 치즈몽거를 상상하다가 동시에 노란 머리의 서양인 김치 명인을 상상했다. 언젠가 한국에 머물며 전통주와 가야금, 판소리 등을 배우고 있다는 외국인들을 본 적이 있다. 낯설긴 하지만 국가를 초월해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그 기술을 전수해 나간다는 건 참 귀한 일이다. 그래서 그 기술이 잊히지 않고 후세에 전해질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런 기술들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치즈 덩어리가 쩍 갈라진다. 꼬리꼬리한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간질인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가에 고소한 미소가 걸린다. 치즈몽거는 덩치를 쪼개던 작은 칼로 내부를 긁어 사람들에게 시식용으로 건넨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손바닥 위에 놓인 노란 조각을 조심히 입안으로 가져간다. 치즈 알갱이를 천천히 씹자 딸아이에게 물었던 한 글자가 가만히 견디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왜? 왜 이렇게 맛있는 건데?

난 이미 홀린 듯 카트에 덩치의 일부분을 실었다. 입안과 내 주변으로 아직도 그 꼬리꼬리하지만 고소한 장인의 냄새가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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