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에 어떤 촉감이 드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흙냄새가 진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껄끄러운 모래 알갱이를 가득 안고 와 바닥에 흩뿌리며 지나갔다. 그리고 길거리의 몇몇 사람은 하얀 마스크 속에 바쁜 도시의 표정을 숨기며 금세 골목 뒤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 바람이 강하게 불겠고, 벼락과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오는 곳도 있겠습니다. 또한황사가 비에 섞여 내릴 가능성이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도 약화될 전망입니다.”
기상캐스터의 목소리가 길옆 전자상가 티브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옆을 현수가 여행 가방을 끌며 지나갔다. 그는 가끔 손으로 까만 테 안경을 걷어 올리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 십 분 전. 그렇게 그의 걸음걸이는 정확한 간격으로 박음질하듯 길을 똑바로 걸어 어느 벽돌색 단층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THE WINE’이라고 투박하게 고딕체로 적은 간판이 바람에 세차게 흔들렸다.
현수는 천천히 여행 가방을 곁에 내려놓은 뒤, 바지 주머니를 뒤져 금빛 열쇠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머리를 구멍에 들이밀어 몸을 한 번 비틀더니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로 길을 열었다. 가방을 들여놓고 문을 닫아걸자, 그곳은 밖과 전혀 다른 세상인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는 익숙한 듯 먼저 열쇠를 카운터 서랍에 집어넣고, 재킷과 가방을 테이블 곁에 내려놓았다.
열두 개의 테이블은 저마다 의자들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주방과 현관을 뺀 나머지 두 면의 벽에는 강렬한 붓 터치와 알록달록한 색감이 인상적인 그림 두 점이 사람 키만 한 높이로 걸려 있었다. 너비는 어른 남자가 양팔을 펼쳐 든 만큼 되었다. 그리고 두 면이 만나는 모서리 창가 구석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작년 가을이었다. 무작정 와인바를 한번 해 볼까 하는 마음에 덥석 계약했다. 크게도 말고 딱 테이블 열 개 정도 들어갈 만한 크기로, 이렇게 늙어가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추억할 만한 사람들이 종종 찾아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현수는 리모컨을 들어 조명을 은은하게 켜고, 전체 스피커로 라디오 뉴스 채널을 틀었다. 그리고 히터를 이십육 도에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그의 몸이 비틀거렸다. 열 시간 비행이 주는 피곤함에 그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이제 열 시간은 무리야. 그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몹시도 지치게 한다는 것에 대한 누구나 느끼는 보편적 절망감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가방에서 자신의 악보집을 꺼내 들어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그 악보집 사이엔 공책 크기만 한 노란 봉투도 하나 끼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크게 숨을 내쉰 뒤,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오랫동안 히터를 틀지 않아 피아노 건반은 차갑게 얼어 있었다. 심지어 키 몇 개는 당장 조율을 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문화계 소식입니다. 이번 토요일이죠? 사월 칠일부터 한 달간 전국 각지를 대표하는 열두 개의 교향악단이 공동으로 무대를 마련합니다. 올해는 특별히 한국계 피아니스트 박현수 씨가 함께한다네요. 정말 국내 팬들에게도 남다른 곡 해석과 표현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시는 박현수 씨, 기다리시는 분들 많으셨죠? 늦기 전에 예매하시길 바랍니다. 예매하실 곳은……”
라디오에서 현수의 협연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피곤한 것이 다시 생각났다는 듯, 카운터로 돌아가 라디오를 꺼버렸다. 공간엔 적막감이 돌았다. 그는 메인 화면으로 바뀐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일곱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문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게 안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반엔 수많은 종류의 와인 잔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얼른 앞 수건에 손을 닦고, 문을 열었다. 팔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문밖 남자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곱게 뒤로 빗어 넘기고, 귀 전체가 다 가려지도록 귀마개를 하고 있었다.
“김정환 선생님이십니까?”
노인은 현수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락도 없이 몸을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여기 앉으세요. 대접할 것이 와인밖에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노인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현수는 의자 하나를 테이블 아래로 내려놓곤 곧바로 와인셀러로 향했다. 노인은 아주 절제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려 가게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귀마개와 목도리를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느린 동작으로 현수가 내려놓은 의자에 앉았다.
“순서가 바뀌었네요. 인사를 먼저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박현수라고 합니다, 선생님.”
현수는 와인 잔을 노인 앞에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나는 김, 정환이오.”
노인은 매우 간단히 자기를 소개했다. 현수 역시 피아노 의자를 살짝 끌어와 노인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제가 직접 찾아 뵈어야 하는데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라 해서 죄송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날씨에… 저도 이렇게 바람이 심할 줄은 예상 못 했습니다.”
“그래, 내게 줄 것이 있다고? 그게 무엇인가?”
노인은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것을 드리기 전에 먼저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현수는 지갑 속 오래된 사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노인 앞에 내어놓았다. 노인은 딱딱하게 구겨진 악어가죽 같은 손으로 사진을 들어 올린 뒤, 다른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잠깐 그 상태로 사진을 유심히 보던 노인의 눈이 순간, 장님 눈 뜨듯 번쩍 떠졌다.
“이건!”
“저희 어머니 젊으셨을 때 사진입니다. 이름은 원 마리아. 기억하시겠습니까?”
노인은 말없이 메마른 손으로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오래전 그 날을 기억해 내려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니, 작곡 공부를 하겠다는 놈이 이게 뭐야? 화음이고 뭐고 맞는 게 하나도 없잖아! 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교수님, 제가 느끼기엔 이것이 맞는 것 같아서…”
“뭐야?! 음악이 뭔지도 모르면서 어디서 느낌을 운운하고 있어!! 이따위로 할 거면 당장 때려치워!!”
김 교수는 안 그래도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정환이 밤새 그린 오선지를 그의 눈앞에 찢어 던져 버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음표만큼이나 정환의 마음도 사방으로 찢겨 흩어져 버렸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정환은 수업도 들어가지 않은 채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를 손에 쥐고 건반 위에 엎드려 있었다. 연습실에 홀로 그렇게 두어 시간을 있었던 것 같다. 오직 창으로 들어오는 봄볕만이 그의 등을 위로하듯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때였다.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사람이 있었네? 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죄송해요.”
마리아는 문을 닫고 나가려다 잠시 멈칫했다. 정환의 모습에 왠지 걱정되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은 갈기갈기 찢어진 오선지에 꽂혔다.
“작곡과 학생이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작은 웅덩이에 물방울이 튀는 듯했다. 하지만 정환은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뭔가 과제가 잘 안 되나 보죠? 괜찮아요. 저도 글이 잘 안 써질 땐 원고지를 박박 찢어버릴 때가 많으니까. 여기 온 것도 그래서예요. 내 맘대로 글이 잘 안 써지면 가끔 들르곤 해요. 이 시간은 늘 비어있길래. 오늘은 이미 자리를 뺏겨 버린 것 같지만.”
정환은 짜증이 밀려왔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쫓아 버려야 하는지 그는 잘 몰랐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녀를 잠시 그렇게 두기로 했다.
마리아는 빙그르르 돌아 창가에 몸을 기대어 섰다.
“원래 예술이라는 게 다 그래요. 문학도 글로 하는 예술이니까 뭐, 같은 맥락으로. 오늘도 그랬어요. 저희 교수님은 제 시가 난해하다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 딱 보기에도 그 느낌인데.”
오랜 시간 감고 있던 정환의 눈이 ‘느낌’이라는 단어에서 번쩍 떠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느낌이라고 했습니까?”
“어머나 깜짝이야! 갑자기 일어나면 어째요?”
그녀의 얼굴이 입고 있는 원피스 색처럼 점점 붉어져 갔다.
“지금 느낌이라고 말한 거.”
“느낌이요? 그게 뭐요?”
정환은 따져 묻듯 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그냥 딱 그 느낌이라고 말한 거 있잖습니까.”
“네. 말 그대로예요. 아, 이제야 알았네요. 네. 그래요. 제가 좀 이상하죠. 그래서 어디 가서 말도 못 해요. 누가 내 말을 믿겠어요? 우리 엄마도 안 믿으실걸요? 어쩌면 저를 정신병자 취급하시면서 병원에 처넣으실지도 모르죠.”
그녀의 몸이 벽을 타고 바닥으로 털썩 내려앉았다.
“사실 난 글자를 보면 색깔이 보여요. 그 글자들은 각각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다시 조합되면 조금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예를 들어, ‘ㄱ’은 약간 물 빠진 보라색에 가까운데 ‘강’하면 그 진한 보라색에 ‘ㅇ’의 개나리 같은 노란색이 섞이면서 조금 다른 색이 돼요. 그리고 ‘ㄴ’은 뭐랄까? 비 올 때 젖은 흙 색깔이요. 그런 색인데, ‘남’이라는 글자처럼 ‘ㅁ’이 붙으면 ‘ㅁ’이 가지고 있는 잔디색이 섞이면서 들판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정환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뭐라는 거야?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 그러니까. 뭐 그렇다고요. 제가 말했잖아요. 좀 이상하다고. 글자를 색으로 보는 것이 어디 정상이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이상하게 보지는 말아요. 나도 내가 이상하다는 걸 잘 아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엉덩이의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아뇨. 정상입니다.”
정환이 말했다.
“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몇 초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가볍게 서로의 이름을 나눈 둘은 학교를 나와 밭둑을 함께 걸었다. 옅은 초록빛 풀들이 저마다 손을 뻗어 둘의 발목을스쳤다. 길 위엔 길게 꼬리를 단 발자국들이 무늬처럼 흙 도장을 찍었다. 마리아는 정환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의 발자국에 자신의 것을 덧입혀 갔다. 발밑에서 젖은 흙이 자박자박 찰진 소리를 내었다.
“아… 그럼 정환씨는 소리를 통해 어떤 다른 감각을 느끼는 거죠?”
“저는 소리를 촉각으로 느낍니다.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아뇨, 아뇨. 충분히 이해가 돼요. 그저 신기해서.”
“뭐가요? 소리를 촉감으로 느끼는 거 말입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해서요. 이 세상에 우리 같은 사람이 더 있을까요?”
그녀는 늘 걷던 길에서 전에 보지 못한 예쁜 야생화를 발견한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정환은 발끝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에 어떤 촉감이 드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정환은 몸을 돌려 마리아를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예를 들어 마리아 씨 목소리는 린넨 재질의 손수건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납니다. 그런 기분 좋은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정환은 다시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뜨렸다.
“와… 내 목소리는 그런 느낌이구나. 신기해. 그리고 또요? 다른 건요?”
“개구리 울음소리는 사기그릇에 닿는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여름밤, 개구리가 한꺼번에 울어댈 때면 얼마나 괴로운 줄 아십니까? 사기그릇 수백, 수천 개가 내 몸에 쏟아지는 것 같단 말입니다.”
“하하하… 정말 그렇겠네요. 개구리 소리가 사기그릇에 닿는 느낌이라니. 정말 독특한 느낌이에요. 상상도 못 했던. 정말 재미있어요.”
그녀는 정신없이 웃다가 밭둑 아래로 떨어질 뻔하기도 했지만, 다시 균형을 잘 잡고 걸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오전에 교수님께 혼이 난 것처럼 말입니다.”
“아… 그걸 찢은 게 교수님이었구나.”
“네. 이것을 능력이라 해야 할지, 장애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작곡할 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도에서 시까지 음마다 느껴지는 촉각이 다 다른데, 저는 그 느낌이 비슷한 것을 묶고, 또다시 표현하고픈 강약을 조절하기 위해 음을 재배치하곤 합니다. 제 감정을 촉감에 비교하여 그룹으로 묶어 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촉각을 느끼지 못하는 보통 사람에게 그 음표들은 그저 화성도 엉망이고, 곡 같지도 않은 기행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정환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제가 ‘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를 사용할 수 없다니요?”
마리아도 그의 뒤를 따라 걷다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 ‘시’라는 음은 좀 특별한 감촉을 주는데, 그건 바로 칼에 베이는 것 같은 통각이기 때문입니다.”
“통각?!”
말을 마친 정환은 홀로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마리아가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통각이라고요? 그러면 ‘시’ 음을 들으면 아프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곡하는 모든 곡에는 ‘시’가 빠져 있습니다. 작곡가가 어느 한 음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큰 장애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런 내가 작곡가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까 연습실에서 그것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 길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말을 끝으로 정환은 밭둑을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마리아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것이 어머니가 선생님을 위해 쓴 첫 번째 시였습니다.”
현수는 자신의 악보집 사이에 끼워 놓은 노란 봉투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종이를 내려다보는 노인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수는 의자를 다시 피아노 쪽으로 당겨 앉았다.
“그 편지는 바로 이 노래였죠.”
그가 연주한 노래는 다름 아닌 ‘고향의 봄’이었다. 다장조로 연주되는 그것은 별다를 것 없는 보통의 ‘고향의 봄’이었다. 연주를 마친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 노래는 ‘시’가 빠져 있죠. 도, 레, 미, 파, 솔, 라는 있는데, 유일하게 ‘시’만 빠져 있습니다. 작년 겨울,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선생님의 이름과 어머니와 함께 다니셨던 대학교명이 적힌 노란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몇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고요. 그것은 어머니의 다른 작품과는 전혀 다른, 기이한 것이었죠.”
“계이름으로 시를 썼다는 것인가?”
노인은 와인 잔을 들어 올리려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네. 첫 번째 시는 ‘고향의 봄’을 계이름으로 적어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는 더 이상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현수는 다시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리아는 연습실 바닥에 엎드려 원고지를 채워가다 펜을 내려놓고 대신 색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글자마다 꼼꼼히 색칠하기 시작했다.
“오늘 시의 주제는 ‘무지개’야?”
정환이 피아노 건너로 얼굴을 내밀며 웃었다. 만남을 거듭하게 되자 둘은 이제 말을 놓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어쩌면 둘이 가진 능력, 혹은 장애가 그들을 더 가까이 붙여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놀리는 거야? 네 것은? 봐 봐!”
마리아는 벌떡 일어나 정환 쪽으로 달려가 오선지를 뺏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이리 내!”
그가 오선지를 잡으려 팔을 뻗자 마리아는 반대쪽 창가로 도망갔다.
“이봐, 이봐. 내 이럴 줄 알았지. 딱 봐도 안 맞아. 음악에 문외한인 나도 알겠는데, 세상 사람들은 오죽할까. 형식이 다 틀렸잖아. 이번에도 또 낙제하면 퇴학이라며!”
마리아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사라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하면 하지 뭐.”
“뭘? 퇴학을? 미쳤나 봐.”
마리아는 오선지를 다시 그에게 내밀며 입을 삐죽였다.
“그런데 ‘솔’은 어떤 느낌이야? 오늘은 ‘솔’ 차례야.”
만날 때마다 음 하나씩을 말해주기로 약속했던 그는 ‘솔’이라는 말에 살짝 망설였다.
“그냥… 뭐 그저 그런… 느낌.”
“뭐? 그냥 그저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 어디 있어? 내가 요즘 보니, 오선지에 ‘솔’이 늘었더라. 도대체 뭔데?”
마리아는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달려들다가, 개기일식이 일어나듯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가, 가늘게 뽑아낸 떡가래처럼 따뜻하고 하얀 손가락을 정환의 가슴에 대고 피아노 치듯 하며 그를 괴롭혀 댔다.
“'솔’은… 그 음은… 그러니까 그 ‘솔’은…”
정환의 목젖이 크게 상하 운동을 했다.
“'솔’은?”
마리아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안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야. 마치 나에겐 사랑 같은…”
순간, 마리아는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나왔다. 정환도 어색한지 피아노 건반만 내려다보았다. “그럼, 요즘 오선지에 ‘솔’을 많이 그리는 것은 혹시…”
“그, 그래. 너 때문이야!”
정환은 드디어 저질러 버렸다고 생각하며 연습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몇 초 동안 멈춰 있던 마리아도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창밖을 넘어 복도까지 울려 퍼지자 정환은 더 빨리 속도를 내어 달렸다.
현수의 피아노 연주도 끝이 났다.
“들으셨다시피 두 번째 시는 다른 음 몇 개를 ‘솔’로 바꾼 변주곡이었습니다. 다소 뭔가 음이 안 맞는 듯하죠. 심지어 지나치게 ‘솔’이 많아져서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처럼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렇구먼.”
노인은 덤덤히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시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지금 바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수는 아까보다 더욱 비장한 표정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왜! 왜 같이 안 가겠다는 거야?”
마리아의 목소리가 연습실 내부를 날카롭게 울렸다.
“너는 미국에 왜 가겠다는 건데?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거긴. 언어도 다르고, 생활 환경도 다르다고.”
정환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리아는 몇 달 전, 미국의 한 대학 교수에게 자기의 시를 보냈다고 했다. 미술과 문학이 혼합된 형태의 시를 본 교수는 그녀를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내왔다.
“이번이 우리에겐 기회일지도 몰라. 그래,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이 장애를, 아니 이 능력을 높게 쳐 줄 수도 있어. 봐! 내 시를 보고도 그들은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하잖아. 난해하다고 하지 않아. 안 그래?”
마리아는 정환의 앞에 편지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해 줄 거라고? 그들은 우리와 생김새도 다르고, 생각도 달라.“
“그래서? 그게 뭐? 어차피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달라. 우리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건 이곳 사람도 마찬가지야. 전에 나보코프라는 사람의 자전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어. 그의 글에서 난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섰어. 그는 미국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곤충학자야. 기회가 되면 그를 만나보자. 이 능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오히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지도 몰라!!”
마리아는 매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와 난 달라!”
“뭐라고?”
“너와 난 다르다고!”
정환의 말에 마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우리는 같잖아. 그런데 갑자기 너와 내가 다르다니?”
정환의 눈에서 전에 보지 못한 침통함이 느껴졌다.
“시에서의 색감적 표현은 은유적으로 쓸 수도 있어. 오히려 훌륭하게 평가되겠지. 안 그래? 얼마나 아름답겠어? 절망은 녹슨 하늘색이다. 미래는 새로이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초록빛이다. 이런 표현이 얼마나 멋져 보이겠냐고. 하지만!”
그는 감정을 억제하며 말을 잠시 멈추고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소리를 촉감으로 이해하는 건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가 없어. 어울리지 않아. 이 빌어먹을 것은 내가 작곡가가 되는 데 장애만 된다고. 더군다나 ‘시’ 하나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내가 무슨 작곡을 할 수 있겠어? 그래, 오선지에 그릴 순 있겠지.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난 내가 쓴 곡을 들을 수도 없잖아, 평생. 안 그래? 그것뿐이겠어? 다른 사람의 곡도 들을 수 없겠지. ‘시’라는 음이 수십, 수백 개씩 나올 테니까. 어쩌면 난 평생 필요에 따라 귀마개를 하고 다녀야 할지도 몰라. 칼에 베이는 느낌은 정말이지!! 너는 몰라. 날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마리아.”
정환은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팔도 힘없이 편지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악!! 그만! 제발 그만해!!”
노인의 몸은 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 같았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양쪽 귀를 힘겹게 틀어막고 있었다. 현수의 또 다른 ‘고향의 봄’ 변주가 끝났다. 노인의 몸은 마치 물에 쓸려온 해파리처럼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것이 세 번째 시입니다. ‘솔’로 바꾸었던 두 번째 시의 음들을 모두 ‘시’로 바꾼 변주. 그야말로 ‘시(Si)’를 위한 ‘시(詩)’죠.”
그는 세 번째 시를 보면대에서 들어 올려 보란 듯 공중에 던져 버렸다.
노인은 꽤 오랫동안 바닥에 누워 있었다. 칼에 난자당한 것과 같을 테니 그 느낌이 가시기까진 꽤 긴 시간이 필요할 터. 그렇게 교향곡 한 악장쯤 끝날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노인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숨소리가 아직도 거칠게 공간을 채웠다. 현수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저의 목소리는 어떤 느낌입니까? 딱딱한 나무를 만지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거친 짐승의 갈기를 만지는 느낌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들어 힘겹게 현수 쪽을 바라보았다. 조명 아래 그의 검은 테 안경이 반사되어 세련되게 빛나 보였다. 노인은 오감을 느끼듯, 두 눈을 꼭 감았다.
“천에 닿는 느낌. 마리아의 것과 닮았군. 재질의 차이는 있지만, 확실히 닮았네. 기분 좋을 정도로 부드럽고.”
“어머니는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이 세상에서 어쩌면 선생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이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반대로 이 세상에서 선생님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어머니였을지도 모르죠. 어머니는 미국에서 쓴 시를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의 눈이 다시 마리아의 사진을 내려보았다.
“온전히 이해해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로군.”
“살아생전에 나보코프 교수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스위스로 떠난 뒤였거든요.”
현수는 말을 마친 뒤, 빈 와인 잔을 다시 채우기 위해 일어섰다.
정환은 마리아가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 들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남겼다는 편지를 열어본 그는 크게 낙담하고 말았다. 온통 색으로만 칠해 놓은 암호 같은 그녀의 편지. 그녀가 정환에게 어떤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을지, 이젠 알고 싶어도 그녀에게 직접 묻지 않고는 알 길이 없어졌다. 정환은 무지개 같이 펼쳐져 있는 색깔 글자들을 보며 허탈하게 울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정환에게 소리에서 느끼는 감촉들이 어떤 것인지 물었을 때, 그는 전혀 그녀의 색깔 글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건 정환,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는 그런 자신을 고통스럽게 견뎌야 했다.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그렇게 견뎌야 할 것이다. 그 색깔 글자 속에는 혹, 사랑했다는 말이 적혀 있을는지, 아니면 화가 났다는 말이 적혀 있을는지. 그는 결국 미안한 마음으로 연습실 바닥에 몸을 뉘었다. 등에 느껴지는 바닥의 차가운 감촉이 마리아의 빈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야 알겠구먼. 마리아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노인은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을 보며 혼자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림 속 한글 자음과 모음은 저마다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은 코트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긴 시간 속에 색이 바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슨 색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는 마리아의 마지막 편지였다. 노인은 편지와 벽에 걸린 그림을 여러 차례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현수가 와인을 다시 채워 오는 시간 동안 아주 공을 들여 그것을 비교했다. 그리고 잠시 후, 현수가 돌아오자 노인은 다시 종이를 접어 지갑 안에 넣었다.
“그런 편지를 알고 있습니다.”
현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런가?”
“네. 어머니는 제가 한글을 깨우칠 때부터 그런 식의 편지를 종종 주시곤 하였습니다. 둘만의 비밀이 생기는 것 같아 재미있었죠.”
그는 그때가 생각난 듯 어린아이처럼 미소지었다.
“저 그림들은 마리아의 것인가?”
“아닙니다. 그림 그리는 미국인 친구가 유독 한글에 관심을 보이길래 글자에 고유색이 있다면 어떨까 하면서 어머니의 색깔 글자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전시회 때 저 그림 두 점을 메인으로 걸어 두었더군요. 어머니 생각이 나 제가 산다고 했더니 전시회가 끝난 후 그냥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젠 어머니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되어 버렸네요.”
노인은 그림을 다시 한번 깊게 눈에 담았다.
“선생님께서도 어머니의 비밀 편지를 가지고 계시는 것 같던데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현수는 노인의 어깨너머로 본 그 편지 이야기를 꺼내었다.
“사실… 오늘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네. 인제야 알게 되었지. 저 그림을 보고서. 고맙네. 오늘 자네를 만난 것은 죽기 전에 이 편지의 비밀을 풀기 위함이었나 보구먼.”
“육십여 년이 지나 알게 된 그 비밀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네요.”
“당신은 매우 특별한 사람. 세상에서도. 나에게서도. 그렇게 쓰여 있었네. 마리아답군. 허허…”
노인의 웃음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내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노인이 물었다.
“네. 그만큼 한국 현대음악에서는 존경받는 분이시니까요.”
현수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내 곡은 시대를 잘 만나 빛을 본 격이라네. 혹자는 나를 한국의 쇤베르크라고도 하네만, 사실 내 음악의 비밀은 아무도 모르네.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 봤자, 소리와 감촉의 연결고리를 어찌 찾아낼 것이란 말인가. 그저 난해하게 들리는 곡에 괜한 호기심들을 가지며 예술이네, 뭐네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작자들의 입놀림이라네. 그래도 그 덕에 인정받고 한평생 잘 놀고 벌었으니, 그것도 나쁜 인생은 아니었구먼. 자네는 내 곡을 이해하겠던가? 공감각(共感覺)을 이해하냐는 말일세.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지. 참새라고 하면 사람들은 머릿속에 갈색을 떠올리고, 짹짹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면서 아주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앞에 총총 뛰어가는 것을 보게 되지 않던가.”
노인의 말에 현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두 손을 가지런히 배에 얹으며 의자에 기대었다.
“히브리어로 마스길이라고 하네.”
현수는 고개를 돌려 노인 쪽을 보았다.
“생각하다, 깨닫다. 라는 뜻이네. 이건 문학적 용어인 동시에 음악적 용어이기도 하지. 음악적으로는 화려하게 기교를 넣어 연주하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문학적으로는 참회시에 붙는 제목이기도 하네. 문학과 음악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더군. 난 그것이 참 좋네.”
노인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마리아는 이해했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언제나 나를 이해하려 노력했으니까. 오늘 자네를 만나 오랜만에 옛날얘기를 하니 기분이 참 좋구먼.”
의자에 온전히 몸을 기대어 누운 노인의 표정은 구름 속에 묻힌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난 이만 가봐야겠군. 곧 기사가 데리러 올 시간이네.”
정환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힘주어 일어섰다.
“선생님!”
현수는 돌아서는 그를 한 번 더 불렀다. 그의 발이 차가운 물에 닿아 놀란 것처럼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한 가지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현수의 질문에 그는 그러라는 듯 몸을 다시 돌려세웠다.
“선생님의 초기 작품엔 분명히 ‘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노인은 잠시 망설이며 고개를 숙였다.
“속죄.”
노인의 낮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미안함이었네. 어느 날, 곡을 쓰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 ‘솔’은 아직 현재같이 내 안에 살고 있는데, ‘시’는 사라졌더란 말이지. 얼마나 오랫동안 ‘시’를 잊고 살았는지… 그래서 난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오선지에 적어 넣기 시작했네.”
노인의 눈길이 깊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고통스럽진 않으셨습니까?”
“고통스러웠네. 하지만 그것을 잃는 것이 더 두려웠지. 답이 됐는가?”
노인은 다시 몸을 돌리려 발길을 돌려 잡았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현수는 그제야 결심한 듯 노란 봉투에서 한 장의 종이를 더 꺼내어 노인 앞에 내밀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남긴 시의 마지막 장입니다.”
노인은 그 종이를 받아 들어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종이에는 온통 ‘솔’이라는 글자와 ‘시’라는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있었다. 그것은 두 글자가 무작위로 나열되는 형식의, 마치 긴 산문시를 보는 것과 같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했을, 시라고 보기엔 힘든 글이었지만 종이를 집어 든 정환의 손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솔’이 있어. '솔’이 있었어. '시’만 남았을 줄 알았는데…."
드디어 노인을 긴 시간 얽어매었던 굵은 쇠사슬이 풀렸다.
“결국, 선생님께 전해져야 할 시이자, 편지인 것 같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선생님을 이곳까지 모시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종이를 내려다보는 노인의 코가 가을철 햇빛 아래 사과처럼 익어가고 있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노인은 종이가 구겨질까 봐 아주 조심이 들어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굵게 패인 눈가 주름 사이로 습기를 머금은 무언가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다시 귀마개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서 문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마리아는 미국에 온 후로 와인을 마시지 않고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시가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 안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그녀의 펜을 꼭 쥐고 놓아주질 않았다. 과연 정환을 떠나온 것은 잘한 일일까?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쉬이 놓아버린 정환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날마다 감정이 널뛰듯 했다. 어느 날은 그와의 추억 속에 빠져 나른하기까지 행복했다가, 어느 날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붉고 뜨거운 감정이 마구 손톱자국을 내며 올라오기도 했다. 그것은 마리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더 강한 이중성을 드러내며 그녀를 흔들어댔다. 그녀는 이제 흔들리다 못해 어지럽다는 듯, 와인 한 모금을 삼키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현수였다. 그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늦은 밤까지 그림을 그린 건지 그의 손에는 도화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어디 한 번 볼까? 얼마나 잘 그렸는지.”
그림의 주인공은 엄마인 마리아였다. 그림 속 그녀는 평소 즐겨 입는 줄무늬 원피스를 입고,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녀 주위를 한쪽은 붉은색이, 다른 한쪽은 짙은 노란색이 둘러싸고 있었다.
“현수야, 이 색은 뭐지?”
마리아는 그림 배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한테서 색깔이 나와요.”
“뭐?!”
마리아의 머릿속에 익숙한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오래되어 색까지 바래진 기억이었다.
“지금은 저 색.”
현수는 와인 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순간, 마리아의 손에서 현수의 그림이 떨어져 내렸다.
“엄마한테서 색이 보인다고?”
현수는 여덟 살이 되어서야 자신이 감정을 색과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이해했다. 행복은 흙색이 섞인 노란색이었다. 그것은 주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버건디 색은 고통이었다. 그것은 주로 각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현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다시 와인 잔을 들었다. 그리고 노인의 발소리가 네모지게 튀어 오르다 버건디 색을 뿜으며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것은 테두리서부터 조금씩 노란빛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그는 텅 빈 와인 바에 홀로 앉아 버건디 색을 다 마셔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악보집을 펼쳐 들었다. 오선지에 그려진 직선과 곡선,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도형들은 마치 한 점의 추상화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건반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곧 피아노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채워갔다. 단조로 바꾼 ‘고향의 봄’ 변주였다. 그것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율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연주해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어머니, 당신의 시를.’
전혀 다른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 있었다. 슬퍼서 아름다운 이 단조 변주곡처럼. 마스길처럼. 그리고 지금 그의 등을 감싸고 있는 버건디 색과 흙색 섞인 노란색처럼.
현수는 다시 의자를 올려놓고, 조명과 히터를 끄고, 가방과 재킷을 챙겨 들고서 와인바를 나섰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에게 안을 열어주었던 시(Si)의 세계는 이제 금빛으로 딸깍하고 잠겼다. 박음질하듯 똑바로 걷던 그의 걸음걸이도 드디어 긴장을 풀고 길게 늘어졌다. 비가 내려서인지 껄끄럽던 공기마저 제법 상쾌해졌다. 그리고 골목 뒤로 사라져 가는 현수의 곁을 강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흙냄새가 진한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