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솔트 커피

오늘 밤, 난 미라화 작업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by Boradbury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추장스러운 소지품 따윈 챙기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 휴대전화 내용을 모두 지우고 통신사에 해약 신청을 했다. 상담원은 내게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플랜이 있다며 거듭 관심을 끌려 했지만, 그건 더는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인제 와서. 갑자기 억울하단 생각이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멈춰야 한다. 내 결심을 흔들 그 어떤 감정도 허용해선 안 된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준비한 확고한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선 안 되기 때문이다.

장소는 어느 여행 전문 블로거가 추천한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할 국내 여행지’에서 골랐다. 그의 말처럼 죽기 전에 꼭 가 보기 위해서였다. 막상 와 보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아직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곳이 아니어서 동네도 한적하고, 무엇보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해변과 그 해변을 따라 곱게 깔린 백사장이 그림 같이 예뻤다. 나도 이 풍경 속에 점 하나로 남는다고 생각하니 꽤 낭만적인 죽음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 마지막 날을 기록하기에 적당한 온도, 적당한 바람 그리고 잊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던 저녁 식사까지. 물론 평생 내 돈 주고 사 먹을 것 같지 않았던 큰 집게발을 가진, 빨갛게 익은 갑각류에 내가 가진 전 재산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것 말고는 뭐 하나 나쁜 것이 없는 완벽한 날이었다.

시간을 밤으로 정한 건 해변으로 밀려들다 사라지는 파도 소리를 세밀히 듣기 위해서였다. 그건 어떠한 레퀴엠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내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해줄 것만 같았다. 그 소리가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천국일 거라는 기대감마저 들었다. 맹목적인 믿음도 이렇게 생기는 걸까? 인식의 변화가 다양한 생각이라는 부산물을 낳아 내게 안겼다. 비록 나 혼자만의 의식이 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간의 본질은 혼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외롭다고 눈물 흘릴 이유도 없다.

해변의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에 정성을 다했다. 발뒤꿈치서부터 엄지발가락까지 아주 천천히 모래에 닿도록 발바닥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발바닥이 이렇게 예민한 부위였던가 싶을 정도로 가는 모래의 질감이 전신으로 느껴져 왔다. 발톱과 발가락 사이에 낀 몇 톨의 모래 알갱이는 싫지 않을 정도, 딱 그만큼의 불편을 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콘크리트 속에서만 살던 내가 자연에서 느끼는 일종의 이질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꿉꿉한 짠 내를 품고 있었다. 면 소재의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가 바람을 따라 깃발처럼 펄럭였다. 귀밑까지 내려 기른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날리다가 얼굴을 몇 차례 후려쳤다. 아팠다. 통증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렇기에 이 또한 곧 사라질 현상이다.

아버지. 내 생물학적 아버지. 그래도 나름대로 명망 있다고 인정받는 사내.

왜 갑자기 그 인간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 중요한 순간에. 나 대신 형을 데리고 떠나버린 어머니에게도 원망하지 않았던 나였다. 되레 잘난 척하던 형을 내 옆에서 치워준 어머니에게 감사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왜 그리도 그 인간을 떠나고 싶어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가해지던 폭력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이유로, 어느 날은 자기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때로는 내가 알 수도 없는 갖가지 이유로 폭력이 가해졌다. 그것보다 더 소름 끼치는 건 내가 그 감정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데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설마 나도 그 인간처럼 되어가는 건가. 그렇다면 더욱이 여기서 그 유전자의 계승을 멈추게 해야 한다.

집을 나왔다. 나름의 몸부림이었고, 반항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진짜 지옥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건 이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시간제 알바로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았다. 아파서 하루를 쉬면 그날은 굶어야 했다. 이런 날을 이어가는 게 점차 무의미로 다가왔다. 노력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건 ‘포기’란 단어뿐이었다.

죽음을 맞는 게 두렵지 않았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보단 나을 것이고,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니 사후세계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난 나 자신을 미라화(Mummification)시키기로 했다. 대뇌 반구를 뚫고 전두엽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내 모든 장기는 바깥으로 꺼내졌다. 허파를 꺼내고 나니 그 인간과 같이 숨 쉬지 않아도 되었다. 위장을 꺼내고 나니 먹는 즐거움도 사라졌다. 콧구멍으로 뾰족한 갈고리를 넣어 뇌수를 모조리 다 끄집어냈다. 정신이 사멸되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디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연 현상을 내게서 기대하지 않아도 됐다.

오늘 밤, 난 미라화 작업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 몸에 소금을 부어야 한다. 원래는 나트론을 붓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바닷소금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을, 무려 사십 일 동안 내 몸 안팎으로 넣고, 덮어 방부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난 그보다 더 실용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아예 바닷물 속에 내 몸을 수장하기로 한 것. 그러면 붕대를 감을 필요도, 향유와 송진 범벅이 될 필요도 없다. 혹자는 그러면 미라화의 의미가 무엇이냐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미라는 본디 사후세계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그저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 속에 포함된 하나의 물질로 남겠다는 건 그와 똑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말린 생선처럼 쪼그라들어가는 대신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자연의 절대적 영원성을 갖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중요한 순간에 아버지, 그 인간이 생각난 건 아마도 내 뿌리가 거기서 왔기 때문이지 싶다. 또 다른 시작을 하기 위해 이전 세계를 정리하는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그 문제의 뿌리가 끊어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난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차가운 바닷물이 발끝을 쓸고 지나갔다. 애써 힘들게 걸어 내 발은 바다의 제일 바깥 선에 닿게 되었다.

파도가 이 선을 절대 넘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내가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이런 장황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리를 움직여 계속해서 바다의 중심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갔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잠기고, 허리가 잠겼다. 몸이 물속으로 잠겨갈수록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젠 팔을 휘적거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우주인이 달에서 걷는 것처럼 느린 동작으로 걸어 나갔다. 힘을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곧게 나가려는 내 다리를 물 밑 수류(水流)가 강하게 휘감아 저지할 뿐이었다.

가슴이 잠겼다. 숨이 차올랐다. 허파를 다 꺼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게 숨이 붙어 있는 게 의아했다. 어깨가 격하게 오르내렸다. 다리는 자꾸 물에 떠 올랐다. 이젠 내 의지가 아닌 바다의 힘으로 몸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 주도권을 뺏긴 내 몸은 파도에 농락당하듯 물속으로 잠겼다 떠오르길 반복했다. 발이 이제는 바닥에 닿지 않았다. 입과 코로 바닷물이 들이쳤다. 짜다 못해 쓴맛이 났다. 그것을 몇 번 삼키고 나니 구역질이 났다. 소금물을 마시자 내 몸은 반대로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눈에서도, 코에서도, 입에서도, 어쩌면 다른 구멍에서도. 난 몸 안 수분을 모두 토해내고 미라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발버둥 칠수록 오히려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런 주파수도 잡지 못한 라디오처럼 단일음만이 귓가에 삐 하고 울렸다. 응급실의 차가운 침대 위, 죽어버린 환자의 심음 같았다. 물속은 파도가 치지 않아 그저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는 마음의 평온을 주지 못했다. 수면이 점점 더 머리 위로 멀어져 갔다. 허파가 찢어져 나갈 듯이 졸아들었다.

살려줘! 살고 싶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머리와 가슴이 뜨거운 것으로 다시 채워졌다. 하지만 몸은 점점 더 뻣뻣해져만 갔다. 난 이대로 미라가 되는 걸까? 졸아들고, 졸아들다가 밴타블랙보다 더 어두운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게 된다면 수많은 물고기의 배를 채우고, 다시 배설된 후 한낱 형체 없는 바닷속 부유물 중 하나가 되는 거겠지. 난 원래 내가 바라던 게 이런 거 아니었냐고 나 자신에게 재차 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뜻밖에도 내 안의 무언가가 강렬히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 난 그제야 살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이 가진 욕구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살고 싶었다.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듣는 이 하나 없는 물속에서 마음으로나마 열심히 파동 에너지를 내보냈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팔다리와 함께 몸은 점점 더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내 입은 최선을 다해 웅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신이든, 돌고래든, 누구든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내 목소리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수분(數分)이 지났을 때, 생명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팔다리가 더는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껍데기만 남아있는 미라처럼, 생명을 잃은 존재가 원래 다 그렇다는 듯,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그저 공간에 떠 있기만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만나는 환상 같은 것이었을까? 찬란한 빛에 휩싸인 커다란 고래 같은 것이 점점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난 다시 바다의 제일 바깥 선에 누워 있었다. 손에 모래 알갱이가 만져졌다. 사후세계인가? 난 진정 죽은 것인가? 눈을 돌려 바다 쪽을 봤다.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 빛이 수면 위에 서서히 번져갔다. 뇌가 뜨거운 물에 푹 삶아진 것 같았다. 사고가 정지된 상태. 문득 간절히 살고 싶다고 외쳤던 게 떠올랐다. 삶이라는 게 얼마나 강한 욕구인지. 그건 마치 가래가 목구멍에 찐득거리게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한 불가결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물 먹은 티셔츠가 바위처럼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입이 썼다. 소금물을 많이 먹은 탓일 거다. 바람에 마른 팔과 다리를 손으로 문지르자 고운 소금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얼굴에서도, 귀 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십일 간 나트론에 묻혀있다가 소생한 미라 같았다. 목이 껄끄러웠다. 한껏 목구멍을 긁어 올려 침을 뱉었다. 게거품 같다.

주위를 둘러보다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간판 대신 붙어있는 푸르고 커다란 덩어리 그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건 물고기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홀린 듯 그 앞에 가 섰다. 가게 이름은 안 쓰여 있고, 달랑 큰 물고기 그림 하나만 박혀 있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지 늙은 개 한 마리가 나를 보며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개는 가게 울타리 안에 있었다. 노란색 지붕을 얹은 개집에 ‘피터’라고 명패가 붙은 거로 보아 수컷임이 틀림없었다. 생김새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는데 셰퍼드 얼굴에 웰시코기 같은 짧은 다리를 붙여 놓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혼합종이지 싶다. 그 개는 어디선가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오자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멈췄다.


“무슨 일이야? 이른 아침부터 전투태세를 하고.”

“못 보던 녀석이야. 도둑일지도 모르지.”

분명 개와 갈매기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난 깜짝 놀라 개집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번쩍하고 전류가 흘러내렸다. 잘못 들었나?

“딱 보니 도둑은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잘 봐. 총도 없고, 칼도 없고, 복면을 쓰지도 않았고, 심지어…… 잘생겼어.”

“뭐? 어디가 잘생겼다는 거야? 내 보기엔 뱀 눈을 한 게 딱 욕심이 많은 상이야.”

“잘생긴 남자는 무조건 아니야. 할아범. 내 경험상.”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저 갈매기는 분명 늙은 개에게 할아범이라고 불렀고, 개 할아범은 내 눈이 뱀 눈 같아 욕심이 많은 상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맞다. 난 지금 죽어서 사후세계에 와 있는 거다. 사후세계가 아니라면 이런 일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빅 피쉬겠지?”

개 할아범이 갈매기에게 속삭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고서야 저 꼴을 하고 여기 서 있진 않겠지.”

갈매기가 개밥그릇에 들어 있는 마른 사료 몇 알을 몰래 부리로 낚아채 삼키며 말했다.

“삼 년 전 미라 같네.”

“사 년이야, 할아범.”

“벌써 그렇게 됐나?”

“죽을 때 됐어? 상조 보험은 들었고? 요즘 반려견 문화가 좋아져서 그런 것도 있다던데. 걱정하지 마. 할아범 장례식에 참석은 해 줄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정말 고마워. 아니지, 근데 이 녀석은 꼬박꼬박 반말이야? 내 나이가 올해 자그마치 열일곱이라고!”

“우리가 뭐 인간이야? 위아래는 따져 뭐하게?”

개 할아범이 분한지 갈매기에게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날개 달린 갈매기가 먼저 공중으로 몸을 피해버렸다.

“괜히 힘 빼지 마. 곧 미라가 나올 시간이야. 미라가 맛있는 닭고기 통조림을 주면 그때 다시 올게.”

갈매기는 내 머리 위를 빙글 한 바퀴 돌아 사라졌다.

딸그랑. 구슬 굴러가는 소리에 다시 시선을 문 쪽으로 돌려왔다. 가게 문에 걸린 작은 종에서 난 소리였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온 건 하늘색 앞치마를 두른 한 여자였다. 개 할아범과 갈매기가 말하던 ‘미라’라는 사람일까? 그녀는 흠칫 놀랐다가 다시 찬찬히 위아래로 날 훑어봤다. 그러곤 내게 첫 마디를 걸어왔다.

“아직 아침 공기가 차요. 어서 들어오세요.”

개 할아범은 여전히 내가 못마땅한지 열과 성을 다해 짖어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개 할아범에게 이따가 맛있는 닭고기 통조림을 갖다 주겠노라 말하곤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픈 사인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개와 갈매기의 말도 알아들을 수 있고, 말 걸어주는 여자도 있는 사후세계는 참 재미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현세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들어도 좋으련만.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고, 착각이었다.

“악!”

난 얼른 오른발을 들어 발바닥을 확인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모래에 섞여 있었나 보다. 발바닥은 금세 붉은 피를 뚝뚝 흘렸다. 아린 통증이 발바닥 전체에 방사됐다. 젠장. 하고 내뱉다가 순간 왜 통증이 느껴질까에 대해 강한 의문이 생겼다. 사후세계라면 통증이 없어야 한다. 통증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경고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의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을 다르게 던져야 한다. 기본 설정값을 바꿔 넣어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이곳은 사후세계인가? 아니다. 현세다. 난 다시 살아 돌아왔다.


가게 안은 여덟 개의 작은 나무색 테이블과 색이 다른 둥근 의자들로 꾸며져 있었다. 난 그 중 파란색으로 칠해진 의자에 앉았다. 젖은 옷을 입은 맨발의 청년이 앉기에 적당한 구석 자리였다. 그제야 내가 어떤 꼴인지 눈에 들어왔다. 민소매 티셔츠는 어디에서 찢긴 건지 옆구리가 반쯤 뜯어져 있었고, 반바지엔 이름 모를 해초가 붙어 있었다. 그걸 슬쩍 떼어 버리려는데 그녀가 주방에서 나왔다.

“저희 가게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예요. 뜨겁진 않으니 어서 드세요.”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다가 그녀의 이름표를 봤다. 나미라. 그녀의 이름이었다. 개 할아범과 갈매기가 말하던 미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미라는 장기를 다 빼고, 나트론에 절여 붕대와 향유, 송진으로 마무리한 이집트의 유물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난 이 세상의 또 다른 미라를 대하고 있다. 그녀는 생기 있는 미소를 띠며 자꾸 내게 말을 건넸다.

“춥지 않아요? 수건하고 담요를 가져다 줄게요. 소금기를 닦을만한 물수건도요.”

그녀는 내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하얀색 도자기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의 긴장을 풀어줬다. 비로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게 안을 좀 더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천장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스웨디시 아이비와 가게 곳곳에 고무나무, 행운목 같은 관엽식물 화분들이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마다 놓인 작은 다육식물들, 화병에 꽂아 둔 여러 종류의 꽃들도 저마다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게는 마치 작은 식물원 같았다. 난 천천히 컵에 꽂힌 두꺼운 빨대에 입을 갖다 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익숙하지 않은, 그건 짠맛이었다. 나도 모르게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설탕을 넣는다는 걸 착각해 소금을 넣은 것으로 생각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가 재등장했다.

“먼저 이 물수건으로 얼굴이랑 목, 팔, 다리를 좀 닦으세요. 소금기가 몸에 오래 묻어있으면 좀 불편할 거예요. 저희 가게엔 샤워 시설이 없어요. 그러니 이걸로라도 대신 닦아야지 어쩌겠어요?”

물수건을 건네는 미라의 손목에 팔찌처럼 두른 문신이 보였다. 한여름인데도 목에 두른 스카프 안으로 손목의 것과 비슷한 문신이 보였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문신이었다면 그녀가 굳이 스카프로 목을 가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내 머리는 이미 그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녀도 빅 피쉬를 만났을 것이다.


그녀는 내가 물수건으로 몸을 다 닦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른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다시 내가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다 닦아내자 담요를 펼쳐서 등에 둘러주었다. 젖은 옷 때문에 떨어지던 체온이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커피 어때요? 제이의 솜씨는 이 동네 최고죠.”

“좀…”

“좀?”

난 조금 쉬었다가 답했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배려에 어린 애 같은 투정을 부리긴 싫었다.

“죄송하지만… 설탕이 아니라 소금을 넣으신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난 혹시 그녀에게 실수한 건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아, 죄송해요. 매번 손님들이 같은 말을 해서요. 커피를 낼 때마다 뭔가 손님을 골탕 먹이는 것 같다고 할까요?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그걸 즐기고 있더라고요. 이 손님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난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뭐? 그런데 뭐? 아마 그런 표정이었을 거다. 그녀는 그런 내 얼굴을 쳐다보며 벽에 몸을 기댄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커피 위에 얹은 게 그 비밀의 정체죠. 씨솔트 크림이에요.”

그녀의 말에 커피 위에 얹어진 구름 같은 하얀 크림을 내려다봤다.

“저 역시 제이가 처음 이 커피를 건넸을 때, 뭐야 이 맛은? 그랬거든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짠맛이 첨가되니 단맛이 더 또렷이 살아나더라고요. 다시 한번 맛을 봐 봐요.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이론적으론 맞는 말이었다. 수박에도 설탕보단 소금을 뿌려 먹어야 상대적으로 단맛이 강해지는 것이니까. 난 다시 한번 빨대를 쭉 빨아보았다. 처음엔 짠맛만 나던 커피가 점점 단맛과 쓴맛이 어우러져 깊은 맛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소금은 염증을 치료하죠. 당신 안에 곪아있는 것들도 모두 치유되길 바라요.”

그녀는 이미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마치 중앙 서버로 모이는 빅데이터처럼.

그때, 주방에서 한 남자가 나와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저분이 이 카페 오너인 제이예요.”

그녀의 소개에 제이라는 남자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삼십 대 초반 정도에 곱실거리는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에 관여하지 않고, 방해하지도 않으려는 듯 테이블과 먼 쪽의 식물들부터 물을 주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훈남 정도는 되어 보였다. 다부진 체격에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까무잡잡한 잔 근육이 물결처럼 부드럽게 요동쳤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꽃이나 나무들이 생기를 얻는 것 같았다. 식물들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안다더니 정말로 그런 듯했다.

“오너께서 인상이 참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서 그런가? 커피 맛도 훌륭하고요. 아침엔 손님이 별로 없어요. 천천히 마셔도 돼요. 전 피터 밥 좀 챙겨 주고 다시 올게요.”

개 할아범의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나 보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주방에 들어갔다.


아침 해가 벌써 수면 위로 떠 올라 있었다. 바닷가엔 이른 시간부터 산책하는 연인이 보였다. 뭔가 어제보다 다른 느낌의 풍경이었다. 원래 나뭇잎이 저렇게 춤추듯 흔들렸었나? 햇살은 원래 저렇게 눈부시게 반짝였었나?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나의 오감들이 예전보다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것들과 좀 더 친밀하게 교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통조림을 들고 돌아왔다. 문에서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자 찬 기가 가신 온풍이 안으로 훅 들어왔다. 개 할아범이 배를 뒤집고 누워 꼬리로 바닥을 쓸어댔다.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 닫히지 않게 받혀두곤 개 할아범의 배를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약속대로 갈매기가 가게 위를 한 바퀴 휘 돌아 개집 위에 내려앉았다. 갈매기가 노리는 건 닭고기 통조림일 것이다.

“나잇값도 못 하는 할아범 같으니라고. 바닥에 배 발랑 까뒤집고 누워서 귀염 떠는 꼴이라니.”

갈매기가 개 할아범에게 못마땅하다는 듯 빈정거렸다. 개 할아범은 못 들은 척 계속 재롱을 떨었다. 그러자 그녀는 가져온 닭고기 통조림을 밥그릇에 옴팍 다 부어주었다. 그러곤 다시 문으로 들어와 주방으로 사라졌다. 갈매기가 밥그릇 가까이 내려와 앉았다. 개 할아범도 코를 킁킁거리며 밥그릇에 머리를 박았다.

“역시 고기는 닭고기가 최고야. 이런 날은 누가 마시다 버린 소주라도 홀짝거려야 하는 건데.”

“아주 팔자 늘어진 갈매기로군. 혹시 자기가 갈매기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건 아니지?”

“그걸 말이라고 해? 할아범이야말로 제이에게 입은 은혜를 잊어버린 건 아니지? 요새 보면 미라에게만 너무 애정을 몰아주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갈매기의 말에 개 할아범이 밥그릇에서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 틈을 노려 갈매기가 밥그릇에 부리를 꽂았다.

“그걸 잊으면 내가 개가 아니라 갈매기지! 제이가 아니었다면 난 이미 누군가의 밥상에 올랐을 거야. 그날, 돈 주고 나를 산 손님은 따로 있었어. 그래서 개장수가 팔 수 없다는 걸 제이가 더 많은 돈을 주고 날 데려왔지.”

개 할아범은 추억에 빠진 듯 밥그릇을 뒤로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너도 제이가 살려줬다며.”

갈매기가 부리로 낚아챈 닭고기 한 점을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겨 삼켰다.

“난 다 먹었어. 이제 할아범 먹어.”

개 할아범은 벌써 입맛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힘없이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갈매기는 그런 개 할아범을 한 번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그땐 내가 막 날갯짓을 배울 때였어. 워낙 다른 형제들보다 호기심이 많아서 사람 구경 나왔다가 바닷가에 널어놓은 그물에 발이 걸려버린 거야. 어떻게든 벗어나려 해 봤는데 어려서 요령도 없고, 버둥거릴수록 그물에 더 심하게 엉켜버렸지. 그때 제이가 나타나서 내 발을 빼 줬어. 큰일 날 뻔했지.”

“그랬군. 오래전 일인데도 엊그제같이 생생해. 신기하지?”

“그러게나 말이야. 오늘은 산책하러 안 나가?”

“몰라. 가게 안 바쁘면 미라가 오후에나 나가주겠지. 그런데 이젠 관절이 쑤셔서 나가기도 싫어.”

“그래도 관리해야 해. 미라한테 할아범 관절 영양제 좀 사다 주라 해야겠군.”

“미라가 우리 말을 알아들어?”

“누가 알아듣는대?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지. 이 바보 같은 할아범.”

“머리?”

“저번에 옆 동네에 있는 동물병원에서 봤는데 개가 먹는 관절 영양제를 팔더라고.”

“넌 인간 말을 모르는데 그게 개 관절 영양제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인간 말을 하진 못하지만, 그림은 볼 줄 아니까. 거기 광고지 붙여 놓은 걸 보니 그런 것 같더라고. 그 광고지를 아예 떼어다가 미라 앞에 가져다줘야겠어.”

“그래도 내 걱정해 주는 건 갈매기, 너밖에 없네.”

말을 마친 갈매기는 개 관절 영양제 광고지를 뜯으러 옆 동네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갈매기가 떠나자 개 할아범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느새 컵의 바닥이 보였다. 인생도 이 씨솔트 커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쓴 시간과 짠 시간이 있기에 인생의 달콤한 시간이 더 달콤해지는 게 아닐는지. 또한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게 아닐는지.

“다 마셨네요?”

“네. 잘 마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돈이 없어서…”

“괜찮아요. 우리 카페엔 특별한 규칙이 하나 있는데 첫 손님에겐 공짜 커피를 제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커피는 공짜.”

“아, 고맙습니다.”

도대체 이 카페에 들어와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째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엔 자존심 때문에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던 내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고맙다는 말을 그녀에게 반복해서 쓰고 있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폐를 끼치면 안 될 것 같네요. 다른 손님들도 올 텐데 이 꼴을 하고 가게 안에 앉아 있으면…”

“그럼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녀가 한 번쯤은 잡아줄 거로 생각했다. 그건 참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날 누구라고 잡아줄 것이며 오늘 처음 본, 그것도 거지 같은 차림새로 나타난 내게 호감을 느낄 수도 없지 않은가. 난 그녀에게 무엇을 기대한 건가. 민망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잠시 잊고 있었다. 발바닥에 난 상처를. 처음엔 개 할아범과 갈매기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그다음엔 미라, 그녀의 생기 있는 표정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상처도 잊고 있었다. 내 외마디 비명에 고무나무 잎사귀를 헝겊으로 닦고 있던 제이가 얼른 돌아봤다.

“어머, 발 다쳤어요? 어디 좀 봐요.”

“괜찮아요. 별거 아녜요.”

내 발을 만지려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정작 내 발을 만진 건 다름 아닌 제이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제이의 손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의 손이 내 발에 닿자 한없는 평온이 밀려왔다. 그의 손에도 흉터가 있었다. 제이는 날 의자에 다시 앉혔다. 그런 다음 알코올 솜으로 상처 부위를 닦고, 약을 바른 후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게 뒤편에 가서 자신의 샌들 한 켤레를 들고 오더니 내 발에 신겨 주기까지 했다.

갑자기 그 인간 생각이 났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 그래도 나름대로 명망 있다고 인정받는 사내. 나의 슬픔의 뿌리. 상처의 근원. 동시에 내 생명의 시작점. 갑자기 샘이 터지듯 목이 메더니 감정이 폭발해 버렸다. 나 아팠어. 그래, 나 아팠어. 힘들었던 순간마다 전혀 괜찮지 않았어. 내 안의 목소리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죽음으로까지 나를 몰고 갔던 아버지는 또 다른 나였다. 누군가의 마음을 죽이고 죽였던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죄의 역사가 핏줄을 통해 계속 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과연 난 아버지와 다를까? 아니다. 나 역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난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죽였으니까. 나에게 살인을 저질렀으니까. 난 살인자다.

결국 ‘나’로 귀결되는 살인의 계보. 아버지는 나를 보며 아버지 자신을 보고, 나도 아버지를 보며 나 자신을 봤기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고, 닮았지만 닮기를 거부해 온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두려움에사로잡혀 서로를 찌른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제이는 어디로 갔는지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돌보던 가게 안 식물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물처럼 눈에 띄게 움직이질 않아 죽은 것 같이 느껴지던 그들을 박제된 미라 같다고만 생각했었는데 그들조차도 내게 없던 생명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게 안이 온통 그들의 생기로 숨 쉬고 있었다.

“살아줘서 참 고마워요.”

“네?”

그녀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분홍빛 선인장을 들어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거요. 화원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던 거였거든요. 여기 있는 식물들 다. 그런데 물을 주고, 햇빛을 주고, 영양제도 주고, 사랑도 줬더니 이렇게 되살아났어요.”

그녀의 말에 난 가게 안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어느 것 하나 쓰레기장에서 주워왔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제이의 유일한 취미예요. 죽은 나무에 물 주기. 이쯤 되면 취미가 아니라 특기라 할 만하죠?”

그녀의 눈이 내게 동의를 구하듯 크게 반짝였다. 그래서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씨, 당신 이름 같네요.”

“제 이름요?”

난 그녀에게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쑥스러워서였다. 미라. 스페인어로 ‘봐봐!’라는 뜻. 그녀는 내게도 그랬던 것처럼 이 카페를 찾는 모든 이에게 생명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날 봐! 나 살아있잖아. 그러니 너희도 나처럼 이렇게 살아. 죽지 말고 다시 살아 봐. 그녀는 내게 그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었다.

대뇌 반구를 뚫고 전두엽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꺼내 두었던 내 모든 장기를 다시 집어넣었다. 허파를 집어넣고 나니 사람답게 숨 쉴 수 있게 되었다. 위장을 집어넣고 나니 삶의 양식이 먹고 싶어졌다. 콧구멍으로 생기가 들어왔다. 사멸된 정신이 되돌아오자 산다는 것 외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디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연 현상을 내게서 기대하게 되었다. 죽은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생생한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게 일어난 인식의 변화가 참으로 놀라웠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슴을 펴고 공기를 폐포 끝까지 밀어 넣었다.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공기였다. 뺨에 와 닿는 미온의 바람에서 생령(生靈)이 느껴졌다. 신기했다. ‘생령’이란 단어가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겐 비록 생경한 단어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생령’이었다. 그것 말고는 표현할 다른 말이 없었다. 문 옆 화분에선 붉은 꽃 머리를 한 미모사가 밤새 접어 두었던 이파리를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르르 사르르. 습자지를 손으로 비비는 소리 같았다. 새들이 날아가는 날갯짓 소리는 너무도 힘차서 그 끝자락이라도 붙잡아 두고 싶었다. 파도는 여전히 바다의 끝으로 밀려왔다가 자신을 스스로 부수며 사라져갔다. 양손에 가득 잡힌 바다 공기가 바람에 날려가며 아쉬운 채취를 남겼다. 생령이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그들만의 소리와 냄새와 모양이 있었다.

저 멀리 수평선에 크고 둥근 섬 같은 몸체가 봉긋하게 물 위로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빅 피쉬일까? 개 할아범과 갈매기가 말하던. 그녀와 나를 구해 준. 하지만 이제 내가 빅 피쉬를 다시 만날 일은 없기에 바다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빅 피쉬에게 하는 고마운 인사였고, 나 자신을 안심시키는 손짓이기도 했다.

그렇다. 난 이렇게 살아있다. 생의 끝점에서 시작점으로 옮겨졌다. 그 차이가 죽었던 모든 감각을 되살려냈다. 남다른 능력도 하나 생겼다. 개와 갈매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

몸을 돌려 카페 문을 보고 섰다. 등 뒤에서 개 할아범이 나를 향해 있는 힘껏 짖어댔다. 여전히 내가 수상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바라봐서일까? 갈매기가 하늘을 한 바퀴 돌아 카페로 내려오고 있었다. 부리엔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물고서.

카페 문에 들어올 땐 못 봤었던 구인광고가 붙어 있었다. 멋없게 까만 사인펜으로만 적은 것이었다.

‘알바 구함. 홀 서빙 1명.’

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재빨리 몸을 흔들며 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냈다. 봐봐! 미라! 그가 다시 왔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의 컵을 치우던 미라가 뒤돌아봤다.

“저기… 알바 구한다고 해서… 혹시 숙식 제공되나요?”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녀는 새하얀 바닷소금 크림처럼 웃었다.

“아마 유니폼도 제공될걸요? 일하려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네요.”

아직 마르지 않은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제 죽은 것들이 살아날 시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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