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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동그라미

양말은 조금씩 불편해졌다.

by Boradbury

처음엔 크지 않았다. 티도 나지 않아서 화려한 꽃무늬의 일부라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위치도 뒤꿈치, 특히 바닥면으로 꺾어지는 곳에 있다보니 더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동그라미. 완벽히 직조된 실들의 연합은 작은 틈새로 인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주인도 인식하지 못한 시나리오였겠지만.

양말은 조금씩 불편해졌다. 당겨져 올라가는 실들 때문에 며칠이 되지 않아 사소한 동그라미는 중요한 동그라미가 됐다. 주인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양말을 벗어 던졌다.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간 그것은 밑바닥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그 색처럼 시커먼 생각을 키워갔다. 가치가 상실된 마음은 점차 고약한 냄새를 뿜어냈다.

양말은 생각했다. 분명 세탁기에서 정신을 잃은 동안 누군가 자기의 옆구리를 찌른 게 분명하다고. 그것이 아니라면 건조기에서 다시 한번 정신을 잃었을 때 뜨거운 열기가 자기 옆구리를 태운 거라고.

사실, 이런 이상한 현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주인이 코스트코에서 양말을 사 왔을 때, 분명 여러 개의 양말이 같이 묶여 있었다. 색도 무늬도 크기도 같은 그것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가치가 온세상에 드러나게 됐다며 기뻐했다. 그들은 한 쌍씩 묶여 있지 않았다. 그저 같은 양말 10개였다. 신발처럼 왼쪽, 오른쪽 구분도 없이 똑같아서 월요일엔 그 아이와, 목요일엔 다른 아이와... 이런 식으로 함께 출정했다. 그런데 그 이상한 현상은 그때부터 일어났다.

월요일에 같이 출정했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나도 말이다. 그 주에 양말은 월요일과 금요일에, 그 다음 주엔 화요일과 토요일에 일했다. 물론 그 사이에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는 과정이 반복됐다. 한번씩 그 과정을 거칠 때마다 주인은 뭔가를 세탁실 쓰레기통에 던져 넣곤 했다. 양말은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의 몸체가 가진 무늬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점점 만나는 다른 양말들이 줄어든다는 걸 발견했다. 서로 안부를 물었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코스트코에 진열되어 있을 때, 양말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묶음씩 카트에 실었다. 건너편에 있던 장갑은 그런 양말을 부러워 했다. 매끈한 인조가죽으로 만든 장갑은 아직 날씨가 춥지 않아서인지 별로 찾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의 발을 내려다 보다가 자기와 같은 양말들을 만나면 반가워 인사를 했다. 하지만 구두에 가려지고, 바지에 가려져 사람들이 걸을 때마다 아주 살짝씩만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명을 다하는 그 모습이 숭고한 희생의 본보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 드디어 주인의 손에 선택됐을 때, 양말은 이 한 몸 뜨겁게 불사르겠다고 다짐했다.

주인은 양말을 소파 아래에서 주워 세탁기로, 그리고 다시 건조기로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했다. 양말은 건조기에서 나온 몸뚱이를 확인했다. 동그라미가 이젠 뭐라 부를 수 없는 모양이 되어 더 큰 구멍으로 변했다. 그 구멍으로 사명감도 빨려들어간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주인의 발을 온전히 감싸 안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졌다.

세탁실에 누워 생각했다. 그래, 없어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몸에 작은 동그라미가 생겼어. 그리고 이상하게 그게 커지고 있어. 그런데 말이야, 그게 내 잘못일까? 양말은 그 어떤 답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도 그에 대한 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문소리가 나더니 주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건조기에서 나온 세탁물을 분류하다가 이내 구멍난 양말을 발견했다. 그는 양말을 들어 요리조리 살피는 듯하더니 곧바로 둥글게 뭉쳐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저번에 어렴풋이 본 그 장면. 양말은 그것이 사라졌던 또다른 아이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회색 먼지들이 온몸에 들러붙었다. 소용가치를 잃은 양말은 자신에게 다시 물었다. 내 잘못일까? 몸에 구멍이 난 것은? 쓰레기통에 버려져 사라져간 아이들이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 양말을 아프게 찔렀다.

탓이 시작됐다. 잔인한 세탁기와 건조기가 그 정도의 일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야. 봐, 그들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동료들도 잃고 만신창이가 됐잖아. 냄새나는 발을 감싸 안으며 사명감을 불태우던 날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쓰레기통 안은 소파의 그늘 속보다 더 서늘했다.

다시 문소리가 나고 주인이 들어오더니 쓰레기통을 들고 세탁실을 나섰다. 앞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단 생각에 갑자기 억울함이 올라왔다. 쓰레기통은 주인의 손에서 앞뒤로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양말은 소파 위에 놓여 있는 새 양말 묶음을 발견했다. 자신과 똑같은 색, 무늬, 크기를 가진 그것들.

양말은 생각했다. 내 잘못일까? 아니. 그럼 세탁기나 건조기 탓일까?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이 사소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양말은 흔들리는 쓰레기통 밖으로 주인의 발을 내려다 봤다. 터벅터벅 성의없이, 대충. 주인의 발을 온몸으로 감싸고 있던 양말들은 거친 바닥에 쓸리며 보풀을 토해냈다. 그 사이로 아주 작은, 사소한 동그라미가 보였다.

쓰레기통을 든 주인의 손이 포물선을 그리며 양말과 먼지들을 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양말은 죽었다. 또한, 그의 사명감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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