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겠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누구든 제임스의 그 표정을 봤어야 해. 이때를 위해 준비된 건가. 노이즈 캔슬링이란 기술은 누가 만들었는지 참. 노벨상을 줘야 해. 해양 생물처럼 입만 뻐끔뻐끔. 아쿠아리움에서 본 것 같아. 저렇게 생긴 물고기. 문어 대가리를 연상케 하는 헤어 스타일과 해삼 같은 피부 상태, 말미잘 족반처럼 키보드 위를 흐느적거리는 손가락까지. 제임스의 모든 것이 내 퇴사의 이유였어.
등 뒤로 쏟아지는 그의 말까진 다 삼키지 못해 짐을 챙겨 들고 나오는 길에 소화제를 하나 사 먹었어. 회사 건물 맨 아래층, 내 서식 환경은 그 약국 하나로 완성됐었지. 답답할 땐 소화제 하나. 사람 살리는 용한 명약.
사람들은 내게 말했어. 해파리 같아.
사무실에서 챙긴 짐들을 아직 할부도 안 끝난 작은 차에 쑤셔 넣고 가방에서 알부테롤 인헤일러를 꺼내 폐 끝까지 숨을끄집어 넣었어. 마치 강제로 연행된 내 안의 죄들을 보이지 않는 깊은 감옥에 숨기려는 듯.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 날숨으로 결국 다 토해내야 하는걸.
바보 멍청이... 그 뒤에 뭐더라. 어릴 적 친구들이 나를 부르던 말들이 있었는데. 아, 맞아. 바보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문어 대가리. 아주 웃겨. 고작 해양 생물들의 나열인 게 그땐 뭐가 그리 화가 나고 속상했을까. 하지만, 간혹 이런 의미 없는 말들이 그립다.
스위치만 켜면 왜 이런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정확하게 왔다 갔다 하는 와이퍼. 아주 작은 빗방울들이지만 와이퍼를 안 켜면 시야를 묘하게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들이 뻑뻑하게 밀려 나가는 걸 보며 갑자기 짜증이 났어. 왜 짜증이 났을까.
눈앞에 깜빡이는 적색 신호등이 대충 닦아 놓은 앞 유리에서 물에 젖어 찢어진 색이 되어 더 걸리적거리게 됐네. 입에서 육두문자가 출동 준비를 마치고 내 마지막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말을 내뱉으면 왠지 내가 진짜 해파리가 될 것 같아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켰어.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위장에서 조용히 들리는 소리, 꼬르륵.
눈물이 위장서부터 차오르는 것 같아. 몸의 대부분이 물로 채워지는 기분이야. 뼈도 장기도 근육도 모두 힘을 빼고 나니 조금은 평온해지는 느낌. 그걸 깬 건 뒤차의 경적이었어. 어쩌라고.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평화의 소리. 평화를 부르는 소리. 스르륵 창문을 열고 가운뎃손가락을 빗속에 던졌지. 손가락 끝 촉수에서 미세한 독이 튕겨 나갔어. 그게 뒤차 운전자에게 얼마나 날카로운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천천히 다시 유영하며 창문을 닫았지.
대중 속에 숨고 싶어. 하지만 나를 알아봐 줬으면 해. 날 홀로 내버려둬. 하지만 난 너무 외로워. 만지지 마. 하지만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역설적인 이 목소리는 소통의 부재 속에 흐느적흐느적 떠다니고 있는데.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겨우 움츠렸다 펼쳤다 하는 정도랄까. 그래도 나름 해수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 바닷속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그래, 노력했다고. 그것도 아주 많이.
몇 대의 차가 내 작은 차를 지나가고 나서야 다시 가속페달을 밟았어. 빗속을 차량 흐름에 밀려가는 내 작은 차. 그리고 나. 우린 같이 물속을 유영하고 있네. 이 평화는 원래 우리에게 있던 걸까, 아니면 필수 불가결한 관계의 한계에서 찾아낸 명약일까. 소화제처럼.
답답해. ‘얼죽아’인 난 오늘도 드라이브 스루로 ‘아아’를 시켰지. 빨대를 타고 올라온 부스터샷을 때려 맞은 내 몸이 갑자기 생기가 도네. 조금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가늘고 길게 사는 건 내가 가장 증오하던 삶이지만 내 운명조차 스스로 결정할 용기도 없으니, 이것에라도 기대어 살 수밖에.
육각형 인간이 못 되는 자격 미달의 나, 분초사회에서 여윳시간을 바라는 게으른 나. 윗세대의 ‘라테’는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N포세대에겐 그저 판타지 세상인걸.
앞 유리 건너로 높은 빌딩의 디지털 광고판이 보이네. 그런데 잠시 스쳐 가는 뉴스의 자막을 읽다가 가슴이 턱 막혔어. 양날의 검이 된 AI, 인간의 설 자리 줄어들까. 하아.
점점이 찍히던 빗방울이 엄청난 소나기로 바뀌었어. 와이퍼를 제일 빠르게 켜도 그가 일하는 것보다 쏟아붓는 물의 양이 더 많네.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기에 브레이크를 밟았어. 하지만 다행이야. 난 해파리니까 또 물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쓸려갈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