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 그저 처방전일 뿐입니다.”
난 그를 먼저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오늘처럼,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지 않는 보통의 날이라면.
실가지에서 털어내는 계절의 가루만이 공기를 휘젓다가 신의 붓끝에 붙어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건 아직 성크름한 바람의 올을 잡아다가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꿰매어 놓기도 하고, 경쾌하게 돌바닥에서 발을 떼는 작은 새처럼 붙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날아갈 기세였다. 때론 예상치 못한 곳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그래서 검은색 새틴 모자를 쓴 나이 든 여자의 안경 속으로 들어갔다가 고양이 꼬리만큼이나 우아한 반동을 일으키는 요요를 타고 출렁이다가 적절한 시간만큼즐겼다고 생각되면 다시 돌아와 장난꾸러기 꼬마 녀석처럼 내 책장들을 온통 흩뜨려 놓곤 했다.
안 돼, 하고 책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흰 벽 앞에 놓인 테이블 쪽을 바라봤다. 동양적 문양이 휘감긴 장검 같은 그의 지팡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의자 다리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런 다음, 흔들어 놓으면 천천히 가라앉는 물속 모래처럼 둔한 동작으로 의자에 내려앉았다. 손을 들어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의 공기를 그러모으면 코 밑에 검은 송충이 두 마리를 붙인 웨이터가 벌써 다가와 있었다. 그 둘 사이엔 공연한 생각이 뻗어갔다. 그러다 금세 웨이터가 코 밑 송충이를 찌그러뜨리며 물병과 잔 하나를 둥그런 쟁반과 함께 내려놓았다. 철저하게 준비된 저녁이었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늘 궁금증이 까치발을 들었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차분하게 감겨있는 그의 속눈썹.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를 연상케 하는 앉음새. 수런거리는 주변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은, 초록색의 보색을 조명처럼 맞고 있는 그는 홀로 앉아 있지만 외로움의 그림자 따윈 끌고 다니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탁자를 피아노 삼아 올려놓은 그의 열 손가락은 또 어떤지. 흰 건반들을 차례로 늘어놓은 양 가지런하고 곧은 모양에서 이 석양을 물들일 음률이 막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들은 뒤꿈치를 들고 좌우로 몇 번 흔들리다가 드디어 찾을 것을 찾았다는 듯 잔 끝이 닿았다. 그의 입술을 감싸고 있는 작은 근육들이 미세하게 위로 당겨졌다. 기대하는 것이다. 익숙한 무언가를 반기는 동작임이 틀림없다. 그건 아마도 저 연둣빛 액체 탓이겠지.
그때 책장을 멋대로 휘저어놓았던 그 녀석이 다시 씁쓰름한 향을 안고 돌아와 코를 간질였다. 몇 번 숨을 멈추고 코끝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내 안에 있길 거부하며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폭발이었다. 그 바람에 책 사이에 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녀석에게 뺏기고 말았다. 수많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뚫고 들어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가슴께까지 열기가 느껴졌다. 난 이런 일방적인 주목에 익숙지 않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난감한 건 녀석이 내게서 빼앗아 간 종이를 그의 손등 위에 몰래 갖다 놓았단 것이다. 그의 고개가 사선으로 비틀리더니 다른 손으로 손등 위의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읽는 것 같진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종이 재질을 감별하듯 쓰다듬었다.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갔다.
“조용한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제 어지러운 생각이 바람에 날려 무례하게도 당신 손등에 닿아버렸네요.”
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갖다 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라고 생각했다.
“꽤 그럴싸한 입담이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이렇게나 자조적일 줄은 몰랐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한 수를 먹은 기분이었다. 더구나 그의 목소리는 덜 익은 호박을 찌른 것처럼 무겁고 단호했기에 더욱더 뭐라 함부로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어지러우면 잠시 앉았다 가게.”
그 말은 묘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런 심리를 반영하듯 나도 모르게 윗니 두 개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둘 사이엔 바람조차 흐르지 않았다. 움직이는 건 그의 열 손가락뿐. 그의 손가락은 종이의 윗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양쪽 모서리에서 멈춰 섰다.
“자네의 어지러운 생각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무례하단 말인가?”
“네? 아… 그저 처방전일 뿐입니다.”
“처방전?”
그의 감긴 눈두덩이 안으로 찰나의 생각이 꿀렁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가락은 양쪽 모서리에서 다시 아래로, 바닥까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의사인가? 평생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갖게 된 것들을 즐기며 연애편지나 쓰는 작자인 줄 알았네만.”
그제야 난 그가 왜 내게 그런 자조적인 태도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의사 축에도 못 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에 여기 나와 책이나 읽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술이나 마시게. 이런 때에 책은 무슨 책. 자, 자네의 것은 여기 있으니 가져가게.”
종이를 건네는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하얗고, 곧게 뻗어있었다. 난 혹여 그것들이 내 손에 닿아 오염이라도 될까 싶어 반대쪽 모서리만 살짝 집어 들었다. 그는 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아주 오래 해 온 일이라는 듯 물병의 끝은 단번에 잔 끝에 닿았고, 잔의 사 분의 삼을 채우고선 멈췄다. 그리고 그 중 십 분의 일 정도를 마셨다. 그의 입술이 사색에 잠기듯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우리는 시간의 뒷모습을 등에 업고 있었다. 성급하게 맨발로 달려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엉덩이를 쑥 빼고 앉아있지도 않은 매우 성실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꽤 복잡한 이론들이 철저한 규칙 속에 딱 오늘만큼만 지나가고 있다. 오늘의 나처럼. 혹은 그처럼. 그것도 잡념이다.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일종의 방편 같은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잔은 벌써 반이나 줄어 있었다.
“압생트를 마시는데 각설탕은 필요 없으십니까? 굉장히 쓸 텐데요.”
“쓰니까 마시는 거지. 단맛에 취하면 본디 맛을 잃어버리는 거라네.”
“본디 맛이란 게 그리 중요하던가요? 개인의 취향, 가치관의 차이, 시대의 변화. 그런 것들이 맛을 바꾸기도 하는데요.”
내 말에 그의 손가락들이 술잔에서 떨어져 나와 양팔을 휘감았다. 그러다가 가끔 멋쩍게 옷깃을 만지기도 했다. 까마귀 깃털 같은 그의 속눈썹이 바람 탓인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은 아예 보이지 않는 겁니까?”
“보지 않는 거지.”
“신에겐 당신을 향한,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자네의 어지러운 생각이 무례하단 그 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는 잔 안의 액체가, 둘 사이의 테이블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난 늘 이 시간에 이곳에 오네. 비가 오거나 눈이 오지 않는 날이라면 말이야.”
그 말을 마친 그는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단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씁쓸한 향이 번져갔다. 그가 동양적 문양이 휘감긴 장검 같은 지팡이로 딱딱 소리를 내며 골목을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향은 내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내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앞으로도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난 다음 날도 그곳에 갔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먹구름이 온 하늘을 담요처럼 덮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늘 앉는 자리가 아닌 흰 벽 앞 테이블에 앉아서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의 자리에선 골목 끝이 아주 잘 보였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기엔 아주 적합한 자리였다. 느닷없이 그 누군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눈길이 골목을 따라 내려갔다. 골목을 꺾어 돌면 큰 광장으로 연결된 길이 나온다. 얼마 전, 그곳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 불온물을 퍼뜨리고, 시민들을 충동질해 폭동을 일으켰단 이유에서였다.
“오늘도 어지러운 생각에 빠져 있나?”
그는 지팡이로 의자 다리를 서너 번 두드리며 먼저 말을 건넸다. 그 소리에 재빨리 나간 정신을 제자리로 당겨왔다.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몰랐는가? 이 자리는 내 자릴세. 예약석이란 뜻이지. 내 허락 없인 누구도 함부로 앉을 수 없단 뜻이기도 하고.”
어느새 코에 송충이를 붙인 웨이터가 다가와 물병과 연둣빛 액체가 든 잔 하나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자리에 앉은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물병을 들어 잔에 사 분의 삼 정도의 물을 부었다. 오늘도 역시 각설탕은 없었다.
“그러다 목구멍에 구멍이 뚫리겠습니다.”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면 의사로서의 권고인가?”
“상식입니다.”
“상식?”
그는 내 말에 더 고집을 부리듯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잔 바닥 가까이에 깔린 술이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렸다. 얼마나 쓴 술인지는 오래된 가죽 구두같이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이 모두 말해 주었다. 하아… 하고 내뱉는 숨 한 모금에서내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그 향이 났다.
“자, 난 이제 상식이 없는 사람이네. 어디 한번 내게 상식을 가르쳐 보게. 자네가 생각하는 상식이란 게 뭔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등이 길게 늘어났다. 그는 마치 나의 다음 수를 읽는 적군처럼 여유로웠지만 내 머리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을 마구 그려갔다. 입을 열어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간지럽게 목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 뭔가가 터져 나왔다.
“가설 단계에서 과학적 단계로 확립된 것입니다.”
내가 말해놓고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왜 이런 말을 그에게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좋네. 아주 좋아.”
그는 나머지 술마저 모두 입속에 털어 넣고는 오른손을 들었다. 잠시 후 웨이터가 잔 하나를 더 갖다주었다. 그는 다시 새 잔에다가 찬 물을 부었다.
“더 해 보게. 간만에 술맛이 나는군.”
그가 잔을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가능성에 대한 실험 말입니다. 처음부터 상식이었던 건 없습니다. 끊임없는 시도들이 결국 점점 더 분명해져 어떠한 결과를 낳는 것이죠.”
“어떤 시도 말인가?”
“가령 더 나은 시대를 열기 위한…”
거기까지 말했는데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내뱉는 말들이 천근 무게를 가진 것처럼 입술을 눌러댔다.
“왜 말을 뱉다 마는가?”
특이한 경험이었다. 커다란 닻을 달아 내린 것만 같았다. 그 입술은 아무도 가 보지 못했던 섬에 정박한 탐험선이었다. 푸르다 못해 거무스름한 숲이 내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어주었다. 그냥 휘어진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이었지만 그건 나의 호기심을 부르는 또 하나의 문이었다. 나의 고질적인 병이 얼굴을 들었다. 궁금해.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그건 내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을까. 어떠한 문명적 시도를 한다는 것이 이 미지의 섬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변수는 없을까. 그래, 이 실험을 위해 데려온 짐승들. 하지만 금세 다른 분위기의 장면들로 바뀌었다. 그들이 내 몸을 물어뜯는 것을 상상했다. 거칠게 찢어지는 내 살점들이 풀숲 작은 동물들의 먹이로 던져지고 작은 동물들은 게걸스럽게 그것을 먹어 치웠다. 아직 식지 않아 온기를 품고 있는 내 피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온 섬으로 번져갔다. 새로운 상식이 나를 먹어갔다.
“혹… 두려운 건가? 그 상식이 자네를 삼켜버릴까 봐.”
갑자기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훅 밀려들었다. 찰나였지만 눈꺼풀이 살짝 열려 그 내부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잿빛이었다. 흰자가 보이지 않았다. 전혀 수가 읽히지 않는 맹수의 눈빛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을 대변하듯 하늘에선 차갑고 이성적인 상식들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이틀간 비가 내렸다. 온종일 방안에서 종이를 자르고 또 잘랐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책 안에 끼워 넣을 수 있을 만한 종이였다. 너무 얇으면 잘 찢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에 꼭 정해진 종이를, 정해진 곳에서만 사 온다. 그렇다고 특수한 화학 처리나 왁스를 먹일 필요는 없다. 결국 신속히 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의 소용 가치면 된다. 그렇지만 며칠 후면, 이 종이들은 그 어떤 종이보다 특별한 종이가 될 것이다.
오후쯤 되니 빗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다. 창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여러 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달리는 소리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촛불마저 흔들렸다. 난 우선 종이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무거운 책들 몇 권을 종이 더미 위에 눌러놓았다. 그 견디기 힘든 무게에 눌려서도 새하얀 종이들은 멈추지 않고 아우성치듯 손을 흔들어댔다. 펄럭거리는 그들의 외치는 소리. 그것들은 과연 세상을, 어지러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 난 이 위에 무엇을 적어 넣어야 할까. 어지러운 생각이 방 안 가득 어둠으로 진동했다. 그 진동에 머리가 울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한 사람을 감당할만한 의자에 몸을 던져 넣듯 파묻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창문에서부터 시작된 잿빛 동그라미가 말발굽 소리를 내며 점점 가까워졌다.
“혹… 두려운 건가?”
나를 다그치는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목소리. 그건 굶주린 뱀처럼 바닥을 훑으며 기어 와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다리를 감아 오르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그것이 닿지 않도록 몸을 더 작은 구(矩)로 말아 넣었다. 양초의 불꽃마저 꺼져 가고 있었다. 심지서부터 퍼지는 파란색이, 노란색과 붉은색이 점점 검은색으로 졸아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피를 다 줄이고 나면 검고 하얀 혼만이 부둥켜안고 천장을 향해 사라져갔다. 의자를 감아 오르던 그의 눈빛과 목소리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난 모두가 떠나버린 텅 빈 방 안에 점 하나로 남아 눈을 감았다.
내가 다시 그를 찾았을 때 그는 테이블에 하얀 종이 몇 장을 꺼내어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매우 경건하기까지 해서 왠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내가 곁에 서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종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졸음이 올 지경이었다. 내 눈이 거의 끝까지 감겨갈 때쯤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턱이 바닥에 닿겠군.”
“제가 온 걸 알고 계셨습니까? 눈치라도 주지 그러셨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괜히 숨죽이고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자네를 찾는 환자는 없는 건가? 늘 이렇게 한가하니 그러다가 밥 굶겠네.”
“뭐가 되었든 풍요롭겠습니까, 요즘 같은 때에. 마지막으로 가을걷이한 게 기억도 안 나는데 세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니.”
“그래서 자네는 그것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의사 따위가 하긴 뭘 하겠습니까? 환자나 봐야죠.”
“어떤 환자?”
“썩어 문드러지는, 그런데도 자신이 썩어가는 걸 인지 못 하는 그런 환자요.”
“음… 그렇군. 하지만 주의하게. 썩어가는 것들 곁에 있다가는 같이 썩기 마련이니까.”
그가 중간중간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술은 십 분의 일씩 줄어들었다.
“이성은 지나치게 차가워서 통증에 무딘 법이라네. 예전에 전쟁터에서 그런 군인을 본 적 있어. 다리가 썩어 문드러지는데도 그는 고통이 없어 보였거든. 동상이라 그랬는지.”
“전쟁에 참전하셨습니까?”
“그럼, 당연히. 난 전령병이자 암호해독가로 훈련받았었다네.”
그는 깊은 명상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겸허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입술을 자꾸 달싹였다. 내게 해 줄 이야기가 있는 걸까. 흔한 남자들의 무용담 같은 거겠지. 귀부인의 꽃 달린 가발만큼이나 부풀려진 그런 이야기들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하품이 난다. 차라리 마을에 떠도는 어느 부루주아의 저당금 미불 문제나 불경죄 재판 이야기가 더 매력 있는 화제일지도 모른다.
“우리 군의 사령관은 항상 달콤한 이념을, 알아듣지 못할 말로 매일 우리 귀에 넣어줬다네. 그건 꽤 그럴싸했네. 음, 처음엔 분명히 그랬지. 하지만 그 달콤함에 벌레가 들기 시작한 건 얼마 못 가서였어. 연이은 작전 실패로 수많은 젊은이가 죽어 나갔네. 자넨 의사라고 하니 사람의 사체를 많이 봤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에겐 실로 충격이었다네. 누군가의 용기 있는 시도가 이뤄낸 결과물이 이토록 처참할 줄이야.”
그 말을 마치고 그는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점차 사람들의 윤곽이 어둠에 스미듯 사라져갔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진부하지도,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턱을 괴고 점점 그의 쪽으로 상체를 밀어 넣었다.
“달콤함에 대한 거부감이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군요.”
그는 내 말에 그냥 피식하고 웃었다.
“그렇게 그나마 남아있던 사기도 떨어져 가고 있을 무렵, 상부에서 출격 명령이 떨어졌네. 곧 비가 올 것 같단 판단에서였지. 우리 군에겐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네. 확실히 상대는 숫자로도 열세였고, 지대도 우리 쪽보다 낮아서 비가 내린다면 우리 군이 우세한 상황이었지. 하지만 두려웠네. 그들은 그저 삶을 위해 투쟁하다가 끌려 나온 노예나 다름없었는데. 이념이 뭔지, 왕정제가 뭔지, 입헌군주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어. 난 그들의 의미 없는 희생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내 멋대로 명령을 바꿔 전달했지.”
“그래서 그들을 모두 살리셨습니까?”
“이 사람아, 그랬으면 내 눈이 이 지경이 되었겠나?”
그가 호탕하게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그 뒷이야기는 왠지 안 들어도 알 것만 같았다. 난 이 이야기가 희극 같은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눈물 흘리는 광대의 분장처럼 모든 슬픔을 그려 넣은 웃음의 광기였다. 웨이터가 다시 잔 하나를 놓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물을 붓기 전에 자신이 쓰다듬어 보던 흰 종이 한 장을 내게 내어놓았다.
“이것이 무엇인지 한 번 보겠나?”
“흰 종이 아닙니까?”
난 종이를 받아 들며 되물었다.
“흰 종이지. 하지만 한 번 만져보게. 다른 종이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걸세.”
진짜 그랬다. 손끝으로 아주 작은 요철이 느껴졌다. 무슨 규칙이나 연속성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종이를 만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듯 많은 것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몰래 존재하고 있었다.
“네… 느껴집니다. 만져집니다! 이게 대체 뭐죠?”
“밤 문자라고 하네. 밤에는 전언을 불빛에 대고 읽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적에게 위치가 발각될 테니까. 그래서 종이에 요철을 만들어 손으로 전언을 읽을 수 있게 만든 거지. 일종의 군사 암호네.”
처음에 내 종이가 그의 손등에 떨어졌을 때도 그랬다. 그는 무언가를 종이 위에서 찾으려는 듯 손가락을 뻗어 더듬고 있었다. 난 그저 종이의 재질을 만져보는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는 종이 위에서 밤 문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 종이에 쓰여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니 그냥 적어 내린 일기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남기고픈 편지입니까?”
“그저… 처방전이네.”
“네?”
그는 놀라는 내 반응이 재미있는지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에서 그의 알 수 없는 결기마저 느껴졌다. 그러는 새에 또다시 술잔은 반이나 꺼져 들었다.
“그때 그 종이는 누구를 위한 처방전이었나?”
그건 분명 무례하고 어지러운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었다.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답했다.
“바로… 접니다.”
“음… 역시 그랬군. 부디 자네가 올바른 처방을 했길 바라네.”
그가 떠나고도 그 자리에 남아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점들이 까만 종이에 박혀 있었다. 그가 가르쳐준 밤 문자 같았다. 양손을 들어 별들 위에 얹었다. 멀리 있는 별들과 좀 더 가까이 있는 별들 간에 원근감이 생겨서 그런지 손가락에 요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하고 싶은 말은 과연 무엇일까. 전쟁 중 급히 전해야 하는 전언 같은 것일까?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의중마저 괜히 궁금해지는 밤이었다.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지 않다.
처방전으로 위장한 전언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그리고 그건 다시 소도시로 전해진다. 대부분 대도시와 소도시를 의심받지 않고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소매 장사꾼들이 이 일을 맡고, 모임 장소는 숙박업소나 농가의 버려진 헛간인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거국적인 봉기를 꿈꾼 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겐 돌려받아야 할 것이 있었고, 원래부터 가져야 할 것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생각에 함께 손잡아준 몇이 몇십이 되고, 몇백이 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늘어났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나도 바라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럴 계획은 아니었다. 난 아직도 지난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 일을 계획하고 이끌었던 자들은 즉결 심판을 통해 처단됐다. 매번 사건이 터질 때마다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 난 아직도 답을 구하고 있다. 이 일을 합리화할 명분이 필요하다. 인간의 목숨을 넘어설 가치, 공동 이익, 좀 더 진보된 이념 그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절대적 끌림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난 아직 망설이고 있다.
“이 골목에 대한 추억이 있는가?”
잠시 넋을 놓고 골목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마치 그런 나를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것처럼.
“네. 아주 용감했던 한 사람을 추억하고 있습니다.”
“추억은 촌스럽지 않네. 그건 기억 속에서 계속 진화하기 때문이지.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들은 언제나 새롭다는 뜻이네. 신기하지 않은가?”
“신기하네요. 정말 추억할수록 매번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잊혀 가는 까닭일까요, 아니면 환상을 덧입히기 때문일까요?”
“둘 다네. 내가 전쟁터에서 죽은 이들을 보며 느꼈던 충격은 점점 잊히는 까닭에 옅어지고, 나의 실수엔 환상이 덧입혀지기에 자기 합리화를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네.”
“어쨌든 둘 다 새로워지는 거로군요.”
새롭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처럼 저 멀리에 서서 지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기의 부피 탓에 겹겹이 쌓여 희뿌옇기만 한, 저 뭉개진 형상이 진화한 추억이라면 난 잡아야 하는 걸까, 놔 줘야 하는 걸까.
“아직도 두려운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경계가 모호해요.”
“이걸 보게.”
그가 내민 건 그의 술잔이었다.
“여기에 눈을 대고 나를 보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
난 눈높이를 잔에 맞추려고 머리를 좀 더 낮추었다. 연둣빛에 가려진 그는 신비롭기도 했지만 뭔가 모르게 주변 사물들을 모두 집어삼킬 것처럼 두렵기도 했다. 신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한 번 빠져들면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군요.”
“그런가? 하지만 조심하게! 두려움은 초록빛 눈동자를 갖고 있다네."
순간 수많은 요철이 피부 위로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야말로 침묵 속의 외침이었다. 난 그 서늘한 기운에 놀라 재빨리 양손으로 온몸을 비볐다. 내 몸에서 얼른 떨어내고 싶은 살얼음 같은 감정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나겠네.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아직 멀리 보이는 건물의 테두리가 벌건 시간이었다. 들어가 눕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고, 나가서 일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골목길을 따라 몇 걸음 걸어가는가 싶더니 뒤돌아서 내 쪽을 향해 외쳤다.
“내가 그 말 했던가? 자넨 의사일 리 없어. 자네에게선 소독약 냄새가 아닌 종이 냄새가 나거든. 다음엔 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게!”
벽돌 건물들에 그의 웃음소리가 부딪혀 몇 겹의 메아리로 돌아왔다. 맙소사! 내 눈은 반사적으로 주변을 단 일 초 만에 훑었다. 다행히 몇 사람 없었고, 모두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온몸에 솟았던 요철들도 깜짝 놀랐는지 쑥 들어가 버렸다. 이번엔 반대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름과 겨울 가운데서 한 발짝씩 넣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기분이었다.
내게 가장 두려운 건 밀고자다. 그런 부류는 한 사람만 죽이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지난 봉기 중 실제로 실행된 건수는 몇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밀고자가 그 가벼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재물의 유혹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책임을 지진 않을 것이기에 밀고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존재를 증명받는 것이다.
광장에서 죽어가던 그는 두렵지 않았을까, 밀고의 두려움이 그에겐 없었을까, 그의 용기는 어디에서 생겨서 광장으로까지 간 것일까. 난 끊임없이 질문했다. 새로운 시대의 커튼을 열어젖힐 혁명가는 어디에서 탄생하는 것인지 계속 물어야만 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 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게 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는 신이었을까? 인간의 두려움 따윈 애초부터 없었던 불멸의 신. 여전히 그가 궁금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벌써 돌아왔을 각 도시로부터의 답장이 아직도 돌아오질 않는다.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던 건 아닐까? 창문을 가린 커튼을 살짝 걷고 길 쪽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집 주위를 배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내 몸통을 움켜잡고 세게 쥐어짰다. 폐에서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벽난로에 땔감을 넣고 불을 붙였다. 땔감을 더, 더 많이 넣어 큰 불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흰 종이들을 서둘러 부어 넣었다. 순결한 색들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다. 마지막 종이 더미를 불 속으로 집어넣으려는데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일단 종이 더미부터 마저 불 속에 던져 넣고 발소리를 낮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열감기 환자처럼 심하게 떨렸다.
“듣고 계십니까?”
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쟁입니다. 계엄령이 내려져 징병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중요 인사 몇이 오늘 밤에 국경을 넘는답니다. 모두 흩어져서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비록 우리의 계획은 이룰 수 없겠지만 그들의 사기라도 꺾을 수 있다면! 후우…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꼭 뵙겠습니다.”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가 풀썩하고 꺾어져 내렸다. 방 안 열기에 눈앞이 아른거렸다. 어느새 불길은 벽난로 밖까지 그 폭력적인 팔다리를 휘두르고 있었다. 셔츠가 등까지 흥건히 젖고, 얼굴도 벌겋게 익어갔다. 전쟁이라니. 예상치 못한 변수다. 서둘러야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난 눈에 보이는 중요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래 봐야 고작 옷 몇 벌과 책 몇 권이 전부겠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다리가 내 다리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속도를 냈다.
건물 입구를 빠져나와 골목길로 달려 내려가는데 흰 벽 앞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시간이다. 지금은 원래 그가 나와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그는 이 시간에 그곳에 나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 인사할 시간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였다. 몸을 돌이키는 내 뒤통수를 향해 그의 목소리가 날아와 날카롭게 꽂혔다.
“그곳에 가면 넌 죽어!”
그건 끔찍하게도 단호했다. 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전쟁에 참전하게! 그리고 그 어떤 두려움이 온다 해도 절대로 그 초록빛 눈동자 앞에서 물러서지 말게! 받아들이게. 새로운 것들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네. 신에겐 자네를 향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걸세. 행운을 비네… 유고 마르땅.”
그 말은 너무도 강렬했다. 그래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끌림이었다. 내 모든 가치를 내려 놓을만한.
집 지붕 위로 몸집을 키울 대로 키운 불길이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그 불길은 말발굽 소리를 내던 그날의 창문도 삼켜버리고, 내 몸을 던져 넣었던 작은 의자도 삼켜버리고, 마침내는 내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어지러운 생각들마저 모두 삼켜버렸다.
가방을 붙들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에서 가방이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물동이를 들고 뛰어다녔다. 하지만 난 곧게 그를 향해 걸어 나갔다. 흐트러짐 없이 아주 반듯한 걸음으로. 난 어느 때보다도 멀쩡했고, 의지에 차 있었다. 내가 똑바로 걸어 그의 앞에 가서 서자 그가 내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하도 만져서 손때가 묻은 종이는 구겨지긴 했지만 찢어지진 않았다. 종이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 그건 분명 탄 내였다. 손으로 종이를 쓸어 내렸다. 작은 동그라미들이 요철로 나열되어 있었다. 그에게 배운 적 있는 군사 암호였다. 밤 문자. 내 손가락들은 진중히 그 내용을 읽어갔다.
‘출격 금지’
그가 썼을 네 글자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을까. 정말 그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을까. 갑자기 내 마음속엔 그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것 같단 이상한 신뢰가 생겼다. 어쩌면 그는 출격하라는 원래 전언과는 반대인 전언을 전하므로 수많은 젊은이를 살렸던 건 아닐까. 저 잿빛 눈동자가 그것에 대한 희생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내 앞엔 명상하는 철학자가 앉아 있다. 까마귀 깃털 같은 속눈썹을 꼭 감고 입술은 사색에 잠긴 듯 아래로, 아래로 점점 가라앉는다. 주변의 아우성 속에서도 그는 마치 신의 계시를 받는 듯 초연하게 손가락을 그러모으고 있다. 밝은 태양 빛이 그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다. 또다시 이 시대의 낮이 가고 저녁이 가고 밤이 가면 정확한 규칙 속에서 성실한 시간은 딱 하루만큼만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초록빛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고 자신의 감은 눈 뒤로 잿빛 눈동자를 숨길 것이다. 하지만 용기 있게 그것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을 것이다. 그런 다음 이 골목을 걸어 내려가 큰 광장 쪽으로 난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 걸음은 그의 손가락만큼이나 순결하고 곧을 것이다. 철저하게 준비된 저녁이다.
난 두려웠고, 답이 필요했고, 그렇게 보기 원했던 것들은 보지 못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보였고, 드디어 답할 수 있었고,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다.
오늘도 난 흰 벽 앞에 놓인 테이블로 향한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지 않는 보통의 날이라면 한 가닥의 시원한 바람이 되어 온 골목을 휘저어본다. 적절한 시간만큼 즐겼다고 생각되면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코에 검은 송충이 두 마리를 붙인 웨이터는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내 자리에 연둣빛 액체가 든 잔을 내려놓을 것이고, 사람들은 나를 추억하며 쟁반 위에 각설탕을 쌓을 것이다. 내가 꿈꾸던 시대의 향과 맛이었을 달콤한 영면의 소원. 살아있는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의 조화. 이곳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매우 희미하다. 난 그 곳에 늘 존재하지만, 또 존재하지 않는다.
어지러운 생각들이 선선한 바람에 흔들린다. 나는 언제나처럼 흰 벽 앞 테이블에 앉아 잔에 차가운 물을 사 분의 삼쯤 부을 것이고, 그중 한 모금, 그러니까 잔의 십 분의 일씩 나누어 마실 것이다. 달콤한 각설탕 따윈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단맛에 취하면 본디 맛을 잃어버릴 테니까.
동양적 문양이 휘감긴 장검 같은 내 지팡이가 주인 없는 자리를 홀로 지키며 흰 벽에 기대어 있다. 흰 벽엔 자세히 다가가야 보이는 둥근 요철들이 보인다. 손으로 그것들을 천천히 더듬어 본다.
‘붉은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출격하라 -유고 마르땅-’
그날도, 오늘도 이 골목을 꺾어 돌면 큰 광장이 나온다. 그곳에선 지금도 우렁찬 함성이 들려온다. 앞으로도 어지러운 생각을 상식으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혁명가들이 그 곳에서 탄생할 것이다. 삶은 늘 혁명을 필요로 한다.
추억은 촌스럽지 않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진화하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