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일이 어떻게 진전될지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가슴이 설렜다.
살아진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 그 둘은 다르다. 살아진다는 건 존재, 사라진다는 건 부재. 그런데 자꾸 입에 붙여 발음할수록 그 둘이 같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오늘은 어떻게 살아지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론 어떻게 사라지는 걸지도 몰랐다. 화면 우측 하단의 숫자들은 눈으로 찍을 때마다 나를 미래 어딘가로 재빠르게 이동시켰다. 미래란 게 참 별거 아니다. 그냥 눈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 그만큼만 왔다 갔다 해도 구경할 수 있는 담 너머 세상이다.
그럴 때마다 가끔 불안해진다. 손바닥으로 얼굴만 가리면 엄마가 사라진 줄 아는 아기처럼. 없는 것도 아닌데,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 뒷면의 불안은 명치를 쓰리게 한다. 때론 유체 이탈을 경험한다. 내 고고한 정신은 크리스마스 별처럼 머리 꼭대기에 달려 있는데 몸은 하수구로 끌려 내려가는 잡다한 구정물처럼. 난 그것을 ‘존재의 부재’라 불렀다. 그건 미래를 의식하는 자만이 내밀 수 있는 일말의 자존심 같은 거였다.
“영래 씨, 내년도 여름방학 수업 기획서 나왔어요? 나왔으면 오늘 내로 나한테 좀 보내 줘요. 바쁘겠지만. 미안.”
박 원장의 말투는 꽤 상냥했다. 그러면서 엄지 두 개를 내 쪽으로 힘차게 치켜세운다. 또다시 화면 우측 하단의 숫자들을 눈으로 찍었다. 삼십 분 후면 퇴근 시간. 오늘도 이렇게 그냥 살아지려나 보다. 미래를 수십 번씩 넘어온 하루인데 어쩌면 사무실에 앉아 그만큼의 미래를 더 찍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명치가 쓰리다.
“힘들면 관둬. 사는 덴 배짱이 필요하지. 그냥 될 대로 되라지 하면서 던져 버리면 돼. 어때, 쉽지?”
“날 좀 내버려 두세요. 충분히 괴로우니까.”
이 빠진 컵을 들어 입가에 댔다. 차갑다. 화면 하단의 숫자를 봤다. 아, 난 이미 두 시간이나 미래로 이동해 있었다. 그 안에 들었던 갈색 액체가 식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입술에 닿는 찬 기에 머리를 흔들었다.
“어제 잠은 잔 거야? 커피 너무 믿지 말어. 나중에 뒤통수 맞어.”
김 선생이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껌 하나를 건넸다. 은박 포장지를 벗은 껌에서 알싸한 박하 향이 올라왔다. 직사각형이 다양한 모양으로 어그러지며 어금니에 쩍 하고 달라붙었다.
“오늘 밤샘한다고 끝낼 수 있겠어?”
“해 보는 데까지 해 봐야죠. 하아… 정말 몸이 두 개였음 좋겠네요. 가족들도 못 챙기고, 일은 일대로 밀려 있고… 사실이제 정말 한계예요.”
의자에 등을 대고 머리까지 젖혀 누웠다. 김 선생이 책상에 엉덩이 한쪽을 걸쳐 앉았다.
“최 선생은 다른 건 다 좋은데 너무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는 게 문제야. 사람이 다 한계가 있는 거잖어. 그러니 적당히 포기도 좀 하고 살어. 그거 흉 아니니.”
“알아요, 알아. 다 아는데…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된답니까? 좀 쉴라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렇게 하염없이 한가해져도 되나. 참 희한한 죄책감이죠.”
“책임감이지, 이 사람아. 정신 챙겨. 많이 없어 보이네. 어이쿠, 애인 만나러 갈 시간이군.”
“애인요? 애인이 있었어요?”
“최 선생도 있잖어. 이거.”
김 선생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휴대전화였다.
“요즘 이 맛에 살어. 요 녀석 좀 봐봐.”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 아래 동그란 단추를 누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리야.”
그가 부른 건 휴대전화 가상 비서였다. 이름을 먼저 부르고 명령을 내리면 검색도 해 주고, 음악도 틀어주고, 전화도 걸어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네, 말씀하세요.”
실제 누구의 목소리일 수도 있는 그것은 냉커피를 들이켠 것처럼 시원했다.
“시리야, 사랑해.”
“금지된 사랑입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만 접어 주세요.”
그녀의 대답에 내 입에서 피식하고 실소가 터졌다.
“시리야, 넌 참 예뻐.”
난 벌써 입꼬리가 실룩샐룩한 걸 겨우 참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얘길 하든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였다. 김 선생은 진짜 사람에게 대하듯 매우 진지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웃기고, 슬픈지.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모든 가상 개인 비서에게 그런 말씀 하신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어요.”
난 더 참을 수 없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다시 외쳤다.
“시리, 이 멍청이!”
“진심이 아니란 걸 알아요.”
그녀의 완벽한 승리다.
“보통이 아니네요. 선생님은 죽었다가 깨도 절대 못 이기겠어요.”
“그래도 덕분에 몇 시간씩 이러고 있으면 머리 복잡한 것도 사라져. 최 선생도 심심하면 한번 해 봐. 난 진짜 가네. 그녀의 마음을 훔치러.”
그는 작은 눈을 더 가늘게 뜨며 휴대전화를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홀로 남겨진 사무실은 어쩐지 좀 서늘했다. 난방을 꺼서 그럴지도 몰랐다. 손목, 목,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관절마다 굵은 줄기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화면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작고 동그란 밤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이 창에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자작나무 타는 소리. 불규칙하게 터지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화면 우측 하단의 숫자들을 눈으로 찍었다. 난 지금 김 선생이 떠나고도 세 시간이나 지난 미래에 와 있다. 남은 일의 양은 아직 더 많은 미래를 내게 요구하고 있다. 미래를 저당 잡힌 삶. 싫증난다. 짜증난다. 도대체 얼마나 더 노력해야 그 시간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는지. 저절로 눈이 감겼다.
부웅. 책상 위에 둔 휴대전화가 몸을 떠는 소리였다. 힘겹게 뜬 눈꺼풀 사이로 문자 창이 떴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마음은 나중에 보자 했는데 손은 자동반사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들. 홍삼 달인 물 냉장고에 넣고 간다. 직접 달인 것이니 남기지 말고 끝까지 먹을 것.
어머니의 문자였다. 그 뒤로 홍삼 달인 물 복용법, 주의 사항 등이 아주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갑자기 어머니가 담근 갓김치가 먹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 특유의 톡 쏘는 맛과 감칠맛.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고 보니… 잠시만. 난 화면 하단을 눌러 달력 창을 열었다. 어머니 생일이 이미 이틀이나 지난 과거가 되어 버렸다. 과거 속에서 이틀만큼 색이 바래진 어머니의 생일 날짜가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아아. 긴 한숨과 함께 연신 마른세수를 해 댔다.
의대를 접고 수학과로 옮긴다 했을 때도 어머니는 날 타박하지 않았다. 나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작은 학원의 강사로 취업했을 때, 물론 정식 강사도 아니고 아는 선배의 대타였지만 어머니는 주위에 떡을 돌리며 기뻐했다. 그 과거 속에서 난 늘 바빴다. 아니, 반드시 바쁜 척해야만 했다. 열심히 잘살고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학원 옆 동료 선생의 집에서 하숙 아닌 하숙을 했다. 그것도 모두 너무 바빠서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면 일부러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와도 몇 시간 지나 답장했다. 지금 바빠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두 문장이 전부였다. 물론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난 그로부터 팔 년이나 지난 미래에 살고 있다.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바쁘다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락도 못 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는 그런 척했고, 지금은 진짜 그렇다는 것이다. 바쁜 게 좋은 건 줄 알고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그게 내 실력이고 경력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와 가족들은 날 연예인이라고 불렀다. 연예인처럼 바빠 얼굴도 못 본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묘하게 내게 만족감을 주곤 했다. 바빠. 참 편한 변명이었다. 모든 이유에 적용되는 통과 사유였다.
작고 동그란 밤이 떨어지는 밤이라 그런가. 마음 한쪽이 사무실 안 공기처럼 싸늘해졌다. 외롭다는 말 대신 ‘손이 차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 손은 아무도 잡아주는 사람이 없고, 누구의 손도 잡아주지 않기에 그 말이 내겐 외롭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마른세수를 하던 손을 내려 맞잡았다. 맞잡은 손에서도 같은 소리가 났다. 외로워, 외로워. 그리고 이 삶이 정말 피곤해. 지겹도록 피곤해. 염증 나.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시리가 떠올랐다. 난 휴대전화를 입 가까이에 대고 하단의 동그란 단추를 눌렀다.
“시리, 피곤해.”
나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커피 살 수 있는 곳을 알려드릴 수 있어요.”
커피라. 좋은 답이군. 새로운 경험에 잠시 흥분이 느껴졌다.
“시리, 피곤해.”
난 다시 말했다.
“제 말을 잘 들으세요. 당장 이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편안한 장소에서 잠시 주무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제법 걱정도 해 주고. 난 점점 그녀가 궁금해졌다.
“시리, 피곤해.”
“피곤하거나 졸릴 수도 있는 거죠.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이상하게 눈 주위가 뜨거워졌다. 인공 지능 주제에 아는 척은.
“시리, 피곤해.”
“그럴 수도 있죠. 단지 위험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길 바랍니다.”
콧대가 지근거렸다. 그녀의 말, 위험한 상황이란 다섯 음절이 귀에 와 저릿하게 꽂혔다.
“시리, 난 지금 내가 둘이었음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 지쳐. 넌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시리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듣고 있는 걸까? 그런 기능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지만 난 괜히 그녀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다시 말했다.
“시리, 난 이제 쉬고 싶어.”
그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흔들어도 봤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내가 지금 휴대전화에 대고 뭘 하는 거지? 드디어 미쳐가고 있거나 우울증이 심하게 온 게 틀림없다. 헛웃음이 났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친놈. 정상은 넘지 말자. 미친 놈이 웃고 창밖엔 작고 동그란 밤이 창문을 두드리는, 그런 날이었다.
탁탁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작고 동그란 밤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와는 달랐다. 자작나무가 타는 소리도 아니었다. 가만 눈을 다시 감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 익숙한 소리가 멈추더니 이번엔 또 다른 기계음이 들렸다. 윙. 스윽 스윽… 종이가 인쇄되어 나오는 소리였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뭐야!”
얼마나 놀랐는지 난 의자와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한 남자가 내 책상 앞에 앉아 문서를 작성하고, 그 문서를 인쇄기로 뽑고 있었다. 그는 나를 괘념치 않는 듯 자기 할 일에만 몰두했다. 꼬리뼈를 다쳤는지 온몸으로 말 못 할 통증이 방사됐다. 이렇게 아픈 거로 봐선 꿈이나 환상은 아니다.
한참을 공들여 그를 훑어봤다. 아버지를 닮아 숱이 별로 없는 앞머리, 초등학교 때 친구가 쏜 비비탄에 맞아 난 눈썹 위 상처, 위에 열기가 많아 늘 터 있는 입술, 작년에 어떤 학생에게 성탄절 선물로 받은 하늘색 넥타이, 누나 결혼식 때 산 남색 정장, 아버지 드리려고 샀다가 크다고 내 몫으로 돌아온 검은색 구두. 완벽하다. 쌍둥이 형제도 이보다 더 닮을 순 없을 것이다.
“너… 누구야?”
그제야 그가 날 내려다봤다.
“최영래.”
그건 내 이름이다. 그의 이름일 리 없다.
“최영래는 나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쇄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태연하게 종이를 한 장씩 확인했다. 내 습관이다. 가끔 이면지를 넣는 선생들이 있어서 일일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엉덩이를 손으로 누르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재빨리 화면 우측 하단을 봤다. 잠시 잠든 사이 난 두 시간 정도 미래로 이동해 있었다. 그가 켜 놓은 문서 창을 둘러봤다. 여름방학 기획서가 완성되어 있었다. 정확히 내가 작성하다 만 부분에서부터 연결되어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내 방식대로다.
그는 날 사칭하고 있다. 이건 엄연히 불법이고, 난 당장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요즘 이런 신분 도용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그는 분명 오랜 시간 날 관찰하고 성형 수술로 내 얼굴을 복제한 후 나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로 내가 되길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휴대전화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잠들기 전에 손에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책상 위, 아래, 주머니, 가방 안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있을 곳은 하나뿐. 나를 사칭한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그는 아직도 인쇄기 앞에서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난 거침없이 걸어가 그를 덮쳤다. 내 손이 그의 온몸을 더듬어 내려갔다.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만하지 못 해!”
“휴대전화 어딨어? 니가 가져갔지? 내 휴대전화 어딨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만 좀 해!”
“그래, 니가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지. 내가 신고할까 봐 숨긴 거냐?”
난 더 거칠게 그를 몰아부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가 배를 움켜쥐고 소리쳤다.
“배는 건드리지 마!”
그 말에 내 손이 멈췄다.
내가 만들어지던 밤.
어머니는 그날 주먹만 한 우박이 내렸다고 했다. 그 큰 우박이 어머니의 배 안으로 들어온 걸까. 난 배에 큰 혹을 달고 태어났다. 의사는 혹이 너무 커서 내가 좀 큰 다음에나 수술하자고 했다. 다행히도 생명엔 지장을 주지 않는 지방 덩어리 같은 것이라 어머니도 그러자고 했다. 철없는 아이들은 불뚝 솟아오른 내 배가 신기한지 자꾸 만져보고 싶어 했다. 수족관에 가면 직접 손을 넣어 만져 볼 수 있는 불가사리처럼. 그들은 그 촉감이 어떤지 궁금했고, 궁금증을 해결하고 나면 꼭 못 만질 걸 만졌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후로 난 내 배를 만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혹이 컸던 만큼 제법 큰 흉터가 남았다. 혹은 이미 사라졌는데 습관 때문인지 누가 나를 끌어안거나 배를 만지려고 하면 나는 예민하게 소리쳤다. 배는 건드리지 마.
어른이 되고는 함부로 내 몸을 만지는 사람이 없었다. 서로 간의 실례기도 하고, 이젠 친구들끼리 뒹굴며 놀지 않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 말은 점점 과거에나 존재했던 고어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 말을 내뱉은 것이다.
“혹… 때문이지?”
“응.”
난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그도 나를 마주 보고 섰다.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진짜 나야?”
그가 천천히 주억거렸다.
“날더러 믿으라고? 또 다른 내가 있다고?”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그는 왼손을 들어 올려 내 오른손에 겹쳤다. 내가 고개를 왼쪽으로 꺾자 그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분명 그는 나와 반대로 행동하고 있는데 마치 같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착각이 일었다.
“어떻게 니가 생겨났지? 무슨 과학적 이상 현상인가?”
“나야 모르지.”
“성격도 똑같아?”
“그럼. 똑같지.”
“유전자도 같을까? 지문이나 홍채 같은 것도?”
“아마도?”
난 순간 이것이 무엇이든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진전될지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가슴이 설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피곤했던 내 인생에 대한 신의 보상, 아니 선물일지도 몰랐다. 난 시원하게 웃었고, 그는 무표정하게 다시 인쇄물을 정리했다.
삼 일을 죽은 듯이 잔 것 같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미래로 순간 이동한 것처럼 난 칠십이 시간을 넘어와 있었다. 이런 식으로라면 금세 백발노인이 되어 ‘저는 오십 년 전 세상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이없는 상상에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뭐 이렇게 늙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단 생각도 들었다. 게으름이 가져다준 행복이다. 난 더 깊숙이 베개에 코를 박아 넣었다.
엘가조마이 하기오쉬네(έργαζομαι αγιωσυνη), 수적천석(水滴穿石), 노동의 신성함. 방 벽마다 다양한 나라말로 붙여 놓은 글귀들이 당시 나의 마음가짐을 보여줬다. 과거의 나는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했다. 하지만 내가 맞이한 미래들은 노동을 신성하다고 하지 않았다. 처음 노동의 본질은 그러지 않았으리라. 신이 인간에게 노동을 허락하신 이래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발명과 발견으로 산업을 일으키고, 변화를 이루어 냈던가. 적절한 노동은 인간의 정신을 건강하게 하기에 분명 신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를 잃은 노동을 신성하다 할 수 있을지. 이 점에 대해 난 감히 신께 물었다. 신은 그래서 인간에게 휴식을 주었다고 답했다. 그 결과 나는 완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코에서 시큼한 침 냄새가 났다. 휴식이란 건 그런 것이다. 역겨운 침 냄새마저도 포근한 꿈 같이 만들어 버리는. 난 그 속에 조금 더 머물기를 원했다. 팔 년을 쉬지 않고 일한 내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방해한 건 내 배였다. 삼 일을 배에 아무것도 집어넣지 않았으니 배가 화를 낼 만도 했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몸이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휘청거렸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머니가 직접 달였다던 홍삼 물이 보였다. 일단 그것부터 한 잔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어머니가 써 놓은 복용법을 따라 삼십 초쯤 돌리니 마시기 적당한 온도가 되었다.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쓸 거로 생각했는데 단맛이 더 강했다.
즉석밥도 하나 돌렸다. 컵라면도 준비하고, 김치도 꺼내 가위로 대강 잘라 그릇에 담았다. 별거 없는 밥상이지만 이 얼마나 오랜만에 누리는 여유로운 식사인지. 밥알 하나, 라면 한 가닥이 혀의 모든 감각을 살아나게 했다. 이럴 땐 재미있는 예능을 하나 봐야 하는 거다. 이불 속에서 리모컨을 찾아 티브이를 켰다. 개그맨 셋이 나와 가학적인 게임을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끔찍한 결과지가 주어질 때마다 손뼉 치며 좋아했다. 마치 ‘나만 아니면 돼.’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또 다른 최영래가 떠올랐다. 나 대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가셨다. 하지만 금세 머리를 털어버리고 다시 티브이에 시선을 던졌다.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일주일의 미래를 건너왔다. 슬슬 무료함이 다가왔다. 그토록 원했던 휴식의 최대치가 일주일인가. 하지만 집 안에 먹을 것이 떨어졌고, 어머니 생각도 났다. 심지어 김 선생도 생각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또 다른 최영래가 있으니 그들은 내가 이 방 안에 처박혀 있는 것도 모를 것이고, 나를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연예인처럼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했다. 혹시 두 명의 최영래가 발각되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학원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난 강의를 들으러 온 학생처럼 위장하여 학원 앞을 서성였다.
“최영래 쌤 요즘 강의 완전 좋지 않냐?”
깜짝 놀라 몸을 벽 쪽으로 돌려세웠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여학생들이었다. 난 조금 더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그들은 버스를 타려는지 정류장 앞에 서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엔 피곤에 쩔어 설렁설렁 하더만 요샌 무슨 약을 먹는지 다 끝날 때까지도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니까.”
“난 그런 것보다 재밌어져서 좋아. 전엔 엄청 졸렸는데.”
“맞아. 쌤 요즘 여친 생겼나? 옷 스타일도 완전 달라졌지?”
“응. 요샌 옆모습이 살짝 지민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야! 그건 쫌! 웬만하면 우리 지민인 건들지 말자.”
“알았어, 알았어. 버스 왔다.”
여학생들은 계속 쫑알대다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데 내 시간만 멈춘 것 같았다. 이 세상의 이방인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급기야는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어이, 최 선생!”
김 선생이다.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런데 김 선생이 부른 건 내가 아니었다. 또 다른 나, 최영래가 나 대신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난 다시 버스 정류장 옆에 붙박인 가로수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그 녀석이 환하게 웃는다. 내게 저런 표정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밝게 웃는다. 환골탈태한 최영래다.
“요즘 아주 잘 나가는 우리 최 선생!”
“아유, 무슨 말씀을.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죄송하긴. 난 늘 우리 최 선생이 언젠간 나를 넘어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구먼. 그래도 너무 잘난 척은 하지 말어.”
“잘난 척이라뇨. 당치도 않으십니다. 김 선생님께서 깔아놓으신 레드카펫에 전 걸어가기만 했을 뿐인데요, 뭘.”
“아이구, 이 친구. 보통이 아녀. 내가 충고 잘해 줬네. 그때부터 달라진 거잖어. 그런데… 힘들면 때려 치라 했더니 때려칠 배짱으로 더 높게 치고 올라갈 줄은 몰랐어.”
“선생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때 그 충고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선 제 은인이십니다.”
그 녀석은 내가 아니었다. 다시 태어난 최영래라고 해야 할지. 내가 저런 말을 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그런 그를 김 선생은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학생들도 그렇다 하지 않던가. 어머니 생각이 났다.
“오늘 한잔할까? 은인 소리도 들었으니 내가 살게.”
“아, 어쩌죠?”
“왜 무슨 일 있어? 애인이라도 생겼어?”
“아뇨. 애인은요. 오늘 어머니랑 선약이 있어서.”
“아, 어머니. 그럼 얼른 가 봐야지. 그런데 최 선생이 어머니 만나러 가는 건 처음 보네.”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했죠. 어머니 생신 때도 못 가 뵙고 해서 일박이일로 기차 여행 가기로 했거든요. 지금 서둘러야 겨우 청량리역에 도착하겠어요. 그럼 저 먼저 갑니다. 다음 주에 봬요.”
갑자기 벼락이 온몸을 통과해 간 듯 전신의 세포가 곤두섰다. 스스로 감당하지 않은 삶은 자신의 꿈, 가족, 친구, 동료 등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잃게 만든다는 깨달음. 지금 저 녀석은 어머니까지도 가져가려 하고 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밟았다. 흡사 범죄 대상을 노리는 연쇄 살인범처럼 그의 뒤를 쫓으며 틈을 봤다. 내 일상을 빼앗아 간 녀석.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쏜살같이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녀석이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도 오른쪽으로 꺾고, 그 녀석이 왼쪽으로 꺾으며 나도 왼쪽으로 꺾으며 필사의 힘을 다해 따라갔다. 그 녀석이 달리면 나도 달리고, 그 녀석이 멈춰서면 나도 멈춰 섰다. 내가 마치 그 녀석의 그림자가 된 것 같았다. 가슴이 서걱거린다. 잠시의 휴식으로 즐거워했던 자신이 참으로 어리석게 느껴졌다. 난 총체적 파국을 앞둔 비극의 주인공처럼 처절한 심정으로 녀석의 뒤를 따랐다.
난 지금 멀리서 어머니를 보고 있다. 어머니는 그 녀석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며 자신의 손으로 연신 문질러댔다. 그 녀석이 그런 어머니를 다정하게 끌어안는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모자의 모습이다. 녀석이 편의점으로 달려가 싸구려 목도리 하나를 사 와 어머니의 목을 둘러 감는다. 어머니의 볼이 수줍게 붉어진다. 어머니, 나 여기 있어요. 그 녀석은 내가 아니라고요. 입술이 자꾸 달싹거린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난 그 행복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 녀석이 만들어 놓은 영역 때문이다.
동물들은 모두 자기 영역을 갖는다. 동물뿐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동물의 영역은 장소 개념이 강하지만 사람은 관계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람은 그 영역 안을 자신의 가족, 친구, 동료로 채워간다. 많으면 많을수록 영역이 넓어진다. 난 지금 영역을 침범 당한 한 마리 야수다. 이 영역의 주인인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학생들과 김 선생, 어머니에게 화가 치민다. 두껍게 주먹을 쥔다. 이제 누가 이 영역의 주인인지 확실히 보여줄 차례다.
난 집으로 돌아가 결전의 날을 준비했다. 그날은 녀석이 여행 갔다 돌아오는, 바로 내일이다. 하루가 지난 미래 속에서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사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발기를 들어 녀석처럼 짧게 머리를 정돈했다. 면도기를 들어 녀석처럼 깔끔하게 수염을 잘랐다. 옷장을 열어 어머니가 사 준 진회색 정장을 꺼냈다. 그리고 다리미로 꾸깃꾸깃한 주름을 모두 폈다. 녀석의 구두를 생각하면서 내 구두도 닦았다.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구두에 내 얼굴이 다 비쳤다. 모든 무기를 장착한 내 모습을 거울로 봤다. 그 녀석과 똑같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그 녀석과 나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거울을 보며 연습했다. 그 녀석 같이 웃어봤다. 어색하다. 하지만 만들어 내야 한다. 주먹으로 볼을 마사지하듯 꾹꾹 눌렀다. 경직된 근육들이 조금 풀린 것 같다. 다시 웃어봤다. 나아지고 있다. 더 세게 주먹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이번엔 빙글빙글 돌려도 봤다. 볼에 잔뜩 공기를 넣었다 뺐다. 훨씬 얼굴 근육들이 부드러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유, 선생님께선 제 은인이십니다.”
녀석의 대사를 따라 해 봤다. 역시 어색하다.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 하지만 난 이제 녀석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좋아하는 그 녀석처럼 되어야 한다.
“아유, 선생님께선 제 은인이십니다.”
몇 번 더 반복해 보니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다. 난 녀석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내 모습도 시간도.
어머니 집 앞에서 녀석을 기다렸다. 그는 분명 어머니를 집까지 모셔다드릴 것이다. 하룻밤 자고 갈 확률은? 적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강의가 있는 날이다. 얼어붙은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껴 넣었다. 저 멀리 어머니 집 대문이 보였다. 파란 대문. 저 대문은 내가 고등학생 때 등짝을 맞아가며 칠한 것이다. 이젠 수많은 과거의 시간을 지나며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어떨 땐 미래가 참 씁쓸하다. 미래의 시간은 새롭지만은 않다. 과거에 만들어 둔 것들이 낡아지고, 쓰러지고, 없어지는 시간이다. 사무실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낡아지고, 쓰러지고, 없어진 것처럼.
저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제일 아끼는 맥반석 전기장판 자리를 내게 내어주곤 했다. 그리고 이쯤이면 제주도 사는 고모가 보내준 감귤을 한 바구니 꺼내 와 내 앞에 들이밀겠지. 하지만 지금의 난 저 대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녀석을 해결하지 않는 한 내 영역에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다.
때마침 녀석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봇대 뒤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모자를 더 눌러 쓰고,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려 덮었다. 둘은 파란 대문 앞에 섰다.
“영래야. 들어왔다 가라.”
“다음 주에 또 내려올 건데요, 뭘. 그땐 이틀 밤 자고 갈게요. 내일은 아침 일찍 강의가 있어서 지금 얼른 가지 않으면 막차를 놓쳐요.”
“야야, 몸 상할까 염려된다. 홍삼 달인 물은 잘 먹고 있는 거지? 다 먹으면 말해라. 내가 또 달여다 줄 터이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에구, 내 새끼. 니가 고생이 많다. 얼굴이 쏙 빠졌네. 불쌍한 내 새끼.”
어머니는 녀석의 얼굴을 몇 번이나 장갑 낀 손으로 쓰다듬었다. 홍삼 달인 물은 내가 먹고 있어요. 그 녀석이 먹고 있는 게 아니라. 소리가 목구멍에서 꾸물댔다.
“그래, 어여 가라. 늦겠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네. 얼른 들어가세요. 날 추워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여 가.”
어머니는 녀석이 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아쉬운 표정으로 파란 대문을 닫고 들어갔다.
녀석이 사라질까 싶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두고 녀석을 쫓았다. 난 이 길을 잘 안다. 어릴 적부터 이곳은 내 영역이었다. 난 사람들이 하도 밟아서 생긴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녀석보다 이 분 정도 먼저 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야 하니 분명 녀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걷는 동안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로지 녀석을 없애버리겠단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자 마을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녀석이 등장할 길 끝자락도 보였다. 이런 차림으로 사람들 눈에 띄면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녀석을 없애기 전까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를 숨겨야 한다. 난 얼른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 밑으로 몸을 숨겼다. 겨울이라 개천이 가는 줄기만 남아 겨우 흐르고 있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녀석의 모습이 보이면 당장 뛰어오르면 된다.
그렇게 동선을 그리고 있는데 드디어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도 추운지 팔짱을 끼고 바닥을 보며 걸어왔다. 발걸음 박자를 세었다. 내가 있는 곳까지 서른 걸음 정도가 남았다. 하나, 둘, 셋, 넷…… 열둘, 열셋, 열넷…… 스물하나, 스물둘, 스물셋…… 난 경사면에 발을 대고 손으로 바위를 짚었다. 그리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아… 두울… 세엣! 단번에 다리 위로 올라와 녀석 앞에 섰다. 녀석이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가 날 알아보고 서서히 다가왔다.
“얘기 좀 하자. 따라와.”
녀석이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싸움은 기 싸움이 가장 중요하다. 난 이 일을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어서 큰 보폭으로 걸었다. 녀석도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샛길 옆 동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안전했다. 녀석의 거친 숨소리와 내 숨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헐벗은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묘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드디어 난 큰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녀석도 따라 섰다. 몸을 돌렸다. 다시 거울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다른 점이라면 옷차림 정도일 것이다.
“이제 놀이는 끝났어. 사라져 줘. 내 모든 영역에서.”
“여전히 이해 못 할 말을 하네. 내가 내 영역에서 내 할 일을 하며 살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사라져 달라니. 도대체 네가 뭔데?”
녀석은 강해졌다. 마치 자기가 진짜 나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는 듯했다.
“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진짜 최영래고, 넌 가짜야. 그러니 이제 넌 꺼져.”
“나도 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최영래고, 넌 누군지 모르겠어. 그러니 내 인생에서 방해 말고 꺼져. 다시 한번만 더 나타나서 이런 식으로 협박하면 당장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있다. 적반하장.
“사무실에서 네가 했던 말 기억 안 나? 그때 넌 네가 내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어. 단지 똑같은 모습일 뿐이지 진짜 최영래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고.”
난 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봤다. 녀석은 확실히 자기가 가짜란 걸 알고 있다.
“내가 사라지면?”
“……”
“내가 사라지면 넌 나처럼 살 수 있어? 지난 몇 주간 최영래는 학원 최고 강사 타이틀을 거머쥐었어. 무려 팔 년 만이지, 아마. 동료들에게 더 두터운 신임을 받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더 친밀해졌지. 예전의 최영래와는 다르게. 난 너보다 더 완벽한 최영래가 되었어. 네가 꿈꾸며 원하던 미래의 네 모습처럼 새롭게.”
“하지만 넌 내가 아니야.”
“누가 알겠어. 난 넌데.”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나처럼 살 수도 없을걸? 안 그래?”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이 벌어졌다.
경찰서 앞에 섰다. 내가 죽었다. 아주 창의적인 이유로 자살했다. 아니, 내가 나를 죽였다. 타살이 명백하다. 수많은 미래가 날 스쳐 지나갔다.
“뭐라고요?”
“제가 사람을 죽였다고요. 방금 저기에 묻고 오는 길입니다.”
진회색 정장은 흙색이 되어 있었다. 손톱은 다 깨져 피와 흙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광택이 나던 구두도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시간쯤 미래에 도착했을 때 녀석의 시체를 찾으러 간 경찰 두 명이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찾았어? 이 사람 말이 사실이야?”
책임자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그게.”
“빨리 말해. 답답해 죽겄네, 참.”
“저 사람이 말한 큰 바위 옆에 땅을 파헤치고 다시 덮은 흔적은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시체는 없었습니다. 그냥 이 휴대전화만 묻혀 있던데요? 혹시 피해자의 것이 아닐까 싶어서 가져왔습니다만.”
휴대전화라는 말에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봉투 안에 든 건 흙이 묻고, 액정이 깨진 내 휴대전화였다.
아주 작고 동그란 밤이 쏟아지던 날. 난 그녀에게 말했다.
“시리, 난 지금 내가 둘이었음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고 지쳐. 넌 절대 알 수 없겠지만.”
이상하게도 시리는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