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온 간병인임다.”
고작 백오십 미터의 강폭이 백 리는 돼 보였다. 국경경비대에게 매번 고양이 담배를 뇌물로 주고서도 오늘은 오십 달러나 더 얹어 주었다.
“지금 건너 가시오. 일을 마치면 꼭 다시 와야 하오.”
경비대원이 쑥 들어간 눈을 다른 쪽으로 돌리며 돈뭉치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평소 중국을 오가며 보따리 밀수를 해 왔던 터라 여러 차례 건넜던 강인데도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빛 한 줄기 비추지 않는 어두컴컴한 강이 마치 내게 가서는 안 될 길이라고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몇 시간째 이곳 혜산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목화솜 같은 눈이 점점 쌓이며 어두컴컴했던 강은 거대한 흰 이불을 덮은 것처럼 금세 모습을 바꿨다. 눈발에 시야가 가려 맞은편 중국 땅마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압록강의 겨울은 늘 이렇게 혹독하다. 가난한 나라에 뭐 이리도 살아갈 만한 일이 하나도 없는지, 날씨마저도 이 변변찮은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난리를 부렸다.
걸을 때마다 신발 안으로 눈이 들어찼다. 신발 속에서 녹아내린 눈은 두 발을 점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뻣뻣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내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발은 벌써 감각을 잃고 말았다. 영하 이십 도의 날씨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귀때기도 차디찬 강바람에 고막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뽀드득하는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원래 눈 위를 걷는 소리가 이토록 컸던가 싶을 정도로 발소리에 온 신경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다리를 서둘러 움직였다. 눈발이 거세질수록 앞으로 나아가긴 좀 힘들어도 주변의 시야에서 몸을 숨기기엔 딱 좋았다. 이쪽에선 국경경비대에, 저쪽에선 중국 변방대에게 최대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경경비대가 도강을 봐주기로 하고도 뇌물만 받고 총을 쏠 가능성도 있었다. 때론 느닷없이 보위부에서 탈북을 방조한 국경경비대를 잡으러 다니기도 한다고 하니 그것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돌아보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쪽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힘을 내어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장백 쪽 강둑이 보였다. 중국 쪽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일을 다 마쳤다는 듯 눈발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가려졌던 시야가 열리자 눈앞에 도로가 드러났다.
“살았구나...”
얼어붙은 입술이 겨우 내뱉은 첫 마디였다. 그제야 몸을 돌려 혜산 쪽을 보았다. 이제 다시는 가지 못할 땅 아니, 가서는 안 될 땅이 되어버린 그곳. 내가 ‘나’임을 증명해 줄 모든 것이 저 건너편에 있었다. 민족의 반역자. 그들은 이제 나를 그렇게 부를 것이고, 남조선으로 갈 때까지 누구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채 숨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제야 온몸이 쓰러지듯 내려앉았다. 그런데 너무 일이 잘 풀리면 더 조심하라 했던가. 주변이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졌다. 손전등이었다. 불빛 저 너머로 어렴풋이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위압적인 중국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중국 변방대였다.
또 그 꿈이다. 변방대에게 붙잡혀 북송당하는 꿈. 대한민국에 온 지 벌써 삼 년째인데 아직도 난 이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그날의 압록강을 기억하듯 바들바들 떨리더니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이분, 또 이러시네? 이봐요, 일어나 봐요. 눈 좀 떠 보라구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내 몸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가위눌린 것과는 또 다른 증상이었다. 의사는 이 증상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간단하게 명했다. 결국 불안증이 신체 증상을 만드는 것이기에 마음의 병인 셈이었다. 아주머니가 침대에 연결된 비상 단추를 누르고 곧 밤 근무를 서던 담당 간호사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신경 안정제를 투여하고 나서야 온몸이 물에 풀어지는 종이처럼 노곤하게 늘어졌다.
“이번 달만 해도 벌써 두 번째예요. 이거 원 불안해서 내가 안정제를 맞아야 할 판이라니깐. 아주 저럴 땐 내 심장도 벌렁벌렁해서 영 살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 상 치를까 싶어서. 그리고 북한 사람인데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아주머니가 간호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맘 상할 이유는 없다. 아주머니의 말마따나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한결 편안해진 몸을 슬며시 움직이다가 창가 쪽으로 돌려 누웠다. 해가 뜨려는지 블라인드 사이로 작은 불빛이 스며들었다.
시내 상가에 있는 이 요양병원은 시설이 노후한 까닭에 옆 병실에서 보는 드라마 대사까지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별 관심 없는 남의 가정사도, 치매 노인이 온종일 되뇌는 육이오 전쟁 무용담도 시도 때도 없이 벽을 넘어왔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찾아올 사람 하나 없는 내게 그건 어쩌면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한 가닥 생명줄일지도 몰랐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열흘이나 한 달이나 내겐 다 똑 같은 시간이지 않았을까. 흐르지 않고 꽁꽁 언 압록강 수면처럼, 아직도 그곳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내 의식처럼.
정부 보조와 교회의 도움으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여기가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병원이란 건 입원 후에 알게 되었다. 병실은 세 명이 같이 쓰는 구조였지만, 침상 하나는 비었고, 다른 하나는 지난주에 퇴원해서 이번 달은 독실 아닌 독실을 쓰게 되었다. 간병인 아주머니와 담당 간호사들 그리고 이곳에 입원해 있는 다양한 환자들은 내가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환자들과 자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니 실제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 건 간병인 아주머니와 담당 간호사들이 전부일 것이다.
“오늘은 새 간병인이 오실 거예요. 전에 일하시던 분은 개인 사정상 그만두셨거든요. 이번엔 양 목사님께서 특별히 추천해 주셨다던데. 괜찮으시죠?”
“네, 일 없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십시오.”
내가 긴장하지 않도록 건네는 말일 테지만 아주머니가 그냥 평범한 이유로 그만둔 게 아니란 건 말 안 해도 안다. 불규칙한 발작은 앞으로도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북한에 대한 인식 또한 하루 아침에 바뀌기 힘들 것이다.
어느새 병실 안이 온통 아침 햇살로 가득 채워졌다. 창 쪽으로 향했던 몸을 문 쪽으로 돌려 누었다. 의사 회진 시간이기도 했고, 새 간병인도 맞아야 하니까 나로서는 나름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삼십 분쯤 기다렸을까. 병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키는 백칠십 센티미터 정도, 마른 체형의 남자였다. 의사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 간호사들은 모두 여자이니 간호사일 리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는 인사도 없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누구세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무토막처럼 어색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 역시 몸을 일으켜 앉으며 계속 그쪽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위험한 게 들려 있는 건 아닌지 보려고 미간을 찌푸렸다. 침대보 위에 놓인 손이 나도 모르게 오그라들었다.
“새로 온 간병인임다.”
서울말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 북한 사람의 억양이었다. 처음엔 연길 사람인가 하다가 설마 하는 마음에 서둘러 비상 단추를 찾았다. 그런데 비상 단추를 누르려는 순간, 그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맞슴다. 나도 조선 사람임다. 하지만 남파공작원이나 그런 건 아이니 맘 놓으라요.”
“탈북잡니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점점 힘이 가해졌다. 그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이 손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 때마침 아침 식사가 배달되었다. 덕분에 내 손목도 그의 손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배식원에게 식판을 받은 채 얼음기둥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이 일이 처음인 게 틀림없었다.
“식판은 여기, 탁자에 올려놔 주시면 됩니다.”
침대 탁자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얼른 식판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냄새를 맡아보니 오늘 메뉴는 잡곡밥과 된장국, 가자미구이, 김치인 것 같았다. 식판이 탁자에 놓이면 가장 먼저 국그릇과 밥그릇이 내 앞쪽으로 잘 놓여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손을 테두리서부터 천천히 더듬어 갔다. 내 앞쪽에 국그릇과 밥그릇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가 식판을 거꾸로 놓았단 뜻이다. 좁은 탁자에서 식판을 돌리려면 약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양손으로 식판의 모서리를 잡고 천천히 반을 돌린 후 다시 다른 쪽 모서리를 잡고 나머지 반을 돌렸다. 그러자 드디어 국그릇과 밥그릇이 내 앞쪽으로 놓였다.
“눈은… 아예 몬 쓰는 기요?”
내 행동이 좀 어눌해 보였던지 그가 물었다.
“한쪽은 아예 못 쓰고, 나머지 한쪽도 형체만 겨우 알아봅니다.”
식판 오른쪽 끝 기다란 홈에 놓인 숟가락을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젓가락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북에서의 생활이 준 후유증 같은 거지만 뭐든 빨리 먹기 위해 편리한 쪽을 택한 것이 이젠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내 생존 방식이었다.
“어쩌다 기런 기요?”
그가 침대 옆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따르며 재차 물었다.
“그쪽도 다 아는 얘길 뭐 하러 묻습니까?”
대충 그렇게만 답하고 밥 한술을 입에 넣었다. 그다음엔 된장국을, 그다음엔 김치 한 조각을 차례대로 집어넣었다. 소고기를 넣고 끓였는지 된장국에서 아주 깊은 맛이 느껴졌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여준다던 고향의 구호가 생각나 밥 먹을 때마다 씁쓰름한 웃음이 났다. 전엔 당콩이나 강냉이 몇 알에 물을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을 먹던 때가 떠올라 목이 메는 날도 많았다. 어쨌든 뜻하지 않게 남쪽으로 내려와 그 소원을 이루었으니 내 팔자도 꽤 호사스러운 편이다.
“고향이 어디요?”
“양강도 혜산입니다. 그쪽은 어디서 왔습니까?”
“난 평양 출신임다. 기치만 남으로 오기 전까지 계속 혜산에 있었슴다.”
“같은 혜산이라면… 좁아서 알 수도 있겠네요. 저도 온 지 오래되진 않아서…”
“뭐… 아무리 좁다 해도 어데 다 알 수 있갔슴까? 나이도 열 살은 더 차이 나고.”
배추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그는 왜 쓸데없이 고향 얘길 해서 지금 명태 깍두기를 생각나게 하는 걸까. 그 시원한 맛은 대한민국에 와서도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의 배추김치는 뭔가 모르게 밋밋했다. 처음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 아닌 고생을 하기도 했다. 짜고 매운 양강도 음식에 비교해 이곳 음식은 지나치게 달았다. 하지만 그 맛에 익숙해지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맛이라 그런가, 입에 착착 감기는 것이 이젠 뭘 먹어도 다 가리지 않는다.
“남쪽 사람 다 되었구만요. 말투가 조선 사람 같지 않고 부드러워진 거이.”
“대체로 나처럼 십 대나 이십 대에 온 사람들은 이곳 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쪽은 어쩌다가 간병인 일을 하게 된 겁니까?”
“탈북할 때 도와주셨던 교회 목사님이 함 해 보라 캐서... 처음엔 그냥 남들처럼 용접이나 그런 기술을 배워볼까 했는데 적성에도 안 맞고…”
양 목사님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내게 줄 물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에선 뭘 했습니까?”
“꼭... 얘기해야 함까?”
“그저 궁금해서 한 번 물어본 거니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됩니다. 보위부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보위부’라는 말에 불편한지 몇 번이나 목 긁는 소리를 냈다.
국그릇을 들어 마지막까지 들이켰다. 윗배가 불룩하게 산처럼 올라왔다. 언제나 기분 좋은 포만감이다. 하지만 속 배는 크지 않았다. 평생 뭘 배부르게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가 뭘 넣어도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병원 밥은 양이 적당했다. 환자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런다고 들었다. 처음 하나원에서 나왔을 때 용돈으로 모은 오만 원을 가지고 동기 몇 명과 함께 고깃집을 찾았다. 다들 이제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여서 당장이라도 소 한 마리는 잡아먹을 수 있을 거라고 허세를 떨었다. 하지만 소 한 마리는 고사하고, 얼마 먹지도 못한 걸 온종일 화장실에서 쏟아내야만 했다. 참 미련스러웠다. 몸이 적응할 리 없었다. 다들 파리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다시는 고깃집을 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화장실 가게 팔 좀 받쳐 주겠습니까?”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근육 없는 다리가 힘없이 길가에 나부끼는 풀들처럼 흔들렸다.
“다리는… 어쩌다 기런 기요?”
“그거참… 다 알면서 뭘 자꾸 묻습니까?”
그는 그 후로 더 채근하지 않았다. 다리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하나원을 나와 반년 정도 배달 일을 했었는데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앞에 가던 트럭과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엑스레이를 찍어 본 의사는 혹시 내 다리가 교통사고 이전에 크게 다친 적이 있었냐고 물었다. 당시엔 북쪽에서 왔다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어려웠던지 그냥 일하다가 다친 거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의사는 그런 정도의 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건 마치 단단한 무언가로 심하게 타격을 받아 부러졌다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제멋대로 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그때 부서진 뼛조각이 아직 안에 남아 있어서 나중에 문제가 될 경우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 후부터였다.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건. 치료를 위해 일도 그만두고 매달렸지만,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눈도 점점 시력을 잃어갔다. 나중에 그것이 심리적 요인에서 오는 병이란 걸 깨달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악몽과 함께 발작을 일으켰다.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여기 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생각하다 보면 억울해서 또 하루를 살아냈다. 돈도 떨어지고 사람들도 떠났다. 장애 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이 병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내 사정이 알려지게 되면서 이 병원을 세운 교회에서도 후원해 주고, 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늘 그것을 내 처음이자 마지막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 병은 내게 행운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물론 행운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불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았는데 그건 견디기 힘든 통증 때문이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가증스러워졌다. 지금도 북쪽 사람들은 이따위 통증보단 배고픔을 더 견디기 힘들어 할 텐데. 그건 목숨까지도 바쳐야 입을 다무는 괴물이었고, 탄도미사일처럼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살해 무기였다.
“토대가 좋았습니까?”
“내 아버지가 당 일꾼이셨는데 윗분들과도 줄이 좀 있어서리 형님도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공부하고 그랬디요.”
질문에 답하는 그의 목소리가 좀 상승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내 다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물리치료사가 시간표에 맞춰 들르긴 하지만 수시로 주물러 주는 것이 갑자기 놀라 굳어진 근육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회진 때 의사가 말했기 때문이다.
“난… 적대 계층이었습니다. 내 조부께서 국군 포로셨거든요.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진작에 내려올 걸 그랬어요. 왜 거기서 그렇게 개고생하며 살았나 싶고…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기본 계층인 그쪽이 지금 이렇게 적대 계층인 내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가 조선이었더라면 이게 어디 가능한 일이냔 말입니다.”
“맞소. 기런데 태어날 때부터 토대가 좋음 뭘 하오? 내가 고등중학교 삼 학년 때 갑자기 형님이 반동분자로 보위부에 붙들려 갔댔슴다.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글을 학교에 써 붙였다는 게 형님의 죄명이었디요.”
“그래서… 온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로 간 겁니까?”
“아이요. 다행히 아버지께서 위에 엄청난 뇌물을 고이고서 겨우 빼 내오긴 했는데… 형님이 그곳에서 얼매나 맞았대던지… 사람 꼴이 말이 아니더란 말임다.”
말을 마친 그가 잠시 다리를 주무르던 손을 멈추고 코를 훌쩍였다.
“아직도 아버지께서 그날 형님에게 했던 당부를 잊을 수가 없슴다. ‘지도자 동지의 은혜로 목숨을 이어가게 되었으니부디 역적이 되지 말고 당과 수령님께 그 목숨 다 바쳐 충성하라.’ 딱 그리… 말했디요.”
“그래도 참 운이 좋았던 겁니다. 나처럼 가진 것 하나 없고, 토대도 안 좋았다면 당장 인민재판에 온 가족이 총살당한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형님은… 그날로 목을 맸슴다.”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내 다리를 주물렀고, 난 허옇게 페인트가 일어난 천장만 감정 없이 올려다봤다.
어릴 적부터 살던 하모니카 집이 떠올랐다. 울바자를 치고 총 다섯 세대가 살았다. 비 오는 날이면 늘 천장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땔감도 구하기 어려웠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위해선 온 가족이 다닥다닥 붙어 자야 했다. 부모님은 고난의 행군 때부터 내려온 이 지긋지긋한 가난이 다 그 김 부자 탓이라며 밤마다 수군댔지만 내 앞에선 말을 삼갔다. 혹 말이 새어 나가는 날이면 이 말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난 밤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참으로 괴상한 현상이었다. 낮에는 마치 세상에 둘도 없는 충성분자나 열성분자처럼 강변 빨래터에서도, 장마당에서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김 부자를 찬양해야만 했다. 이마저도 살 수 있는 건 장군님의 은혜네, 우리 공화국이 꿈꾸던 강성대국을 곧 이룰 날이 올 것이네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아마도 그건 좋지 않은 토대를 어떻게든 바꿔서 자식 살길이라도 열어주고자 하는 부모님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앞을 정성관리하기 시작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토대가 안 좋은 탓에 입당도 할 수 없는 내 처지가 피부에 흡수되듯 깨달아졌다. 폭설이 내리는 날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쓸고 또 쓸었다. 누군가 이런 나의 충성심을 알아봐 줄 날이 꼭 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런 대운은 내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이름이 뭡니까? 앞으로 같이 지내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민철이요.”
“좋은 이름이네요. 난 강성혁이라 합니다.”
“문 앞엔 ‘강바울’이라고 써 붙여 놨든데?”
“대한민국 와서 개명했습니다. 많이들 그렇게 하고 삽니다.”
“꼭 기래야 하나… 기래도 저 부모들이 지어준 이름 아이요. 기걸 기래 쉽게 버린단 말이오?”
그가 빈 침대에 걸터앉으며 작게 읊조리듯 말했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살아보고 싶은 것 아니겠습니까? 고향에서의 안 좋은 기억들은 다 잊어버리고.”
실로 그러기를 꿈꿨다. 이름뿐 아니었다. 여자 중엔 성형을 해서 얼굴을 바꾸는 사람도 많았다. 가장 바꾸기 힘든 건 말투였는데 평양말을 쓰던 사람은 억양이 심하지 않아 그나마 수월했다. 하지만 나처럼 북중 국경 지대에 살았거나 평양에서 지역이 멀어질수록 말투 고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양강도 말은 연길 사람들과 비슷해서 처음엔 그쪽 사람 아니냐는 말도 적잖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은 북에 있을 때부터 남한 드라마를 보며 몰래 연습해서 그런지 확실히 적응도 빨랐다.
남한 드라마는 빙두 같았다. 아마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단속원이 수거해 자기들도 보고 되팔 정도니 더 할 말이 있겠는가. 학교에서도 남한 동영상 유에스비가 돌았다.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이 자기 눈을 팔러 길거리로 나온다던 남조선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아주 달랐다. 너른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밤에도 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도시, 가난한 주인공의 집에서 배 터지게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 당 간부 같은 풍채를 자랑하는 배우들. 십수 년을 외워온 혁명력사, 사회주의 체제 교육 그 모든 걸 지우는 데 단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자려고 누우면 부모님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네에서 몰래 보고 들어온 남한 드라마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살며시 실눈을 떴다. 뚫린 천장으로 별들이 보였다. 그 위로 드라마 장면들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한 번도 극장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이보다 더 좋은 극장은 없을 것 같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만 벙긋벙긋하는 배우들의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나저나 남한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더 깊게 빠져들어서 그다음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될까 자꾸 궁금해지곤 했다.
“성혁 아부지, 내 중국 좀 다녀오면 아이 되오?”
“기게 갑자기 뭔 말인가?”
밤하늘에 그려지던 남한 드라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재빨리 눈을 감고 귀를 더 크게 열었다.
“쉿!”
어머니는 나를 의식하며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았다. 혹시라도 깨어있는 것이 들킬까 싶어 일부러 코 고는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래 있다 우리 다 허약으로 죽지 싶어 기럼다. 성혁이 좀 보십쇼. 아가 팔뚝이나 다리나 굵기가 매한가지 아님까. 기러지 말고 내 아이스 밀수라도 하믄…”
“아이스?! 이기 제정신인가. 그만 말하라.”
“좀 들어 보시오. 내 함흥서 그짝으로 줄을 대고 있는 보위부원을 하나 소개받았는데 뒤를 봐준다 안 함까.”
아이스라면 분명 빙두를 말하는 것이다. 빙두 밀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개처형에 처할 만한 중범죄 중 하나였다. 그런 일을 어머니는 왜 하시려는 걸까 이해가 잘 안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암암리에 빙두가 인민들 사이에서 거래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어머니가 어디서 그런 줄을 하나 잡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이스는 아이 된다. 우리 가족 다 죽게 할 일 있니?”
“어째 기러오? 기럼 우리 여기서 이래 살다 다 허약으로 죽을기요? 난 기래 못함다. 우리 성혁이 저래 말라가는데 어미가 돼 갖고 농마국수도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는 게 얼매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암까?”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소리 없이 벽 쪽으로 등을 돌려 누웠다. 그 뒤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묻고 끅끅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욕실엔 하얀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있다. 서서 씻을 수 없는 환자를 위해 제공되는 것이다. 벽에는 쇠로 된 손잡이도 박혀 있는데 환자가 어지럽거나 몸에 힘이 없어 쓰러질 것을 대비한 것이다. 목욕하려면 먼저 맨몸으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야 한다. 그건 내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 그래서 전에 일했던 간병인들도 날 씻길 때마다 내 몸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좀 보기 안 좋죠?”
옷을 벗고 의자에 앉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많이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도강하다 중국 변방대에게 붙잡혀 북송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생긴 상처들입니다.”
“기,기런 건 알고 싶지 않소. 말 마시오.”
몸에는 각종 상처가 그때 상황을 말해주듯 아우성치고 있었다. 상처들은 당시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기 때문에 울퉁불퉁 솟기도 하고, 패이기도 했다. 사실 잘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 사이에도 자세히 만져보면 함몰된 부분이 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하지만, 그토록 무서운 고문을 당했는데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좋지 않은 토대를 받고 태어났을 때도,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앞을 정성관리할 때도 오지 않았던 행운을 생사의 기로에서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괴물 같은 몸을 하고서 살아남은 것이 과연 행운일까 생각할 때도 많았다. 평생 공중목욕탕이나 수영장도 갈 수 없는 몸, 누구나 보고 싶지 않아 눈 돌리게 하는 몸, 불운을 기억나게 하는 몸, 고통의 뿌리를 깊게 박아 넣은 몸.
“눈 뜨지 마시오.”
그가 내 머리를 감기기 위해 위에서부터 샤워기로 물을 뿌렸다. 물 온도를 잘못 맞춰 약간 차갑긴 했지만 열을 식혀주듯 시원해서 좋았다. 한 손으론 벽에 달린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론 의자의 옆 부분을 잡고 몸이 쓰러지지 않도록 버텼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섬세했고, 부드러웠다. 특히 내 몸을 씻기다가 상처를 만났을 때 특히 그랬다. 그는 내 상처가 도드라진 부위를 씻길 때마다 무슨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멈추기를 반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생각이 궁금해져 눈을 더 꼭 감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삭이던 말이 궁금해서 그랬던 것처럼.
팔이 빠진 것 같았다. 팔뚝이 부어오르는데 마음대로 구부릴 수도 펼 수도 없었다. 뒤로 낮게 묶인 팔 때문에 무릎도 온전히 펴지질 않았다. 보위부 지하실에서 며칠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면 맞았고, 그러다 또다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사실대로 말하라! 니 남조선으로 가려고 도강한 거디?”
“아님다… 어머니를 찾으러 잠깐… 넘어간 검다. 차, 참말임다…”
“이 종간나 새끼, 더 맞아야 불갔구만. 더 치라!”
보위부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몽둥이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다음엔 팔, 다리, 몸통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후려쳤다. 순간 내가 사람이 아닌 짐승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차마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방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보위부란 곳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입안에서 검붉은 피가 침과 함께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한쪽 눈은 맞아서 부었는지 아예 떠지질 않았다. 나머지 한쪽도 겨우 떠지긴 했지만, 머리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액체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등을 내 쪽으로 해 놓고 때리는 통에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정신을 강하게 붙들어야만 했다. 보위부에 잡혀갔던 사람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어서였다. 다른 건 초범일 경우 으름장만 놓고 봐주기도 하지만 남조선으로 가다 걸리면 무조건 정치범수용소에 가서 죽든, 공개재판으로 처형되든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러니 살려면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말 잘 하라. 내 별명이 박새그든. 어데 가서 말로 져 본 적이 읍단 말이야. 내 말 한마디만 잘 하믄 니 당장 풀려날 수도 있디. 기러니 힘 빼지 말고 곱게 불으라. 니 남조선 가려고 했디?”
“참말임다… 선생님… 내 어머니를 찾으러… 잠깐.. 넘어간… 검다…”
마지막 힘을 다해 그 말을 하고 또 정신을 잃었다. 결국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 돌아왔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건 나가서 말하지 않겠노라 각서를 쓰고, 열 손가락을 다 찍고 난 후였다. 숨만 겨우 붙어있던 날 보며 아버지는 곧 죽겠다고 생각했단다. 산에서 약초를 뜯어다 상처 부위마다 붙이고, 죽을 입에 흘려 넣으며 내 곁을 지키던 아버지는 간간이 어머니를 향한 원망의 소리를 내뱉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에도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가라, 성혁아. 중국을 가든 남조선을 가든 가라. 니까지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거간? 어머니는 안 돌아온다. 기다리지 마라. 한족과 결혼해 중국에서 살고 있다고 엊그제 연길에서 소식이…”
아버지는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등을 돌리고 앉아 담배를 물었다. 어머니가 중국으로 가고, 나 역시 밀수를 했다. 국경경비대에게 뇌물을 주고도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가끔 돈주들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원하는 물건을 구해다 주거나 누군가를 만나 물건을 받아다 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중국에 갈 때도 말리지 못했지만 내가 밀수 하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못했다. 어차피 아버지가 장마당에 나가 돈을 벌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당할 처지도 아니니 먼 하늘 쳐다보며 애꿎은 담배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내 남조선에 가서 꼭 아버지를 모셔갈 검다.”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아닌 아버지가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후에 하나원을 나와 내가 사람을 보냈을 때, 아버지는 그곳에 없었다. 늘 정치범 수용소 갈 것을 두려워하더니 내가 떠나고 나서 바로 쥐약을 삼켰다고 했다.
“이기 다 뭐요? 남조선엔 상처 지우는 약은 없담까? 기술력도 좋다더니 다 후라이였구만.”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그가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머리 위에 수건이 덮였기 때문에 확실히 본 건 아니었다. 그는 내 몸을 큰 수건으로 말아 자기 어깨에 둘러멨다. 침대에 누워 생활하면서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 팔, 다리가 매한가지 굵기라 했던 어머니 말이 떠올라 고인 침에서 쓴맛이 났다. 내 몸이 다시 하모니카 집에 살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새 환자복을 입혀주는 그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물론 윤곽뿐이지만 거무스름한 피부와 도드라진 광대가 전형적인 인민군 얼굴이었다.
“이제 다 되었슴다. 누우시오.”
그가 수건을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티브이 좀 켜 주겠습니까? 좋아하는 드라마 할 시간이라.”
“조선에 있을 때 남한 드라마 많이 봤나 봄다?”
“네, 많이 봤죠. 그래서 여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처럼 밝은 눈으로 드라마를 볼 순 없지만, 귀로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숨어서 보지 않아도 되고, 이것저것 마음대로 봐도 잡아가는 단속원 하나 없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자유를 누리는 시간이었다.
“이 몸으로 뭐가 좋아 이렇게 웃고 있나 싶지요?”
“아니, 뭐 기냥…”
옆에서 날 가만히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서 던진 말이었다. 눈도, 다리도 성치 않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인 내가 요양병원 병실에 누워 드라마 재밌다고 실실 웃음이나 흘리는 꼴이라니. 참 한심해 보인다, 이러려고 탈북했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원망스럽지 않슴까?”
“무엇이 말입니까?”
“당신을 이리 만든 조국, 기리고… 당신의 몸을 이리 만든… 보위부원들.”
그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네, 원망스럽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내 부모는 왜 적대 계층이었을까. 그런 토대인 주제에 결혼은 왜 하고, 나는 왜 낳았을까. 그래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조국에서 맘 편하게 살지도 못 하고, 입당도 못 하고, 공부도 못 하게 했을까. 조국? 난 왜 이 나라에서 태어나 배불리 먹지 못할까? 왜 이 나라는 내 어머니를 중국 한족에게 팔려 가게 하고, 어린 나를 밀수꾼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난 왜 남한 드라마 한 편 보는 데도 소중한 목숨을 걸어야 했을까?”
내 말에 점점 감정이 실리기 시작하자 그가 가뿐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계속 말을 쏟아냈다.
“날 바닥에 집어 던지던 보위부원들… 난 아직도 그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구둣발로 찍고, 욕하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차고, 불로 지지고, 주먹으로 치고, 뺨을 때리고!”
겹겹이 싸고 여러 개의 상자 안에 봉해 가슴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감정들이 갑자기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제구실도 못 하는 눈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솟구쳤다. 이를 악다물었지만 끅끅 하고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날 밤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묻고 내었던 소리가 내 입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직도 말을 잘합니까? 별명이 박새라고 했던가요?”
내 질문에 그가 땅으로 꺼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눈이 이래서 잘 볼 순 없지만, 덕분에 귀는 남들보다 더 잘 듣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요. 신기하게 내 상처들이 당신을 기억하더군요. 상처의 주인을 알아보듯. 그리고 당신이 새로 온 간병인이라고 내게 인사했을 때, 난 당신이 그때 그 보위부원이란 걸 확신했습니다. 사람이 이름을 바꾸고, 얼굴을 바꿔도 목소리는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가 바닥에 머리를 대고 큰 소리로 울었다.
“미안함다… 정말 미안함다…”
다른 건 잘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인 내가, 모든 감각이 무뎌져 아무 판단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다. 그의 눈물은 거짓이 아니란 걸. 그의 사과도 거짓이 아니란 걸.
“이젠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때 그곳에 우리가 함께 있었단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이 불행의 시작은 나의 부모였을까, 아니면 조국이었을까, 나의 상처들은 그의 잘못이었을까. 만약 상황이 뒤바뀌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좋은 토대로 태어나 입당을 하고 보위부원이 되어 도강하다 끌려온 그를 만났더라면 난 달랐을까? 우리는 그저 끔찍한 시간을 함께 견뎌낸 피해자일 뿐이다.
병실 공기가 후텁지근하다. 여름이 오려나 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