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난 한 주 동안 갈멜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잖아.
처음 한인 사이트에 올라온 이 모임의 광고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북클럽 : 크세니엔
책을 쓰는 건 인간의 기본 욕구다. 밥 먹고 잠자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모임 장소와 시간, 코니의 연락처, 그녀의 네 줄짜리 약력이 적혀 있었다. 모 유명 사이버대학에서 미디어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몇 년 전 지역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두 권의 소설집과 여러 권의 웹북을 출간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나는 그녀의 약력보다 앞에 붙은 두 줄 문장에 더 끌렸다. 오랜 시간 내 가슴을 간질였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주었기 때문이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쓰는 행위에서 자기 객관화, 현대 용어로 바꾸자면 메타인지가 중요하다는 걸 이미 공표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더욱 곤의 태도가 거스러미처럼 신경이 쓰인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문예의 반대편에서 다른 이들의 글도 닫아버리는 오류고, 오작동이다.
강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면이었다.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며 마치 거울 보듯 했다. 사람들은 둘 사이에 놓인 사백 불을 놓고서 갹출이다, 각출이다 말이 많았다. 이유야 다양했지만, 각출이라고 말한 이들은 그의 관점에서 ‘단독적인 결정’이란 점을 들었고, 갹출이라고 말한 이들은 나의 관점에서 ‘공동의 결정’이란 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백 불은 은행에서 막 신권을 뽑아온 듯 빳빳했고, 내 이백 불은 수천 명의 손을 돌아 마지막 결전지에서 전사한 듯 꼬깃꼬깃했다. 그 위로 다른 사람들의 프랭클린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장광설은 사양. 돈 가는 데 마음 가는 건 인지상정. 여러분의 마음은 내가 잘 쓸어가겠어.”
이젠 하다 하다 열 개의 손톱 위에 테라리움을 차린 코니의 손에 초록 무더기가 단숨에 정리됐다. 어떻게 저런 손톱으로 키보드를 치는지도 궁금하지만, 그녀의 야무진 손놀림을 보고 있자면 본업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은행원이라고 하기엔 요란하고 카지노 딜러라고 하기엔 카드놀이에 재능이 없다. 그러니 오늘은 함부로 예측하는 걸 관두고 시원한 블루문으로 목이나 축일 수밖에.
“술자리에서 돈 냈다고 내일 아침에 기억이 안 나네, 그러니 물러달라 그러긴 없는 거야. 코니, 네가 잘 가지고 있어. 저놈들 중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알았지?”
“뭐야, 닥터 윤이야 말로 제발.”
코니는 대여섯 살쯤 더 나이가 많은 멤버들 속에서도 말이 가장 짧았다. 물론 그 일로 그녀에게 항의할 순 있겠으나, 아버지 쪽 독일계 혼혈인,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인 2세, 워싱턴 대학교 한국어학과에 재학 중인 미국인 등이 모인 까닭에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종 군대까지 마치고 유학 온 곤이 꼰대 같은 눈으로 그녀를 쏘아 보았지만, 그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이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아메리카인 걸. 더구나 이 모임의 리더는 코니였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절을 떠나야 하는 쪽은 당연히 곤, 그였다.
작은 양은 냄비 위에서 꼬불거리는 라면 면발이 점점 불어갔다. 그걸 가장 먼저 구제한 건 제러미였다.
“콘, 이 라면 네 손가락 같아. 엄청 커.”
제러미는 그가 가슴팍에 꼬아 넣은 팔을 억지로 풀며 오른쪽 집게 손가락을 잡아 올렸다. 제러미의 아버지는 아슈케나짐-독일계 유대인-이었지만, 어머니는 한국인이어서 그의 한국어 실력은 초등학교 수준이었다. 발음은 전형적인 미국식 한국어,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제러미에게 내 이름 준은 쉽지만, 그의 이름 곤은 ‘콘’에 가깝게 들렸다. 매번 테이블을 국경 삼아 이쪽과 저쪽으로 대치하는 나와 그를 누그러뜨리는 건 언제나 제러미의 몫이었다.
“아이고, 오늘 합평도 무기 장착하고 들어가야 하나?”
“노노, 난 드론 띄울 거야. 무서워서 가까이 가기도 싫으니까. 아, 사족 보행 로봇에 소총 하나 달면 되겠네.”
멤버들의 이런 농담이 편하다면 나는 아마도 소시오패스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허리춤에 얹었던 손을 내려 소총 대신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흰 포장지의 옆구리를 엄지 한 마디 정도만 찢어 내렸다. K포차 주인의 취향이 바뀌었는지 젓가락 끝부분이 전처럼 둥그렇지 않고 납작하게 눌려 있다. 그것조차 거슬렸다. 곤의 각진 턱 같아서다. 군대에서 만든 버릇인지 자신의 글 모양도 칼각을 잡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이들의 글에도 각을 세우는 그가 몹시 불편하다. 특별히 그가 자신의 문학론에 관해 언급할 땐 미간마저 일정 간격으로 두 겹 접혀 각이 선다. 나는 그 각들에 죄다 날이 서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베려는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미 날 선 무언가를 빼어 들었을 땐 여기에 앉은 모두가 갈기를 세울 여지를 준다는 것을 곤만 모르는 것 같았다. 지능이 높은 인간의 류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영리하게 감춘다. 그랬다가 상대가 방심할 때를 틈타 뒤통수를 가격하는 걸로 우위를 선점한다. 그런 일은 인간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이 모임이라고 다를까.
코니는 모임 첫 시간에 간단한 합평 에티켓을 작은 명함 크기로 인쇄해 나눠줬다. 간단히 추려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다. 1. 모두의 시간 배려하기 2. 경청의 자세 유지하기 3. 긍정적 표현 사용하기 4. 합평과 관련된 내용 중심으로 논의하기 5. 비공개 작품의 내용 공유 금지. 그녀의 경험에서 나온 합평 바리케이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그녀가 내민 이 작은 종이 조각이 얼마나 날카롭게 감정과 이성을 찔러댈지 알지 못했다.
“온유, 넌 무슨 이야기 쓸 거야?”
“제러미 선생님, 그럴 땐 ‘선생님, 무슨 이야기 쓰실 거예요?’라고 해야죠.”
제러미가 입술을 비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임의 첫날 나는 제레미, 온유와 같은 줄에 앉았다. 멤버 중 유일한 미국인인 온유는 자신이 직접 지은 한국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모으고 높임말을 썼기 때문에 이질감이 더 컸다.
코니, 준, 곤, 제러미, 닥터 윤. 각자 불러달라는 이름으로 부르다 보니 진짜 한국인은 되레 온유 같았다. 그는 자기 이름을 영어로 썼을 때, Onew인 것이 마치 ‘오! 뉴’라는 뜻으로, 새로운 국적으로 태어난 것 같아 좋다고 했다. 그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한국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거나 보이그룹, 샤이니에게 빠져 있기 때문일 거라는 소문이 멤버들 사이에 돌았지만, 직접적으로 물어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가 우리 중 가장 한국인같이 행동하고 말하는 건 묘한 부담감을 주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그는 누군가를 부를 때, 꼭 선생님이란 호칭을 쓴다는 점이다. 누가 가르쳐 줬을까. 온유는 표정마저 깍듯함이 묻어났다. 그런 그가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존중의 의미를 담아 존댓말을 쓰는 건 한국인들-사정에 따라 여러 종류의-의 옆구리를 찔러대는 것만 같았다.
제러미는 그런 온유의 앞에서 꼭 반말을 썼다. 보란 듯 조사도 자주 잘라 먹었다. 코니는 제러미가 말할 때마다 살짝씩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재밌어하는 눈치다. 닥터 윤은 한국에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이민 와 치과 의사가 된 사람인데 알 만한 사람이 높임말을 부러 쓰지 않았다. 앞니를 모조리 털어줄까 싶다가도 나 또한 이곳까지 와 권위의식을 세우는 것 같아 마음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면 내 안에도 예의와 권위 사이 아슬아슬한 꼰대가 사는 게 틀림없다.
“출판비는 마련됐으니, 이제 글쓰기에 집중! 다들 동의한 대로 가장 먼저 책을 내는 사람에게 이 출판 지원금이 돌아가는 거야. 불만 없지? 나까지 총 여섯 명이 이백 불씩 냈으니 무려 천이백 불. 와우, 벌써 의지가 끓어오르지 않아?”
코니가 들고 다니는 작은 천 필통이 그녀의 손에서 두툼한 고등어처럼 팔딱였다. 공정함을 위해 그녀가 건 몇 가지 조언도 첨부한다. 1. 장르는 소설이어야 할 것. 2. 책으로 묶었을 때 이백 페이지 정도는 되어야 할 것. 3. AI를 사용하지 말 것. 4. 합평에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을 가져와 모든 과정을 공개할 것. 5. 한글로 쓸 것.
게임이다. 글쓰기 게임. 속도, 정확도, 기술 모두 중요하다. 남자들에게 게임만큼 온전한 집중을 끌어낼 것이 무엇이겠는가. 상금도 걸려 있고, 참가자들도 있다. 수컷들이 각자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얹고 게임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손가락 관절들을 우두둑 꺾었다. 코니는 다시 이런 광경을 보며 특유의 웃음을 흘렸다. 게임을 관전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관음증이 다섯 남자의 잘 빠진 손가락들을 훑는다. 누가 이겨도 상관없어, 라고 하듯 그녀는 작은 소주잔을 닭똥집 같은 입술에 갖다 댄다.
“제 이야기 제목은 ‘갈멜 이야기’입니다. 갈멜은 근미래를 살아가는 남자인데 기후 문제로 부자들만 모여 사는 돔에서 태어나 이십 년 넘게 살았다는 설정입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가난한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고, 그런 세상이 있는지조차 모르던 갈멜에게 어떤 이유로 인해... 음, 이건 아직 생각 안 해 봤지만, 어쨌든 돔에 남느냐 바깥세상으로 나가느냐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결말은 아무래도 나가는 쪽이겠지만, 가운데 이야기와 결말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쓰는 소설이라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굴리던 이야기인데도 풀어내기가 쉽지 않네요.”
처음 합평에서 내가 쓴 이야기는 삼천이백 자 정도였다. 코니는 처음 쓴 것치곤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헷갈렸다. 이것이 나도 모르던 재능의 발견인지 성의 없게 대충 쓴다는 비아냥인지 알 수 없어서 어정쩡하게 웃었다.
“기대돼! 나 미래 이야기 좋아해. 진짜 우리 다 돔 살지 않을까? 공기 나빠, 해 뜨거워, 그러면 바깥 못 살아. 웩.”
“제러미 선생님, 준 선생님의 글에 집중하세요. 지금 미래에 우리가 돔에 살 것인지, 말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갈멜이 어떤 사연으로 두 가지 선택 길에 서게 됐는지, 그것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해 줄 건지가 중요하지요.”
“아, 몰라 몰라. 나 다 몰라. 잔소리 그만해. 시끄러워.”
“제러미, 난 네 이야기가 궁금한데 어떤 이야기를 썼는지 말해 줄래?”
고도의 기술이다. 집중과 쓸데없는 말에 입을 닫게 하는 것,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방법. 코니는 그 방법을 아주 잘 안다는 듯 재빠르게 제러미에게로 차례를 돌렸다.
“내 이야기? 진짜 내 이야기. 아빠 독일 사람, 엄마 한국 사람. 그래서 나 독일 사람? 한국 사람? 헷갈려. 나 고민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 쓸 거야.”
“와우, 아주 실감 나는 이야기가 되겠는데? 말 그대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현실감도 있고, 이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밑에 깔고 있으니까,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거야. 굳, 기대해 볼게. 다음.”
코니는 제러미 옆에 앉은 온유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선생님들, 저는 과거에 어머니의 살인 사건을 목격한 한 남자가 그 고통으로 인해 자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고 다시 치유와 회복하는 이야기를 쓸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부캐’라고 해서 여러 개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살아가는 것이 다중인격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이야기를 꼭 써 보고 싶었습니다. 거의 전체적인 구성은 이미 짜 놨고요. 이제 글로 정리하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한글로 소설 쓰기는 처음 해 보는 일이라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로 믿습니다. 대학교에서 번역은 많이 해 봤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온유는 오른쪽, 앞쪽, 왼쪽을 향해 총 세 번이나 허리 굽혀 인사했다. 눈 감고 들었다면, 그가 그냥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 반대쪽에 앉아 있던 곤은 온유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바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그 이야기만의 세계관을 철저히 짜는 것도 재밌잖아요. 창조주처럼 나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거죠.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암투, 전쟁 같은 거 말이에요. 나라와 나라의 권력 싸움을 그리려면 생각을 많이 해야겠지만, 뭐 기본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도 다를 바 없으니 그걸 참고하려고요.”
“세계관 짜는 거 힘들 텐데. 요즘 독자들 똑똑해서 조금만 잘못해도 악플 잔뜩 달리고.”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 그래도 치켜 올라간 곤의 눈이 나를 향해 바로 내리꽂혔다.
“내가 악플까지 달릴 만큼 유명 작가는 아니라서.”
그의 목소리에서 이 가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분명 내 실수다.
“마지막은 난가?”
어색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닥터윤이 잽싸게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말을 던졌다.
“난 열다섯 살짜리 여자애의 눈으로 본 세상을 써 보려고 해요. 안네의 일기처럼. 그 나이에서만 보이는 것들, 감정, 고민 이런 거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나중에 청소년문학상, 그런 공모전에도 한 번 내 보려고요. 내가 좀 얼굴도 동안인데 마음은 더 피터 팬 쪽이라.”
딱 이 시점에서 코니와 제러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장면에서 온유는 점잖게 앉아 있었고, 나와 곤은 내 말실수로 서로 불편한 기색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각자의 욕구와 생각 그리고 적절한 유머가 얼버무려진 밤이었다.
몇 개월이 흘렀다. 신년 파티를 겸해서 모인 올해 첫 합평 때였다. 난 연말부터 신년까지 이어진 회사 파업 시위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어떤 의미를 갖고 플래카드를 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시위 기간에도 나오는 돈-물론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혜택을 누리는 사람도 생겼다. 복잡한 머리를 비우기 위해 일찍 집을 나왔다. 그날도 남들보다 두 시간은 먼저 도착해 블루문 한 잔과 치즈 프라이즈로 심심한 입을 달래며 전에 썼던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난 사랑 이야기를 쓴다. 흔한 남녀의 끈적한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인류애 정도가 되겠다. AI 로봇과의 감정 교류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인간만의 사랑, 그 가치에 관한 내 소심한 질문이다.
그때, 곤과 닥터 윤이 함께 문을 열고 K포차 안으로 들어왔다. 닥터 윤의 클리닉이 곤의 학교와 가까우므로 차 없는 곤을 닥터 윤이 항상 챙겨왔다. 랩톱 화면 하단의 시계를 쓱 훑었다. 아직 모임 시간은 삼십 분이나 남았다. 신년이라 곤은 학기 전일 것이고, 닥터 윤은 오후에 볼 환자가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에이, 우리가 일 등으로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아까워라. 그런 의미에서 목마른 사슴에게 맥주 한 모금만 나누어 주겠어?”
닥터 윤의 손이 닿기 전에 먼저 컵을 잡으려 했는데 역시 그가 나보다 항상 한 박자 빠르다. 치과 의사여서 손이 빠른 건가. 그의 목으로 재빠르게 사라져가는 블루문의 비명이 바깥까지 들리는 듯하다. 컵이 금세 핼쑥해졌다. 하지만 늘 있는 일이라 포기도 빠르다. 난 얼른 서버에게 손짓해 다른 블루문 하나를 더 갖다 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알겠다며 바 쪽으로 사라졌다.
“난 지난 한 주 동안 갈멜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했잖아. 준의 이야기는 그 뭐랄까, 사람을 애타게 하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드라마나 영화처럼. 그래서 갈멜은 타운으로 들어간 거야? 돔을 빠져나가서? 그럼 후림의 적이 된 거지?”
닥터 윤은 맥줏값으로 하는 말인지, 자리에 앉자마자 내 이야기를 칭찬하며 주인공인 갈멜의 뒷이야기를 알려 달라고 팔을 어린애처럼 흔들어댔다. 그 옆에서 곤은 적당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가방에서 랩톱을 꺼냈다.
“갈멜 이야기 아직 많이 못 썼어. 하지만 아마도 돌아가겠지? 결국 이 이야기는 정체성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이란 정체성을 드러낼까? 닥터 윤은 어떻게 생각해? 네 이야기도 어떻게 보면 열다섯 살짜리 사춘기 소녀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인간의 성장 단계에서 누구나 겪는 자아 정체감에 대한 거 아니야? 제러미 이야기도 혼혈인의 관점에서 겪는, 두 가지 국적 정체성에 관한 거고, 온유의 이야기도 충격으로 자신을 조각낸 사람이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고, 곤의 것도 지위와 계급, 사회 체제 안에서 한 사회가 진정한 정체성을 세워 나가는 이야기이니.”
“진짜 그렇네. 다 정체성 이야기.”
닥터 윤은 의외로 내 말에 먼 곳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때 곤이 냅킨으로 자기 앞 테이블을 훔치며 말했다.
“그렇게 가볍지 않은 주제에 감상적인 표현을 섞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애들 백일장 하는 것도 아니고, 뭔 놈의 뜬구름 잡는 표현을 그렇게나 많이 섞어 넣는지.”
그 순간 내 얼굴이 어땠을지 난 직접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완벽하게 알 것만 같았다. 얼마나 당황하고 민망했는지 왼쪽 볼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했다. 첫 모임에서 한 내 실수에 대한 복수인가.
“뜬구름 잡는 표현? 어이, 이봐. 문학은 예술이야. 팩트만 적는 수학, 과학이 아니라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을 미학적 표현에 얹어서....”
“미학적 표현에 얹는 순간, 그건 군더더기지. 안 그래?”
“뭐라고? 군더더기? 그럴 거면 넌 소설을 왜 쓰냐? 소설은 다 픽션인데.”
“픽션이지만 현실에 기반한, 그러니까 땅에 발붙인 이야기들이지. 공중에 매단 굴비처럼 직접 먹지도 못하는 허상이 아니라. 안 그래? 아, 네가 쓰는 소설은 허상일지도 모르겠네.”
“뭐라고? 야, 이게 진짜.”
하마터면 맥주컵을 곤의 랩톱 위로 던져버릴 뻔했다. 그때 코니와 온유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거다.
코니가 정한 이 모임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매주 금요일 저녁 5시에 모인다. 2. 각자 자신이 먹고 마실 술과 음식을 시킨다. 3. 6시부터 2시간 동안 지난주에 쓴 글에 뒤이어 집중해서 글을 쓴다.-이 규칙은 다들 바쁜 일정에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다.- 4. 글쓰기 후에 2시간 정도 합평을 한다.-합평 에티켓을 지킨다.-
코니는 멤버들이 물어보는 것에만 답했다. 그것도 처음엔 앞 들여쓰기나 글자체는 뭐로 해야 하는지, 글자 크기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맞춤법 검사기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의 기본적인 질문이었다가 차츰 본질적인 글쓰기에 관한 질문으로 바뀌어 갔다. 구성, 첫 문장, 마지막 문장, 캐릭터, 제목, 주의점 등은 쉽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코니가 원포인트 레슨을 하듯 설명해 주면, 머릿속에 감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 모임에서 회비나 레슨비 같은 걸 받지 않았다. 단지 자신도 시애틀에 있는 일 년 동안 글을 계속 써야 하는데 함께 글 쓸 문우들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만든 모임이라고만 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글을 내어놓는 일이 없었다. 전부터 쓰던 장편소설을 연결해서 쓰는 중이라고만 했다.
눈치 빠른 코니는 K포차 안, 그것도 우리가 늘 앉는 테이블 주위의 분위기가 냉랭한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곤은 코니와 온유에게 평소처럼 인사도 하지 않았고, 뭘 급히 먹다가 체한 것처럼 연신 큼큼거리는 닥터 윤의 모습은 어색했다. 그래도 코니는 모른 척 문 쪽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제러미는 가족 모임에 다녀오느라 합평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합평은 그날 쓴 부분을 그 자리에서 바로 이메일로 공유한 뒤 돌아가며 첫 번째 독자로서의 감상과 특별히 수정하면 좋을 것 같은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날따라 다른 사람들의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총알을 장전하고 너 하나만 죽이겠단 심정으로 곤의 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의 차례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곤은 여전히 다른 사람 글에 전개 속도가 느리다, 캐릭터의 색이 없다, 논리가 맞지 않는다, 등의 충고를 쏟아놨다. 그럴 때마다 다름 멤버들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비쳤다. 반면 그는 전혀 죄책감 없는 표정으로 앉아 마땅히 해야 할 몫을 다했다는 듯 기계적으로 작품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의 돌아가는 순서로 보아 내 차례가 바로 그의 앞이었다. 뒤가 나았을까. 아니다. 어디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그것보다 더 크게 반격해 주면, 그만이다. 세 개를 말한다면, 난 네 개를 말해주면 되고, 어떤 강도로 말하든 그보다 더 강하게 말하면 된다.
“자, 다음은 준.”
코니는 내 쪽으로 곁눈질하며 순서를 넘겼다. 처음으로 입을 뗀 건 언제나처럼 제러미였다.
“난 갈멜 돔 나와서 좋아. 돔 사람들, 갈멜하고 달라. 근데 갈멜 잘 몰라. 뭐 다른지.”
조사는 빠졌지만 우린 모두 그의 말을 이해했다. 갈멜은 자기가 돔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곳에 살지만, 결국 여러 측면에서 스스로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돔을 나와 자기와 생각이 같고 결이 같은 사람들이 사는 타운으로 떠난다.
“첫 번째 문단부터 세 번째 문단까지. 갈멜이 타운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적으며 너무 주변 묘사가 많아 스토리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군더더기를 뺀다면 훨씬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
곤이 드디어 총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응해줄밖에.
“갈멜이 타운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생활 환경이 불편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적어도 글을 읽을 땐, 글쓴이가 이 글을 통해 얘기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도드라지게 표현할 건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무작정 다 빼라고 하면 문학성 없는 글이 되고 말 겁니다. 참 근거 없는 억지란 생각이 드네요.”
분명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지 전쟁터 한가운데로 눈과 귀를 모았다. 코니는 들고있던 볼펜마저 내려놓고 우리 쪽에 집중했다. 다시 곤의 차례였다.
“문학성이 꼭 수려한 표현들로 덕지덕지 포장한다고 완성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분명히 말할 수 없으니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스토리는 매우 비겁하네요. 대놓고 얘기하지도 못할 걸 왜 쓰는 겁니까? 주제가 명료해지긴 하겠습니까?”
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고 차갑게, 공중에 글자를 하나씩 박아 넣는 것처럼 말했다. 열이 오르는 건 내 쪽이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내 글에 대한 소감과 의견이니 나를 향한 비난이나 다름없었다.
“뭐라고? 곤 당신이야말로 예술성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글을 뭐라고 이름 붙일 건데?”
나도 모르게 막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드디어 코니가 볼펜을 테이블에 던졌다.
“그만! 지금 두 사람 다 뭐 하는 거야? 합평에티켓 첫 번째, 모두의 시간 배려하기. 두 사람은 여기 있는 나머지 멤버들의 귀한 시간을 뺏었어. 두 번째, 경청의 자세 유지하기. 자, 어때? 두 사람 다 경청은커녕 서로 반박하고 있잖아. 세 번째, 긍정적 표현 사용하기. 뭐 이건 말할 것도 없겠네. 서로 이렇게나 비난하고 있으니. 네 번째, 합평과 관련된 내용 중심으로 논의하기. 지금 여기가 서로의 문학성, 예술성을 논하는 자리야? 왜 글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합평 분위기를 흐리고 있지? 두 사람 모두 정말 실망이야. 이럴 거면 다음 주부터 나오지 마.”
처음 보는 코니의 모습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곤마저도 이번엔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자, 자. 선생님들, 다 진정하세요. 우리 십 분만 쉬었다 할까요?”
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배에 공손히 모으며 모두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그, 그래. 바람 쐬자. 밖에 나가자.”
제러미도 어떻게든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코니가 일어나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로 닥터 윤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단 몇 분 사이에 수소 폭탄 몇 개가 터진 것처럼 합평회는 초토화됐다.
그 후 며칠이 지났다. 시애틀에 잘 오지 않는 폭설이 내려 합평회가 취소됐다는 단체 문자가 올라왔다. 눈이 오면 학교, 회사, 가게들이 다 문 닫는 시애틀의 하얀 풍경이 생경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여전히 낯선 풍경이다.
갈멜은 떠나온 쪽을 돌아봤다. 돔은 바깥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얗게 처리되어 있다. 수십 년을 살아온 곳인데 이젠 전혀 알지 못하는 곳처럼 낯설다. 그는 생각했다. 진짜 내가 저곳에서 살았던가. 아니면 꿈속에서 본 장면처럼 잠시 내가 착각했던 건가. 갈멜은 이 어색한 감정을 뭐라 부를지 몰랐다.
랩톱 워드 창 위로 지난주에 썼던 마지막 부분에 커서가 깜빡이며 서 있다. 시간도 깜빡이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와 갈멜도 함께 떠나온 쪽을 돌아보며 섰다. 그러다가 문득 쓰고 싶은 문장이 생겨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었다.
갈멜은 다시 돌아 타운 쪽을 향해 걸었다. 그냥 걷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다. 걸음마다 한숨이 찍히고, 질문이 찍히고, 후회가 찍혔다. 그러다가 분명한 건 해가 지는 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 언젠간 서쪽 타운에 도착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젠 희망이 찍히고, 평안이 찍히고, 목적이 찍혔다. 그가 가야 할 곳, 원래 있어야 했던 곳을 향해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타운, 아침엔 해가 뜨고 저녁엔 그 해가 바다로 진다는 곳으로.
나는 이 한 문단을 크세니엔 단체방에 문자로 보내고 그 밑에 이렇게 적었다.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 쓴 건 이것뿐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곤의 문자가 올라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해가 바다로 걸어갔다. 왕은 바다에 풍덩 빠진 해가 바다의 푸른 색과 자신의 붉은 색이 섞여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풍경을 바라봤다. 신이 만드신, 더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본질이 섞여 저녁 내내 물결쳤다.
그리고 그 밑에 이런 문자가 하나 더 올라왔다.
‘저도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 쓴 건 이게 다네요.’
그 뒤로 다른 멤버들이 말을 이었다. 죄송하다는 사과의 문자와 함께.
닥터 윤 : 열다섯 살 소녀는 해를 삼킨 바다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난 이제 어른이 될 거야. 뜨거운 낮은 이제 내게 없지만 차가운 바다를 품고 더 많이 키를 키울 테니까.
온유 : 그녀의 조각난 마음은 이제 하나가 됐다. 더는 고통을 참기 위해 자신을 여러 개로 나누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만큼 아팠으니.
제러미 : 그녀 말했다. 언젠가 바를러 갈 거야. 댄 엥겔 호텔 레스토랑 밥 먹으러. 벨기에 네덜란드 두 쪽 다 발 걸치고.-그는 여전히 조사 사용에 편하지 않다.-
코니 : 결국 목적지는 하나였네. 그래, 원래 하나였던 거야. 너희들이 그동안 몰랐던 거지. 갈멜 이야기는 왕, 열다섯 살 소녀, 조각난 마음의 다중인격자, 두 국적 모두에 속했던 혼혈인의 이야기를 모두 돌아 목적지인 타운에 이르렀다. 괴테와 실러의 합작품처럼 크세니엔은 그렇게 완성됐다.
저마다 그 주의 분량을 몇 줄짜리 문자로 채웠다. 코니는 그들의 이야기 조각들을 꼼꼼히 풀로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녀의 손톱 위에 붙은 작은 사슬들이 서로 부딪쳐 파도 소리를 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났다. 폭설이 내리던, 유난히도 추웠던 시애틀의 겨울이 지나 봄 그리고 다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각자의 이야기는 사계절을 돌아 한 살을 먹었다. 이젠 우리가 스스로 걷게 되었으니 코니의 역할도 좀 가벼워지지 않았을까. 곤과 나는 쑥스러워 왜 그때 그런 문자를 연결해 달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멤버들도 서로 그 일에 관해 묻거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괜히 쑥스러워하는 한국인의 성격을 모두 한 자락씩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온전한 미국인인 온유마저도 그랬다.
내 글은 일 년 새 많이 날카로워졌다. 내용이나 감정보다 좀 더 땅에 붙인 글을 쓴다. 곤의 글은 반대로 아름다워졌다. 난 꼭 그렇게 말하고 싶다. 때론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에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그의 글은 과학과 문학 가운데 어디쯤에서 여전히 헤매는 중이지만 난 굳이 그가 그것 중 택일하라고 하고 싶진 않다. 완전히 섞이지 않더라도 하나면 하나인 대로 둘이면 둘인 대로 좋기 때문이다. 코니는 시애틀에서의 일을 마치고 곧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기 전에 할 일은 마치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크세니엔 단체방에 마지막 합평 공지를 올렸다. 우리가 늘 모였던 K포차에서 난 블루문 하나와 치즈 프라이즈를 주문하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기 전에 제러미 흉내를 내며 어깨와 손가락을 과하게 풀어줬다.
창밖으로 오후 다섯 시면 어두워지던 바깥 풍경이 어느새 밤 아홉 시가 되어도 대낮같이 훤했다. 오늘도 우리의 전투 장비인 랩톱이 테이블 위에 열 맞춰 서 있다. 마주 보고 긴 쪽에 두 대씩, 짧은 쪽엔 한 대씩이다. 들어오는 문 앞 자리엔 코니가, 그 건너편엔 온유가 앉았다. 그리고 나머지 네 명 중 제러미와 내가 코니의 오른쪽에, 닥터 윤과 곤이 왼쪽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랩톱 커버만 봐도 다섯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났다. 코니의 커버엔 반짝이, 스티커, 작고 털 달린 인형들이 붙어 있었다. 온유는 회색부터 검은색으로 그라데이션된 커버만 씌웠을 뿐,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닥터윤은 치과 의사여서인지 치아 캐릭터와 온갖 치과용 도구들 스티커로 도배되어 있었다. 제러미는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의 사진과 앨범, 기타 스티커들을 광신도급으로 몇 겹을 붙여놨다. 곤은 학교에서 나눠준 스티커 두 개와 태극기 스티커 두 개를 각 모서리, 똑같은 자리에 각 맞춰 붙여놨다. 내 랩톱엔 지난 생일에 동생이 만들어준 내 얼굴 스티커와 알파벳을 붙여 만든 내 이름, 그게 다였다. 난 그렇게 내 랩톱에 확실한 정체성을 부여했다.
“오늘은 다들 긴장되지? 제러미만 빼면 다들 길이가 비슷비슷해서 스토리를 끝내는 사람이 분명 나올 거야. 그렇다고 대충 엔딩을 뭉개면 안 돼. 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합평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합평 자리에서 모두가 인정할 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평이 나오면 탈락, 동의하지?”
“코니, 왜 난 빼? 나 많이 썼다. 응?”
“그래, 제러미. 오늘 너에게 그분이 꼭 내리셔서 역전승할 수 있길 바라. 그러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 오케이?”
“오케이. 컴온, 다 죽었어.”
제러미는 몸을 크게 부풀려 적을 위협하는 동물처럼 과도하게 어깨와 손목을 돌려댔다. 지금부터 두 시간. 남은 글자 수는 대략 이천 자 정도. 속도도 속도지만 퀄러티를 끌어올려야 한다. 모두의 입과 코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그럼, 지금부터 시이작!”
코니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K포차 손님들의 눈동자가 모두 우리 테이블 쪽으로 쏠렸다. 큰 음악 소리를 뚫고 전쟁터에 폭격이 시작됐다. 이 진귀한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 오늘 SNS에서 최고의 화제 영상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의식적으로 눈이 곤 쪽을 향했다. 건너편에 앉았기 때문에 티 나게 고개를 들지 않아도 그가 잘 보였다. 그는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눈은 화면에 고정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자세를 잡았다. 곤도 이번엔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마지막 사투를 다 하는 손가락들이 키보드를 부술 듯하다. 하얀 디지털 종이 위로 까만 글씨들이 찍혀 내려간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갈멜은 자신의 숙적이었던 젠의 수장, 후림과 마주보고 섰다. 둘은 이 빗속에서 마지막 결전을 치룰 것이다.
“지금 쏘셔야 합니다!”
화조가 갈멜의 팔을 붙들며 외쳤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 분명 신이 주신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왠지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섰다.
“뭘 망설이고 있어요? 빨리 쏘라고요!”
방아쇠에 얹은 갈멜의 집게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후림이 쏘기 전에 먼저 쏴야 한다. 그건 갈멜이, 그리고 거기 있는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후림 또한 땅에 붙박힌 듯 서 있다. 비가 지워버린 둘 사이의 시간 속에서 어지러운 생각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다 썼다! 다 썼다고!”
닥터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힘차게 뻗어 올렸다. 시작한 지 한 시간 사십 분이 지나서였다. K포차 안 사람들의 함성도 함께 터졌다.
“안 돼! 나 거의 다 썼다. 거의 다 썼다. 이거 아니다, 아니다.”
제러미는 우리 중 가장 억울해했다. 하지만 슬쩍 곁눈질로 본 그의 랩톱 화면엔 턱도 없는 분량의 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커서를 눈동자처럼 껌뻑이며 서 있었다. 그건 비밀이다. 그리고 나와 곤은 서로의 랩톱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넌 아닐 줄 알았다’며 서로를 마지막까지 견제했다. 난 처음으로 곤의 눈이 호기심 어린 열 살짜리 남자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래성을 쌓으면 그 옆에다가 더 큰 모래성을 쌓으며 으스대는 유치한 친구처럼. 어쩌면 내가 쓴 갈멜 이야기의 끝은 그가 쓴 판타지 세계관에 맞닿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갈멜이 찾아가려던 바깥세상은 분명 그에게 익숙한 곳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곳이었을 테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날 술에 기분 좋게 취한 코니는 술집을 떠나기 전, 자기 가방 안에서 고등어처럼 펄떡이는 천 필통을 꺼내어 공중으로 던졌다. 그리고 닥터 윤이 그것을 잡기 위해 높이 뛰어올랐다. 순간 그의 바짓가랑이가 터진 걸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것이 내 두 번째 비밀이다. 그리고 사실, 그날의 비밀이 하나 더 있다.
“다 썼다! 다 썼다고!”
닥터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힘차게 뻗어 올렸다. K포차 안 사람들의 함성도 함께 터졌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온유는 그 소리에 조용히 자신의 랩톱을 덮었다. 그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드 창에 ‘-끝-’을 적어 넣은 지 이미 십 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