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방인의 세계

“그런 미친 놈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by Boradbury

*반수인, 그녀의 남편


강하게 끌린다는 건 나와 닮아서 일까, 달라서 일까. 지혜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고혹적인 단어들, 논리와 발견들. 그것들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선 지구의 축을 기울일 만한 진동이 일었다.

그녀의 깡총하게 올라간 회색 바지엔 원색의 꽃 그림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패션 잡지 광고에서 본 듯도 하다. 블라우스는 그 반대였다. 매끄러운 보라색 실크 원단이 형광등 빛마저 흡수할 것처럼 어둡게 찰랑였다. 지혜는 그 블라우스의 단추를 목까지 모두 잠그고 있었다. 숨이 막혀 보이진 않았다. 목이 가늘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 되는 토크 콘서트 내내 지혜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대신 줄곧 자신에게 허락된 작은 철제 의자에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들고 내려놓을 때만 겨우 상체를 끌어당겼다가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녀를 반드시 가지고 말겠어.

결심은 바로 행동에 옮겨졌다. 준비해 온 지혜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어 표지 바로 다음 장을 야멸차게 찢었다. 그리고 흡족한 듯 내 입 꼬리도 옆으로 길게 찢었다. 조용한 장내가 금세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음 장도 찢었다. 또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그렇게 했다. 한 다섯 장쯤 찢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녀가 내 쪽을 돌아봤다.

아직도 그 표정은 여전히 최고의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박혀 있다. 예상대로 별 감정을 담지 않은, 얼음 속에 오랫동안박제되었던 인디언 여자 아이 같은 얼굴. 짜릿한 순간이다. 화학조미료와 캡사이신을 마구 때려 넣은 극강의 맛.

책장을 찢는 속도가 점차 빨라져 갔다. 그러다가 두세 장을 한꺼번에 찢고, 그 후엔 몇 장씩 찢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책 한 권을 다 찢고 나니 손가락이 다 아려왔다. 시선은 지혜에게 고정한 채로 이 모든 일을 내가 해냈다.

물론 경호원들은 날 그곳에서 바로 끌어냈고, 그날 난 유명 검색 사이트에 당당히 실시간 검색어 일 위를 차지했다.

“그런 미친 놈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단지 그것 뿐이야? 저 별난 놈을 갖고 싶다, 그러진 않았고?”

“무슨 개수작이지? 하긴 했지.”

지혜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커다랗고 둥근 나무 브러시로 머리카락을 빗기 시작했다.

“거 봐! 내 작전이 먹힌 거지. 딱 그럴 거 같았거든.”

“그럴 거 같았단 건 무슨 뜻이야?”

그녀는 무릎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을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조심이 집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물었다.

“내가 네 강연을 몇 번이나 들었을 것 같아? 아마도 온라인에 떠 있는 영상까지 다 합치면 한… 백 오십 번쯤? 책은 또 어떻고, 못 해도 스무 번은 돌려 읽었을 거야. 그래도 내가 나름 인간 관계에 관해선 유명 강사인데 단번에 못 알아봤을까 봐. 네 그 눈빛은 무척이나 무료해 보였거든.”

“내가? 설마.”

“아니, 맞아. 그런데 난 그게 좋았어.”

“미친 놈.”

“그래, 그런 거, 그게 좋았다고. 크크크...”

지혜는 브러시를 내려놓고, 옷 방으로 향했다. 잠옷 바지 아래로 시체 같이 깡마른 그녀의 발이 적당한 간격으로 움직였다. 열 개의 발톱엔 생기를 붙여놓은 듯 선명한 빨강이 칠해져 있었다. 그것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뿌려진 열 개의 핏방울처럼 차가움과 뜨거움이 섞여있는 듯했다.

그 열 개의 핏방울은 옷 방의 여기저기로 부지런히 옮겨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원피스들이 걸린 옷걸이 앞에서 멈춰섰고, 지혜는 기다란 팔을 뻗어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원피스 하나를 꺼냈다.

“장례식 가?”

“아니, 유니 데리고 동물원 가려고. 장례식 갈 때만 검은색 옷을 입는 건 아니잖아?”

“동물원? 꽤 신박한 패션이군.”

“땡큐.”

지혜는 그러지 않아도 어딜 가나 눈에 띄었다. 키가 백 칠십 오 센티미터나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굽 높은 구두까지 신으면 키 백 팔십 센티미터의 남자들도 눈높이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내 키도 그와 같았지만 그녀는 절대 날 배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높은 굽을 선호했다. 그것도 칠 센티미터 이상이 아니면 취급도 안 해서 우리가 나란히 서는 일은 별로 없었다.

지혜가 가방을 고를 동안 난 구두를 골랐다. 발끝이 살짝 보여 그녀의 생기 넘치는 발톱을 돋보이게 해 줄 검은색 샌들이었다.

“유니는?”

“어머님 댁에.”

“왜 또 엄마한테 맡겼는데?”

“할머니랑 있고 싶다잖아. 유니의 의견을 존중해 줬을 뿐이야.”

그 말을 하며 지혜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 서서 옷 매무새를 매만졌다.

“내 도시락은? 유니 간식은?”

“통밀빵 아보카도 샌드위치 냉장고 안에 넣어 뒀어. 그거 먹어. 유니 건 어제 저녁에 배달 왔어. 아는 언니네 친환경 가게에서 주문했거든.”

“역시 철학이 확실하시네요, 지혜 씨.”

“회사 회식한다고 고기 같은 거 먹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고깃집 근처만 가도 네가 금세 냄새로 눈치챌 텐데.”

“누가 보면 내가 당신을 억지로 채식주의자 만든 줄 알겠어.”

“그런 오해를 누가 해? 난 네 광 팬이고, 네 철학의 굳은 신봉자이며 영원한 협조자인데.”

옷 방을 나가려는 지혜의 허리 사이로 두 팔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빠르게 실크 블라우스처럼 내 팔에서 미끄러져 나가 버렸다. 항상 끝은 이렇다. 아직도 이렇게 매번 내 팔을 빠져나가는 그녀는 여전히 갖고 싶은 존재로, 내 인간관계의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관객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여자를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전 평생 이렇게 모태 솔로로 늙어야 하나요?”

난 답했다.

“토니 모리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가벼운 사랑은 아예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당신의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보군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많은 사람이 연애를 한다고 해서 과연 그게 다 사랑일까요? 사랑한다고 위안하고, 착각하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이렇게 되묻고 싶네요. 여자를 알지 못해서 사랑을 못 하는게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끌어당기는 그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 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의 꼬리를 쫓기보단 그 사랑을 맞기 위한 준비를 하며 덫을 놓으시길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바로 저처럼 말이죠.”

난 꽤 잘 나가는 인간 관계 강연 강사다. 대기업서부터 문화센터까지, 강연 일정은 이미 삼 년치가 모두 차 있다. 출간한 책은 두 권이지만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특히나 남녀 관계에 관한 책, <나는 강박적 사랑을 꿈꾼다>는 각종 연애 클리닉에서도 필독서로 주문할 만큼 이쪽 업계에선 거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지혜 덕분이었다.

난 지혜의 토크 콘서트에서 책을 다 찢어버린 일로 더 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그녀와 결혼에 성공하며 사람들은 우리의 뒷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두 스타 강사의 결혼, 그것도 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결혼까지 갈 수 있었던 내 전략은 뭇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기까지 했다. 물론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종종 사회면 기사를 장식하는 스토커들의 변명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한편으론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기자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책을 다 찢어버리는 괴이한 이벤트를 벌이고서도 여자의 마음을 잡은 비결이 뭡니까?”

난 답했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만큼 인생에 대해 알게 되면 강박적인 사랑의 힘을 과소평가하진 않을 거다.’ 전 제 사랑을 강박적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지혜 씨는 제 그 사랑을 한눈에 알아본 거죠.”

물론, 그 후로 ‘강박적 사랑’을 신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늘어났는지, 그건 참으로 내가 이 사회에 사죄할 일이다.

지혜는 토크 콘서트 다음날 내 회사로 직접 연락해서 만나자고 했다. 난 그녀의 책을 새로 사서 가져갔다. 그런데 그 날은 그녀가 자신의 책을 모두 찢어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찢어도 내가 찢어요, 내 책은.”

제대로 그녀를 엿 먹인 셈이었다. 같은 골자로 나 역시 그녀에게 제대로 엿 먹었지만 이로써 서로 한 대씩 주고 받은 것이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꽤 세게 얻어 맞은 것처럼 속이 쓰려 오긴 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꽤 잘 섞일 것 같은데, 부류가 같아서. 결혼 할래요, 지혜 씨?”

지혜는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지만 그건 내게 고개를 끄덕이는 행위보다 더 직설적인 긍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늘 주장하던 ‘자연주의’가 사랑으로 치환되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사여구를 모두 뺀 날 것 그 자체의 강박적 사랑을 말이다.

강박적 사랑은 말 그대로 강박적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과연 강박적이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가진 여유로운 마음이 죄다 사라진 듯 초조해진다. 덫을 놓고 새가 그 덫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줄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졸아든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결국 두 손에 잡아 쥐고서도 이것이 도망갈까 봐 내내 염려한다. 거기서부터 강박이 시작된다. 반드시 놓치지 않을 거란 의지가 불안을 낳고, 논리와 이성을 놓친 채 어떻게 해서든 붙들어 두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지혜는 커피 대신 뜨거운 물과 루이보스차 티백을 따로 주문했다. 그리고 티백을 일분 정도만 담가 우려냈다. 티백에서 샛빨간색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금세 투명했던 찻잔 전체를 물들였다. 그녀는 허리를 등받이에 붙이지도 않고 곧게 앉아 한참동안 차 마시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다 가끔씩 눈을 들어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나 역시 그런 그녀를 가만이 바라보기만 했다.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를 세심히 둘러봤다.

오른쪽 눈썹 옆에 작은 점이 하나, 입술 위에도 하나, 미간에도 하나, 왼쪽 눈 밑에도 하나. 점에서 점으로 천천히 눈을 이동시켰다. 마치 그녀 얼굴에 선을 그어 나가듯 가느다란 길을 냈다. 점이 다 보일 정도의 아주 옅은 화장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그것 역시 그녀가 주장하는 자연주의 철학과 관련이 있을 거로 추측했다.

지혜의 책은 재생 종이로 만들어졌다. 각종 환경 단체의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녀가 입고 있는 옷도 합성섬유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고, 구두도 동물 가죽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소신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 그건 그녀의 무기였고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게 하는 능력이었다.

“반수인씨, 하나만 물을게요.”

긴 침묵을 깨고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 그녀의 입술에 집중했다.

“그럼요, 무엇이든지요.”

“난 누군가에게 내 뜻을 강요하지 않아요. 사람은 각자의 결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동의합니다.”

“아시다시피 난 자연주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요. 제가 하는 요리나 입는 옷, 사용하는 물건, 매니큐어를 포함한 화장품 그리고 살고 있는 집과 환경까지 모두 그 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죠. 당신이 저와 함께 살려면 이 모든 것에 동의해 줘야 해요.”

“물론이죠. 동의합니다.”

내 거침없는 대답에 그녀는 잠시 쉼표를 찍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몇 십 초 정도 지나 다시 입을 열었다.

“반수인씨, 그럼 그 동의를 믿고 한번 만나보죠.”

지혜는 중요한 계약을 성사시킨 브로커처럼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난 그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하루 아침에 늘 먹던 음식부터 손에 붙은 물건들을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바꾼 건 식단이었는데 그것이 비교적 제일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혜는 내게 친환경 음식을 반조리 형태로 배송해 주는 업체 몇 군데를 소개했는데 간편하고, 가격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해독 다이어트도 한 것처럼 온몸이 가벼워지고 체중도 줄어서 좋았다.

지혜와 내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녀가 선물해 주는 생활용품들이 집안 곳곳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가끔은 그녀가 직접 와서 집안 여기저기를 손봐 주기도 했다. 천연 수세미가 싱크대 옆에 놓여졌다. 계피 스프레이를 만들어 와 모든 침구와 소파에 뿌렸다. 냉장고엔 유자청과 모과청이 사계절 내내 떨어지지 않았다. 욕실에도 재생 휴지와 천 수건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깊이가 있는 청자 잔에 모과청 한 숟가락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런데 하얗게 천장으로 오르는 김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피아노 선율이 겹쳐졌다.

“드뷔시?”

“응. <렌토보다 느리게>. 선이 우아해서 좋아. 군더더기 없어서 더 좋고.”

지혜는 얼마전에 우리 집에 레코드플레이어를 하나 사다 놓더니 올 때마다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틀었다. 유행가나 재즈는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오로지 클래식만이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

“클래식은 괜히 클래식이 아니야. 인간 본연의 감정, 자연의 감동이 담겨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지.”

“너의 세계와도 닮았네.”

“나의 세계? 음… 그거 좋다.”

잔을 받아 든 지혜가 눈꺼풀을 내려 깔고 모과향에 집중했다.

“네 사랑은 어때?”

“뭐가?”

잔 끝에 닿은 연분홍색 입술에서 아주 작게 후루룩 하고 소리가 났다.

“네 사랑도 순수하냐고.”

“순수?”

웃겨, 라고 말하듯 그 예쁜 연분홍색 입술이 아주 작게 위아래로 찌그러졌다.

“사랑이란 감정보다 더 솔직한 감정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야.”

“세상에 그런 감정이 있어?”

“어린 아이들이 자기 부모의 목을 끌어안고, 그 품에 안겨 ‘사랑해요.’라고 말한다고 그게 과연 사랑일까? 그건 그냥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준 것에 대한 보상이야. 또한, 지속적인 안전을 요구하는 행위지. 단순하잖아?. 난 그게 더 순수한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해. 매우 자연스럽고. 사랑이란 감정은 얼마나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 감정인지… 하아…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상대방을 간섭하고, 강요하고, 때론 그 감정의 끝에서 폭력을 휘두르거나 죽이기도 하잖아. 그런 감정에 어떻게 감히 순수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단 거야?”

그런 지혜의 모습이 좋다. 알싸하다. 온갖 가식으로 느끼한 세상에 던지는 탄소 폭탄 같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 안의 더러운 것들이 모두 정화되는 기분이다. 까무러치게 상쾌하다.

통밀빵 아보카도 샌드위치는 냉장고 중간 층,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유니가 먹는 음식은 주로 업체를 통해 주문했지만 내 도시락은 지혜가 직접 준비하는 편이었다. 이유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내 점심 도시락이라고 해 봤자 고작 샌드위치나 샐러드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유니는 한창 성장기이기도 하고, 아이의 입맛에 맞춰 매번 다른 음식을 준비하기엔 지혜가 너무 바쁘단 걸 잘 안다.

오늘은 다행히 외부 강연이 없는 날이다. 하지만 여전히 집에서 할 일은 많다. 그러나 모든 일에 앞서 할 일이 있다. 하얀 차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얹었다. 그리고 물이 끓길 기다리면서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를 틀었다. 굵은 첼로 현이 엮어내는 소리는 언제나 농염하다. 지혜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 같이, 그것들은 안개 낀 날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 글쓰기엔 최고의 환경이다. 어느덧 난 타고르의 시, <나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낮이나 밤이나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모든 욕망은 거짓된 것이며

허무한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 숨겨두고 있는 것처럼

의식의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용한 호수에 떠 있는 작은 배를 상상했다. 그리고 배 안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나와 물결이 만드는 평안 속에 잠시 머문다. 그 의식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눈을 감는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의식을 탐닉하는 시간이다. 배가 바람에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빙그르르 돈다. 조금 어지럽지만 티 내지 않기로 한다. 촌스러우니까.

욕망을 배제한 시간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그건 단단히 숨겨놓아 좀처럼 옷자락도 잡기 힘들지만 내 깊숙한 의식에 집중하면 곧 찾을 수 있다. 딱딱한 두개골을 뚫고, 야들야들한 풀잎들이 침투한다. 거기선 다시 꽃봉오리가 맺히고, 아기 엄지손톱만한 노란 꽃이 피어난다. 뇌를 간지럽히는 그 작은 생기가 단어들을 토해낸다. 그리고 그 단어들이 서로 몸을 붙여가며 하나의 문장을 만든다. 인간의 욕망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은 아주 단순한 문장들을 하얀 종이 위에 적는다.

내 글쓰기는 대체로 그런 식이다. 지혜를 만나 그 윤곽은 더 또렷해졌다. 이번 책은 그녀와 나 그리고 유니의 이야기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묶어 낼 계획이다. 그것을 먼저 제안한 건 출판사였지만 나름 재미있는 작업이 될 거란 기대에 나 역시 흔쾌하게 사인했다. 요즘 에세이 추세가 한 가지 주제로 묶어 내는 것이라는데 인간의 욕망만 가득한 이 세상, 거기서 살아가는 마음마저 오염된 독자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난 지혜의 하루 일과를 떠올렸다.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커다란 통 유리 문을 열고 햇빛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트레칭을 한다. 그 다음엔 뒷마당으로 나가 아침 식사와 내 점심 도시락에 쓸 채소를 왕골 바구니에 담아온다. 잎 채소들은 손으로 잘게 찢어 넣고, 제철 과일을 갈아 드레싱을 대신한다. 비트는 살짝 찌고, 자색 고구마 두어 개와 색이 다양한 알 감자가 오븐에 구워진다.

여기까지 준비되면 집 앞에 도착한 그 외의 것들을 들고 와야 한다. 매일 아침에 배달되는 통밀 빵, 무 항생제 계란, 산양 우유가 그것들이다. 지혜는 정확히 내 샌드위치까지 계산해 매일 빵을 주문한다. 계란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몰아서, 산양 우유는 매일 가족 수대로 오백 밀리리터짜리 세 병을 주문한다.

지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텃밭 가꾸기와 글쓰기에 집중한다. 강연이 나처럼 많진 않지만 가끔 그 일로 나가거나 사람을 만나곤 한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연과 자꾸 살을 맞대고, 자연의 냄새를 맡고,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 인간은 본연의 감정 그리고 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그 모습은 마치 경건한 종교의 설파자 같기도 해서 많은 사람이 나처럼 그녀의 신봉자가 되기도 한다.

아, 그 이야기도 책에 쓰면 좋을 것 같다. 셋이서 평상을 만든 일.

어느 날 지혜가 어디서 통나무를 작은 트럭으로 한가득 가져왔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환경 가구 업체 사장에게 특별히 부탁한 거라고 했다. 그 가구 업체는 규모가 크진 않지만 직접 나무를 베는 것에서부터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마름질 하고, 못박고, 칠해서 가구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말 그대로 기계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공정을 손으로 하다 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지혜는 결혼 전부터 집의 가구 대부분을 그곳에서 샀다고 했다. 결국 그 인연으로 이런 부탁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내겐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직접 평상을 만든다고?”

트럭이 내려놓고 간 통나무들을 보니 재차 내가 지혜랑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응, 좀 넓게 만들 거야. 뿌리채소들이나 고추 같은 걸 말릴 때도 쓸 거라.”

“멋진 일이긴 한데 엄두가 안 나네. 내가 평생 도끼질을 한번 해 봤나, 톱질을 한번 해 봤나.”

“나 혼자 해도 돼. 내가 벌인 일이니 강요할 생각은 없어.”

“왜 아니겠어. 하자! 까짓 거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지, 유니야?”

당시 여덟 살이던 유니는 대답도 없이 조용히 통나무를 만지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있던 지혜가 유니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반유니, 통나무로 뭔가를 만들어보는 건 너도 처음이니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가족 프로젝트라고 해 두자. 완성되면 사진 찍어 남은 나무조각으로 액자를 만들어 거는 것도 좋고. 나무 액자가 여러 개 벽에 걸리면 보기에도 좋지 않겠어?”

유니는 여전히 말없이 통나무를 만지다가 뭔가에 놀란 듯 손을 떼어 주먹을 쥐었다. 자연의 질감을 느끼며 유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만 살아온 나로써는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나에 비하면 유니는 얼마나 행복할지.

유니에겐 자연의 모든 것이 장난감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니를 안으면 항상 자연의 냄새가 났다. 흙 냄새, 풀 냄새, 비 오는 날엔 비 비린내도 나고, 나무 냄새도 났다. 여느 집 아이들처럼 플라스틱과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로봇이나 인형 대신 뒷마당에 다니는 새들과 다람쥐, 토끼가 살아있는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그 프로젝트는 무려 십사 일이나 걸려 완성됐다. 나무를 크기 별로 자르는 데에만 일주일, 마름질 하는 데에 이틀, 평상 모양으로 짜 맞추고 못박는 데에 이틀, 친환경 페인트를 발라 말리는 데에 사흘이 걸렸다. 쓰지 않던 근육들이 제멋대로 꼬여 한 달은 글을 못 썼던 것 같다. 지혜는 유니와 함께 며칠 더 액자를 만들며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난 한계였다.

지금도 가끔 벽에 걸린 여섯 개의 나무 액자를 보면 그 때의 일이 생각난다. 마시기 적당하게 식은 모과차를 들고 뒷마당 평상으로 가 앉았다. 유니가 그러했듯 조용히 평상의 나무 바닥을 손으로 만져봤다. 나무의 질감은 참 신기하다. 따뜻하지만 또한 차갑고 딱딱하다. 나무의 성질이 그러하다.

사람 중에도 나무를 닮은 사람이 있다. 인간 관계 강연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사람을 꾸준히 관찰하고 연구하게 되는데 그러다가 드물게 나무의 느낌이 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신기해서 다시 한번 유심히 쳐다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존재란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폐해다. 그 작품은 나무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나무 껍질을 직접 만져본 사람은 안다. 조심하지 않으면 나무 가시가 박히기도 한다는 걸. 그래서 나무를 다루려면 애를 많이 써야 한다. 거대한 자연의 일부를 다루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어지간한 힘으론 그것을 내 손에 붙일 수도 없다.

지혜도 그랬다. 좀처럼 내 손에 붙질 않았다. 따뜻하지만 또한 차갑고 딱딱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되어 박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어귀의 서낭당 신목(神木)처럼 주렁주렁 걸려 있는 그녀의 날카롭고 완벽한 의식은 지혜라는 나무를 신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빵과 빵 사이를 열어봤다. 그 안엔 아보카도가 마요네즈처럼 으깨어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얇게 썬 토마토와 적양파, 어린잎 채소 두 종류, 잘 익힌 계란후라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평상에 앉아 먹는 점심 식사는 언제나 최고란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느긋하고,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자꾸 글 쓰는 걸 잊어버릴 만큼 몸이 늘어졌다. 오물거리는 입 안으로 온갖 자연이 뒤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자꾸 뭔가를 깜빡한 것만 같았다.

갑자기 집안 어디선가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났다. 내 전화벨 소리였다. 맞다. 휴대폰을 꺼 놓는다는 걸 깜빡했다. 벨 소리는 한번 끊어졌다가 다시 들려왔다. 휴대폰은 식탁 위에 있었다. 아마도 모과차를 만들려다가 거기에 둔 것 같았다. 지혜였다.

“뭐 하고 있었어?”

“바깥 평상에서 네가 만든 샌드위치 먹고 있었지.”

“그랬구나. 그럼 계속 먹어.”

“응. 그런데 발은 안 아파?”

“발?”

“동물원에 하이힐 신고 갔는데 괜찮은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낌새를 챘는지 지혜의 목소리가 금세 낮은 톤으로 바뀌었다.

“아프면 신고 나왔겠어?”

“왜 아니겠어, 지혜 넌데. 유니는?”

“나비 전시관에 들어갔어. 난 밖에 있고.”

“왜 같이 들어가지 않고.”

“뒷마당에서 맨날 보는 건데 뭘. 쟤는 늘 보면서도 저게 그렇게 좋은가 봐. 들어간 지 삼십 분이 넘었는데 아직도 나올 생각을 않네.”

“애들이 다 그렇지. 목소리가 벌써 지친 것 같다. 적당히 하고 돌아와. 오후에 비 온대.”

“응. 아, 참. 나 오늘 배송 올 거 있는데.”

지혜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관심있는 이야기란 뜻이다.

“뭔데?”

“비즈 왁스.”

“비즈 뭐? 그건 또 뭔데?”

“캔들 만들려고. 이번 친환경 바자회에서 판매할 거야.”

“도와줘야 해?”

“됐어. 어렵지 않은 작업이야. 유니랑 해도 되고.”

지혜는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았다. 그게 자신의 신념과 닿아 있다면 더 열심히 찾았다. 그리고 그건 바로 행동으로옮겼다. 지혜는 친환경 바자회에 매번 다른 상품들을 만들어 가곤 했는데 작년엔 곡물 샴푸바를, 재작년엔 허브 치약을 만들어 팔았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홈쇼핑과 중소기업들에서도 연락을 해 올 정도였으니까.

전화를 끊고,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그리고 모과차를 담았던 잔을 씻었다. 어느덧 레코드플레이어 위에선 차이코프스키 음반이 마지막 곡 연주를 마치고 있었다. 이젠 진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기분 나쁠 정도로 꿀렁거렸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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