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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8

To. James Myers

by Boradbury

문 앞에 놓여진, 아니 던져진 상자를 발견했다. 그건 바른 자세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기보단 삐딱하게 원치 않는 불편한 자세로 세워져 있었다. 상자엔 한껏 치켜올린 입꼬리 덕에 환하게 웃고 있는 유통업체 로고가 세로로 웃었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이 집엔 나 혼자 산다. 난 저 인터넷 쇼핑몰에서 무엇을 사지 않았다. 심지어 남들 다 있다는 어카운트조차 없다. 그렇다면 누가 내게 보낸 걸까. 그것도 기대하긴 힘들다. 왜냐하면 난 히키코모리니까.

인터넷 뉴스에 우편물에 독극물이나 마약을 묻혀 만지기만 해도 기절하게 하는 신종 범죄가 늘었다고 들었다.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염려해 본다. 일단 CCTV부터 돌려봤다. 오후 한 시 쯤 배송업체 차량 한 대가 집 앞에 도착했고, 그 차에선 배송 차량과 색을 맞춘 옷의 사내가 그 작은 상자를 문앞에 던지고 사라졌다. 다시 화면을 돌려봤다. 사내는 분명 맨손이다. 그가 맨손으로 상자를 만졌다는 건 그 상자 겉 표면에 독극물이나 마약 같은 위험 성분이 묻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난 문을 아주 살짝만 열고 손톱을 세워 상자 모서리를 집어 들었다. 아주 작은 상자였고, 그 안에 든 것도 그리 무겁지 않아 손톱 두 개만으로도 상자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고래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물고기처럼 무거운 문은 상자를 집어삼켰다.

상자는 또다시 문 안 쪽에 다른 면이 윗면으로 올라간 채 몇 시간을 세워져 있어야만 했다. 낯선 것과 대하는 건 여전히 내게 어려운 문제였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상자에 익숙해질 시간. 하나, 둘, 셋... 백스물 일곱, 백스물 여덟, 백스물 아홉, 백 서른.

천천히 숫자를 세고, 마음이 온전히 편안해지고서야 고양이 자세를 하고 상자에 접근했다. 먼저 상자를 바로 눕히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래야 상자 밖에 써져 있는 수신인 이름과 주소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천천히 상자를 두 손 안에 자리잡게 한 후 눈을 크게 뜨고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우리집에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계절이 두 번 쯤 지난 것까진 기억이 난다. 어둑해진 집안에서 글자를 읽는다는 건 숨겨진 보물지도를 찾는 것마냥 어렵다.


To. James Myers

...


달빛에 겨우 드러난 수신인의 이름이 낯설다. 그러고보니 그 아래 적힌 주소의 번지수가 우리집 것과 다르다. 다른 집으로 가야할 상자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불시착했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가 지난 삼 년간 전혀 없었기에 피부가 바싹 졸아든 것처럼 긴장됐다. 문앞에 그냥 두면 배달부가 원래 주인을 찾아주려나. 다시 가로 누워있던 상자가 생각났다. 그가 그렇게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상자는 그 모양으로 누워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나같은 사람에게 잘못 전해지지도 않았을 터다.

나가다. 난감하다. 이 두 단어가 비슷한 단어로 목구멍에 와 턱 걸렸다. 내게 이 집을 나가는 것과 난감한 것은 동의어다. 내 피부에 닿는 집안의 익숙한 공기, 그 안에 배어있는 곰팡이 냄새와 겨울의 코끝 찡하게 만드는 알싸한 향기. 보드랍게 내 몸을 감쌀 수 있는 담요 외에 내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있었던가. 아, 자극은 괴로워.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다.

나가다. 난감하다. 다시 두 단어 아니, 한 단어를 상자 옆에 두고 빙글빙글 주변을 서성인다. 그러다가 주저앉는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한 방향으로 너무 오래 돌았는지 몸이 휘청거렸다. 상자가 다시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분명 이런 날 비웃는 거겠지. 익숙함 뒤에 숨어 자극에 난감해 하는 히키코모리를 향해 던지는 조소에 몸이 자꾸 구석으로 붙는다.

6408이면 바로 옆집일까. 옆집 정도면 밤에 조용히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다가 누구와 부딪히지는 않을는지. 혹 이 동네에 요즘 출몰한다는 밥캣을 만나는 건 아닐까. 머릿속 생각들이 삼 년만에 처음으로 복잡하게 뒤엉킨다. 내면의 상어들이 지느러미를 바짝 세우며 수면 위를 거닌다. 언제라도 내가 이곳을 나가는 순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어 단숨에 물어뜯을 기세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내 주위를 둥글게 돌고 있다.

상자는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둔 거실 한 가운데 덩그러니 누워있다. 잘못 배달된 건 내 책임이 아닌데 갑자기 왠지 모를 책임감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몸안에서 꿀렁거리는 그것 때문에 바닥으로 뭔가를 쏟아낼 것만 같다. 옆집에서 끌어다 쓰는 인터넷의 속도는 느려서 빠르게 무언가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검색창에 6408로 시작하는 번지수의 집이 우리집과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찾아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 지도대로라면 걸어서 족히 5분은 걸어야 한다.

오랫동안 움직인 적이 없는 다리는 가늘기만 하다. 5분을 걷는다는 것은 무리란 생각이 든다. 사실 저 상자를 내가 그냥 차지한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건 배달부의 실수고, 내 잘못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합리화에 접어드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그렇게 일어서는데 여러 통의 우편물이 발에 챈다. 그리고 우편물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To. James Myers

6408...


히키코모리처럼 숨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내 이름과 주소가 다시 어둠 속으로 묻힌다. 난 또다시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고래의 입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물고기처럼 무거운 문은 나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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