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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 나무

조용한 강의실에 드디어 샛노란 색 크록스가 재등장했다.

by Boradbury

Wood

맨발에 샛노란 색 크록스 슬리퍼를 신은 교수가 칠판에 알파벳 네 개를 적고 강의실을 나갔다. 첫 수업에 학생들을 골탕 먹이겠다는 것인가. 아랫줄엔 추가 메시지까지 적혀 있다. Have Fun! 그의 조롱이 느껴진다.

나무라. 우습군. 걱정하지 마. 이래 봬도 아그립바, 비너스, 아폴로 데생으로 다져진 국가대표급 실력이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를 휩쓸던 손, 미술 학원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게 본보기라며 자랑하던 손. 그 손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릴 시간이다.

첫 시간이라 기본기를 보시겠다는 거군. 주위를 둘러봤다. 열두 명 남짓 모인 학생들은 저마다 연필을 들고 선뜻 작업을 시작하지 못했다. 물론 나 역시 아무리 실력이 좋고, 오랜 시간 숙련되었다 할지라도 짧은 수업 시간 안에 한 가지 작업을 완성하는 건 쉽지 않다. 서둘러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손이 움직여 재빠르게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일종의 습관이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미대를 다니는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보다 테크닉이 달린다고. 유튜브에 올라온 미국 명문 미대 합격 포트폴리오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저 정도는 이미 초등학교 때 뛰어넘었지.

먼저 나무의 재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기본 도형 중 구를 선택했다. 아무래도 정육면체보단 좀 더 표현이 까다로우니 이것으로 차별화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다. 구에 나이테를 자연스럽게 그려 넣는 건 나름의 요령이 필요하다. 곡률에 맞게, 큼직하게 그려줄 것. 그리고 단계별로 명암을 표현하고, 아래쪽은 그림자와 함께 무늬도 적절히 뭉개줄 것. 얼마나 많이 그렸으면 손은 기계처럼 쉴 새 없이 반복 운동을 한다. 점점 나무의 질감이 살아난다.

주변 학생들을 힐끔 쳐다봤다. 포기한 건가? 슬렁슬렁 움직이는 그들의 손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한국인처럼 열심히들 좀 살아라, 얘들아. 미국 애들은 뭘 해도 느리다 하지 않던가. 적어도 한국인에 비교하면.

샛노란 색 크록스 슬리퍼라니. 갑자기 그 맨발의 교수가 떠올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입술로 힘겹게 눌러 막았다. 교수란 모름지기 격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방금 집에서 일어나 대충 걸리는 슬리퍼에 맨발을 구겨 넣고 온 건 아닐는지. 차라리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려면 페인트가 사방에 묻은 작업용 앞치마라도 입고 오던가. 순간, 이 유학을 결정한 게 잘한 짓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도 가관이다. 차라리 같은 과가 아니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미대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적어도 패션 감각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헤어 스타일과 옷 입는 센스, 거기에 걸맞은 액세서리에 신발까지.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그림 구성하듯 나 자신을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참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나 어울리지 않고 저마다 사방으로 날뛰는 그들의 행색이 샛노란 색 크록스를 신은 맨발의 교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없앴다. 어쨌든 오늘의 내 사명은 첫 수업에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어 교수의 눈에 띄는 것과 다른 학생들에게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잠시 후 실사에 가까운 내 나무 구를 보고 ‘어메이징’을 외칠 그들을 상상하니 아까와는 또 다른 웃음이 나서 다시 입술로 눌러 막았다.

마지막 단계다. 톤을 정리하고, 반사광을 표현하자 훨씬 입체감이 살아났다. 마치 금방이라도 데구루루 굴러서 내 발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심지어 나이테는 각각 깊이가 달라 눈으로도 그 굴곡이 느껴질 정도였다.

채색은 생략한다. 오늘은 첫 시간이고, 다른 도구는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채색을 하지 않았지만, 적절한 명암을 통해 느낌은 잘 살렸으니 이 정도로 만족한다.

조용한 강의실에 드디어 샛노란 색 크록스가 재등장했다. 다시 그 신발을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고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이런 정신 나간 교수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롭게 빛나 보이는 건 창문으로 들어오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햇빛 탓일까?

교수는 모두의 그림을 모아 강의실 앞 벽면 가득 걸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무언가 잘못되었다. 교수는 내 완벽한 그림 앞을 건성건성 지나갔고 내 얼굴은 그의 크록스 슬리퍼처럼 샛노래졌다.

나무를 그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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