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죽진 않을 거야. 한번 빨아 먹어본다고 설마 두드러기가 돋겠어?
*반유니, 그녀의 딸
나도 다른 애들처럼 아파트에 살고 싶다. 그렇다면 꽃들을 가꾸지 않아도 되고, 텃밭에서 난 것들을 먹지 않아도 될텐데. 할머니네 집에 갈 때면 엘레베이터를 탈 생각에 전날부터 마음이 설렌다. 열네 개 층을 오를 때마다 바뀌는 빨간 숫자들을 보는 게 재미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게 신기하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아파트는 엄청 큰 집이다. 그 안에는 나 같은 아이들이 몇 명이나 살까? 몇 년 전부터 세고 있는데 한 여덟 명쯤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애들은 늘 바빠 보여서 말을 걸 수 없다. 같이 말할 수만 있다면 해 줄 이야기가 아주 많은데 아쉽다.
때론 그 애들의 손에 있는 과자나 음료수를 볼 때가 있다. 집중해서 냄새를 맡아보면 바나나보다 더 달콤한 냄새가 난다. 진짜 바나나와는 좀 다르다. 입 안에 침이 고이지만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먹고 싶은 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거기엔 건강에 안 좋은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 엄마가 그랬다. 특히 난 두드러기가 자주 나서 그런 것들을 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아니, 넌 오늘도 도시락을 싸 온 거냐? 네 엄마도 참 어지간하다.”
할아버진 내가 도시락을 싸 오는 게 싫은가 보았다. 엄마가 할아버지, 할머니 것도 챙겨 주면 좋겠다. 그러면 뭐라 안 하실지도 모르는데.
“아유, 그만 좀 해요. 애 민망하게 매번.”
할머니가 자꾸 할아버지와 내 눈치를 봤다. 난 괜찮은데, 정말 괜찮은데.
“유니 에미는 도대체 왜 애한테 고기를 안 먹인다는 거야? 애가 한창 클 나이에 고기를 못 먹으니 저리 삐쩍 마르고 키가 안 크지.”
“온 식구가 다 채식만 한다잖아요. 그리고 요즘 그런 사람들 많대요. 건강에도 좋고요. 소아비만도 문제예요.”
“그게 애가 원하는 건 아니잖아. 지들이 원하는 걸 왜 애한테까지 강요하는 거야? 그리고 애 학교는 왜 안 보내는 건데? 애가 학교를 가야 또래 친구들도 생기고 선생님한테 배우는 게 있지.”
“홈… 홈스… 그 뭐라더라? 아, 홈스쿨링. 그게 학교 다니는 거랑 똑같은 거래요. 유니 엄마가 똑똑하니 잘 알아서 할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우리 엄마는 엄청 똑똑하다. 나한테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영어, 국어, 과학 같은 것에서부터 텃밭 가꾸는 법이랑 과일 말리는 법도 가르쳐 줬다. 그런데 그날은 솔직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레가 한 말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니네 엄만 안 그런다고?”
“응.”
“뭔가 좀 이상한데… 우리 엄만 하루에도 백 번은 잔소리를 해. 너 숙제 했어? 피아노 연습은? 채소 골라내지 말고 다 먹어! 게임 좀 그만 해! 넌 도대체 누굴 닮아 그러니? 막 그러면서.”
이레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더니 눈알을 빙글빙글 굴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 속에서 막대 사탕 두 개를 꺼내어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이거 너 먹어. 울 엄마가 원래 하루에 한 개씩만 먹으라고 했는데 내가 너 주려고 하나 더 가져왔어. 어차피 엄마가 세어 보진 않을테니까 괜찮아.”
“나 이런 거 안 먹어.”
“왜 안 먹어? 콜라맛이라서 그래? 내 건 파인애플맛인데 바꿔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런 거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설탕도 많이 들어있고.”
“뭐래… 야, 반유니. 사탕은 그러니까 먹는 거야. 맛있잖아.”
손에 쥐고 있던 콜라맛 막대 사탕을 내려다 봤다. 사실 난 콜라가 무슨 맛인지 모른다.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소화가 안 된다며 마시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뽀글뽀글 공기방울이 오르는 검은색 물을 단숨에 들이킨 할아버지는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시원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꺼억’하고 큰 소리로 트림을 했다. 그러면 달짝지근한 냄새가 주위에 가득해졌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의 매너 없는 행동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곤 하셨지만 난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궁금해서였다. 달콤하면서 시원한 콜라맛은 도대체 어떤 맛일까? 진짜 궁금하다.
“먹고 싶지 않아.”
갑자기 이상한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내 생각과 전혀 반대의 말이었다.
“뭐라고? 그래, 그럼 먹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셔. 기껏 가져다 줬더니. 내가 이제 너한테 뭐라도 하나 갖다 주나 봐라. 치…”
그후로 이레는 내게 기분이 상했는지 방바닥에 엎드려 게임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그 콜라맛 막대 사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먹고 싶지 않아. 난 절대 먹고 싶지 않아.”
입에서 또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자꾸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딸기나 포도의 단맛하고는 다른 단맛일까. 할아버지가 말하던 시원한 맛은 또 뭘까. 머리가 점점 막대 사탕 쪽으로 숙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자꾸 해서인지 입안에 침이 자꾸 고였다.
엄마는 항상 내가 한 행동에 스스로 책임지라고 했다. 이 막대 사탕을 먹고 나면 난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 무서우면서도 그 맛이 점점 더 궁금해졌다.
“네가 괴물이 되는 걸 막아주기 위해 엄마가 특별히 이레네 가게에서 따로 도시락을 사오는 거야. 그건 건강에 좋은 것들로만 만드니까 널 지켜줄 수 있어.”
오래전 엄마가 내 귀에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정작 이레는 자기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안 먹는다. 그래서 맨날 아빠한테 받은 용돈으로 엄마 몰래 배달 음식을 시켜 먹거나 밖에 나가서 사 먹는다고 했다.
“이레야.”
“왜 불러?”
이레가 방바닥에 엎드린 채 게임에 집중하며 퉁명스레 답했다.
“넌 왜 니네 엄마가 싸주는 도시락을 안 먹어?”
“몰라서 묻냐? 맛이 없으니까. 채소만 잔뜩.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정말 토할 것 같아, 우웩.”
맛이 없다, 채소만 잔뜩 있다, 달지 않다, 짜지 않다, 토할 것 같다, 우웩. 이레의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매일 먹고 있는 도시락이 그런 맛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내가 고기를 먹거나 달고 짠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뭐라고 할까, 정말 이레가 먹는다는 음식을 먹어도 난 건강할 수 있을까, 괴물이 되는 걸 난 책임질 수 있을까.
귓가에 자꾸 이레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몰라서 묻냐? 맛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레의 그 말이 앞으로 날 어떤 곳으로 데려갈는지, 그땐 몰랐다. 정말로 몰랐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엄마가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는 비즈 왁스를 녹이던 손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좀 무겁게 들렸다.
“하기 싫음 내려놓고 네 방으로 들어가도 돼.”
“정말 그래도… 돼요?”
사실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물은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당연하지. 엄마가 언제 너한테 강요한 적 있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했잖아.”
그 말을 하는 엄마는 천천히 팔짱을 끼더니 턱을 당겨 날 내려다봤다. 난 엄마의 눈을 피해 얼른 얼굴을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주머니 속에 몰래 숨겨온 막대 사탕을 들킬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를 오른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겨우 엄마에게 허락을 받고 도망치듯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드디어 막대 사탕을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껍질을 벗겼다. 내가 얼마나 손으로 조몰락거렸는지 비닐 껍질이 사탕에 쩍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방문 쪽을 한번 더 쳐다봤다. 방에 들어오면서 문을 잠그긴 했지만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진 않는지 다시 한번 귀 기울여 확인했다. 막대 부분을 잡고 있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래, 죽진 않을 거야. 한번 빨아 먹어본다고 설마 두드러기가 돋겠어? 맨날 먹는 이레도 멀쩡하잖아.”
난 몇 번 더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혀를 쭉 내밀고 사탕을 그 위에 갖다 대어 봤다. 처음엔 맛이 있다, 없다 그런 것보다 이게 뭐지, 했다. 도통 알 수 없는 맛이었다. 이번엔 입안에 조심스레 넣어 봤다. 혀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맛이야! 그렇게 한번 입에 넣은 사탕은 빠른 속도로 크기가 줄어갔다.
사탕을 다 먹고 나서 옷을 들어 팔, 다리, 배를 봤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얼굴도 샅샅이 살폈다. 다행히 두드러기는 없었다. 내 모습이 괴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긴 했지만 죽진 않을 듯했다. 사탕이 다 사라지고 남은 하얀 막대를 입에 넣고 계속 질겅질겅 씹었다. 아직도 콜라맛이 남아있는 종이 막대는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서 물렁물렁해졌다. 난 그것을 조금씩 녹여서 모조리 다 먹었다. 이제 내겐 엄마가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하나 생긴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그날 밤엔 엄마 대신 아빠가 책을 읽어줬다. 엄마가 피곤한 날이란 뜻이다. 엄마에게 사탕 먹은 걸 들키지 않으려고 열 번이나 양치질을 했는데 아빠가 들어올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아도 됐을 걸, 하는 생각에 괜히 팔다리가 늘어졌다.
내 침대 옆, 작은 의자에 아빠가 앉았다. 그리고 내가 미리 골라 놓은 책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어린 왕자>였다.
“이거 저번에도 읽어줬잖아. 또 읽어줘?
“네.”
“이 책이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데? 아빠도 궁금해지네.”
“마음에 드는 게 아니라…”
아빠는 주춤하는 내게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신기하고, 궁금해서요.”
“응?”
“우리 가족이랑 아주 많이 비슷한 것 같거든요.”
“뭐가? 어린 왕자가?”
아빠는 잠시 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내게 장난치는 이레처럼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려댔다. 때론 웃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더니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미안, 아빠가 잠시 당황해서 그래. 우리 유니가 상상력이 풍부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이 세상에 가족 얘길 하면서 어린 왕자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어린이는 아마 너 하나 뿐일테니까.”
“왜요? 그러면 다른 애들은 뭐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음… 곰 세 마리 같이 엄마, 아빠, 아기가 나오는 동화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그럼 어린 왕자에서는 누가 엄마고, 누가 아빠지? 어린 왕자는 너야?”
“아니요, 저는 장미꽃이요.”
“그럼 아빠가 어린 왕자인가?”
“아니요, 여우요.”
내 거침없는 대답에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째깍거리며 나와 아빠 사이를 지나갔다.
“그게 이상한가요?”
난 아빠 쪽으로 몸을 비틀어 누우며 물었다. 아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아니, 전혀. 그러니까 네 말은… 넌 예쁜 장미꽃이고, 아빤 다정하단 뜻이지?”
내 솔직한 대답을 말하기엔 아빠의 표정은 너무 큰 기대에 차 있었다. 맞지? 맞다고 말해, 어서! 아빠의 눈빛은 그렇게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냥 아빠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네. 맞아요.”
“그렇구나. 아빠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이제 예쁜 장미꽃과 다정한 여우가 나오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아빠가 책을 읽는 동안 생각했다. 지루해. 재미없어졌어. 그래서였을까. 그날 밤은 다른 날보다 더 빨리 잠에 들었다. 그리고 막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 생각했다. 아빠는 왜 우리 중 어린 왕자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을까, 엄마는 어린 왕자에서 어떤 역을 맡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엄마가 평상을 만들겠다고 통나무를 사온 날이었다. 난 하얀 나비 세 마리가 우리 집 마당의 라벤더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어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나비들은 생김새는 같았지만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제일 큰 건 아빠 나비, 그 다음으로 큰 건 엄마 나비 그리고 제일 작은 건 아기 나비라고 내 맘대로 이름을 붙였다. 나비 가족이 우리 집 마당의 라벤더 밭으로 이사온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라벤더는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넓게 핀 꽃이다. 엄마가 좋아해서 많이 심기도 했고, 점점 옆으로 더 번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난 싫었다. 다른 꽃은 그렇지 않은데 라벤더엔 벌들이 많이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작년엔 숲 같이 우거진 라벤더 수풀 속으로 손을 넣고 장난치다가 벌에 쏘인 적이 있었다. 얼마나 아팠던지 악 소리도,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때도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벌들 때문에 라벤더에 내려 앉지도 못 하고 계속 주위만 맴돌았다. 그 나비가 이 나비는 아니겠지만 만약에 나비가 일 년을 넘게 살 수 있다면, 사람처럼 오래 살 수 있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함께 돌아온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비는 왜 돌아온 걸까.
난 혼자 수많은 상상을 한다. 상상이야 말로 어느 누구도 방해할 수 있는 나만의 것이다. 내가 입만 다문다면 아무도 내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그래서 난 언제나 나비가 되는 상상을 했다.
오늘같이 따뜻한 날이면 하늘을 날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우리 집 뒷마당에 핀 보라색 라벤더 주위를 맴돈다. 하지만 이미 벌들이 그 좋은 먹이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몹시 실망한다. 그래도 그 향은 정말 좋아서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빙글빙글 돈다. 그래도 여전히 라벤더는 온전한 내 것이 되지 못 한다.
아마 내가 살 수 있는 시간 동안 늘 그럴 것이다. 다른 꽃을 찾아갈까도 생각해 보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러지 못 할 것이다. 이젠 그 향이 내 날개를 붙잡아 더 멀리 날아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 때문이다. 난 또 빙글빙글 돈다. 계속 돈다.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줄에 묶여 같은 곳만 맴도는 것처럼 쉬지 않고 돌고만 있다.
엄마는 아저씨에게 대충 잘라놓은 통나무를 마당 한쪽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다. 아빠는 누가 봐도 힘이 없어 보였다. 키도 엄마보다 작고, 마른 팔다리는 저 나무를 세로로 수십 조각은 잘라야 비슷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엄마는 매번 힘쓰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곤 했다. 아니면 엄마 스스로 해치워버렸다. 아저씨는 원래 이런 건 자기 할 일이 아니라며 투덜거렸지만 엄마가 만 원짜리 몇 장을 내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통나무를 뒷마당으로 모두 옮겨주고 돌아갔다.
아빠는 평상을 만들기도 전에 벌써 신이 나 있었다. 평상이 완성되면, 그 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싶다고 했다가 뜨거운 모과차를 마시며 글 쓸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미리 가구점 주인에게 받아온 도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자, 이 쪽이야. 여기에다가 평상을 놓으면 나무 그늘이 져서 완벽하다고. 아닌가? 오, 이 쪽은 어때? 유니야, 이 쪽이 낫겠지? 바닥도 평평하고, 하늘도 잘 보이고.”
“네. 그렇겠네요.”
“뭐야, 그 대답은. 재미없어? 평상 만드는 거?”
아빠의 목소리가 컸는지 도면을 보던 엄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의 눈이 대답을 기다리듯 내 입술에 와 멈췄다.
“아니요. 재미있어요.”
“그렇지? 우리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이니 정말 좋은 추억이 되겠다.”
언제나 그렇듯 난 아빠의 기대에 찬 얼굴 앞에서 진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빠가 실망하는 게 싫다.
통나무에 손을 대어 보았다. 고작 여덟 살이었던 내 손은 아주 작아서 동그랗게 돌아가는 나무의 무늬 중 하나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오밥 나무! 난 깜짝 놀라 통나무에서 손을 뗐다. 바오밥 나무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커다란 통나무를 만져본 것도 처음이었기에 내 머릿속에 갑자기 바오밥 나무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음 속 한가운데에서 이상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바오밥 나무를 뽑아야 해. 그러지 않으면 그 뿌리가 네 별에 구멍을 뚫어 망가뜨리고 말 거야.’
그 목소리는 아주 침착하고 맑았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장미꽃에겐 그럴만한 힘이 없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동안 그 바오밥 나무는 결국 평상이 되어 우리 집 뒷마당,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엄마는 거기에 종종 나물을 삶아 말리거나 버섯을 썰어 말렸다. 아빠는 엄마가 무언가를 말리지 않는 날을 기다렸다가 겨우 누워보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생각하는 중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핑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없다.
난 그 평상이 진짜 바오밥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그건 이미 뿌리가 잘리고, 톱과 도끼로 조각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죽은 나무 같질 않았다. 저녁이 되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평상의 다리도 길어져 당장이라도 네 다리를 뿌리처럼 땅 속에 박아 넣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뿌리는 점점 굵어져 언젠가 우리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엄마가 날 유리 덮개로 덮어 보호해 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말이다. 거기에 저 바오밥 나무 평상도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난 요즘 내 유리 덮개가 너무 약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불안하고 무섭다.
“아빠 샌드위치는 손대지 말고, 이레네에서 온 음식만 먹도록 해. 넌 예민해서 특별식을 먹는 거야.”
“사탕, 과자, 피자, 햄버거. 이런 것들은 두드러기를 돋게 할 뿐이야. 입에 안 대는 게 좋아.”
“네 맘대로 해. 사람은 다 자기 의지대로 사는 거니까. 하지만 그 행동엔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잊지 마. 엄마가 제안하는 방법을 택하던지, 말던지 그건 네 선택이란 뜻이야.”
그동안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엄마의 말들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이레가 건넨 사탕을 먹고 난 후부터였다. 사탕을 먹고도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확실히 그랬다. 난 사실 그것을 먹고 두드러기가 아니라 죽는다고 할지라도 내 행동에 책임을 질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숨을 쉬고, 다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그 날은 유독 몸 상태가 좋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생각에 몇 번 더 이레에게 사탕을 받아 몰래 먹어봤다. 하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엄마의 말과 다르다. 엄마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까? 그렇다면 왜?
냉장고를 열고 이레네에서 온 음식을 꺼내려다가 아빠의 샌드위치를 봤다. 엄마는 매일 아침, 같은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쌌다. 아빠는 비염이 심해서 냄새도 잘 못 맡고, 같은 이유로 맛도 잘 못 느낀다. 그래서 먹는다는 건 아빠에게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체로 된 물을 씹는 것이다. 그래서 아빠는 엄마가 싸주는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매일 점심으로 먹었다. 아침은 산양 우유와 반숙 계란, 엄마가 먹는 샐러드를 같이 먹고, 저녁은 선식으로 때우거나 일 때문에 밖에서 먹어야 하는 경우엔 가까운 마트에서 바나나나 사과 같은 과일을 사 먹는다고 했다.
거실에 걸린 결혼 사진 속의 아빠는 지금보다 훨씬 동그란 얼굴과 통통한 몸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그에 비교해 살이 많이 빠졌다. 사람들은 아빠가 너무 말랐다고, 고기나 밥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는 그들에게 충고했다.
“그건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과 친구들은 채소와 물만으로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 비건이 추세인 거 몰라요? 저처럼 식단을 한번 바꿔 보세요. 피부도 좋아지고, 몸도 가벼워지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둘 걸 그랬다. 그건 마치 자기 엄마의 도시락을 보는 이레의 얼굴 같았다. 맛이 없으니까. 채소만 잔뜩. 달지도 않고, 짜지도 않고. 정말 토할 것 같아, 우웩. 바로 그런 표정이었다.
우리 집에서 내게 허락되지 않는 건 먹을 것 뿐만이 아니다. 우리 집엔 티브이도 없다. 컴퓨터는 있지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건 엄마와 수업을 할 때 뿐이다. 엄마와 아빠는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이메일을 주고 받기 위해, 그러니까 일을 하기 위해서만 컴퓨터를 사용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레는 휴대폰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맨날 휴대폰 게임을 한다. 게임할 때 이레는 다른 사람 같다. 나쁜 말도 많이 하고, 게임에서 지면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엄마 말이 틀린 것 같진 않다. 나쁜 음식을 먹으면 나쁜 사람이 된다는 말. 그런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내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나와 또다른 내가 다르다고 느끼는 것. 정말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또다른 나라고? 웃기지 마. 부캐냐? 아님, 다중인격 뭐 그런 거냐? 너 벌써 중2병 걸렸어?”
이레가 보통 때보다 더 큰 동작으로 유난스럽게 날 놀리듯 웃었다.
“그게 이상해?”
“당연하지. 그럼 지금 내 앞에 있는 넌 도대체 누군데? 정체를 밝혀라! 너 반유니 아니지? 그럼 뭐… 에밀리? 제시카? 아, 남자일 수도 있겠네. 케빈? 블랑카?”
이레는 날 노려보며 점점 뒷걸음질 쳤다.
“너야말로 영화 찍지 마. 넌 미디어를 끊을 필요가 있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미디어는 사람을 생각하지 못 하게 한댔어. 그래서 점점 기계 같아지는 거지.”
“오…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AI 같은 거 말하는 거지? 인공지능 로보트! 멋진데? 좋았어, 난 이 다음에 커서 인공지능 로보트가 될 거야.”
더는 이레랑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니, 더 이야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레는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게 무엇인지 이레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레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둘이나 셋이 아니니까.
난 상황에 따라 나를 여러 개로 쪼갠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합치면 결국 나다. 쪼개졌다고 내가 아닌 건 아니란 뜻이다. 엄마 앞에서의 나와 아빠 앞에서의 나, 그리고 이레 앞에서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그 모두가 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내가 어색해졌다. 몹시 불편하다.
동물원에서 나비 특별 전시가 있다는 이레의 말을 듣고 엄마를 졸랐다. 동물원에 가는 엄마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엄마가 걸을 때마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우리에게 쏠렸다. 하지만 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날 보고 엄마가 말했다.
“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마. 그러면 너만 피곤해져. 한가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남에게 자기 시간을 쓰는 사람들은 아주 멍청한 거야. 그래, 그들에겐 수준이 딱이네, 이 동물원.”
엄마가 동물원 매표소 앞에 있는 사자 마스코트를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들을 수 없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난 동물원 지도를 펼쳐 들고 거기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나비 전시관… 나비 전시관… 나비 전시관… 입술이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계속 달싹였다. 그리고 드디어 동물원 지도 동쪽 끝에 있는, 작은 네모에 그려진 나비를 찾아냈다.
“엄마, 이쪽이예요!”
내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자 엄마는 몸의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난 더 빨리 걸었다. 좌우로 코끼리가 보였다가 얼룩말이 보였다가 하마가 보였다. 저 멀리 들판 끝엔 기린 몇 마리도 보였다. 그리고 솜사탕을 든 남자 아이, 츄러스를 파는 가판대를 지나 셀카봉으로 기린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가족도 지나쳤다.
“천천히 걸어도 돼. 동물원이라고 해 봤자, 한 바퀴 다 도는 데 반나절도 안 걸릴텐데.”
엄마가 내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면 그 네모난 건물이 보일 텐데, 하는 마음에 속도를 늦출 수 없었다. 뒤따라 오는 엄마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하얀 표지판을 따라 큰 길에서 휘어져 돌아가는 작은 길 쪽으로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큰 나무가 가로수처럼 길을 두르고 있어서 하늘을 가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무에 나무가 이어지다가 하얀색 건물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건물엔 커다란 나비 그림과 함께 ‘세계 나비 대전, 꽃과 나비와 나’라는 현수막이 세로로 걸려 있었다.
“반유니! 엄만 밖에 있을 테니 너 혼자 들어갔다 와.”
어느새 나를 따라잡은 엄마가 건물 앞 벤치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난 대답도 안 하고 건물 입구 계단으로 냅다 달렸다. 학교에서 견학 온 아이들이 길게 줄 서 있었지만 그쪽은 단체 관람객 줄이었기 때문에 난 다른 쪽으로 그들보다 더 빨리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럴 땐 학교에 가지 않는 편이 참 좋은 것 같다.
내 예상대로 그곳은 별천지였다. 이 세상이 아닌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별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비 별. 천장 전체를 채운 나비 떼들은 은하수처럼 흘러갔다. 물론 진짜 나비가 아닌 영상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정말 멋졌다. 굽이굽이 달팽이처럼 돌아내려가는 복도엔 유리로 만들어진 각각의 공간에 모두 다른 종류의 나비가 들어 있었다. 복도를 다 내려오면 커다랗고 둥근 방이 나왔다. 그곳의 천장은 매우 높고, 유리로 되어 있어서 햇빛이 그대로 내려와 바닥을 환하게 비췄다.
아이들은 서너 명씩 모여 앉아 나비가 어떻게 성장하고, 무엇을 먹는지, 어떤 곳에서 사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것도 나름 유익한 시간이겠지만,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난 그 다음으로 빨리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 속에서 계속 두리번거리며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복도 끝에 나타난 것은 유리문이었다. 그 문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문을 빨리 닫아주세요. 나비가 체험장 밖으로 나갑니다.>
심지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다른 문이 나왔다. 나비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이중문을 해 둔 것이었다. 사람들은 경고문이 마음에 걸리는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닫으며 나비가 따라나오진 않았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러니까 어땠냐고. 빨리 좀 말해라. 답답하다. 어휴…”
이레는 통통한 손으로 제 가슴을 치며 재촉했다. 하지만 난 좀 더 그 기분을 혼자 느끼기 위해 시간을 끌다가 겨우 입을 뗐다.
“상상도 못했어. 그렇게나 많은 나비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건. 그냥 우리 집 뒷마당에 날아다니는 몇 마리 나비 밖엔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거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나비가 있었어. 종류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걸 소감이라고 말하는 거냐? 그럼 당연히 나비가 많겠지. 사람들한테서 돈 벌려고 만든 특별 전시인데 니네 집 뒷마당 같이 꾸며 놓고, 나비 한두 마리 풀어 놨을라고. 너도 참… 난 또 실망했다는 줄. 그러면 나비가 다 그게 그건데 넌 뭘 그런 걸 보러 거기까지 갔냐? 한심하긴.”
“아니야, 그건 그냥 나비가 아니었어. 우리 집 뒷마당에 있는 나비랑은 완전히 달라.”
“뭐가 다른데? 색깔? 크기? 모양? 그래서 그게 뭐. 다 같은 나비지. 나 같으면 차라리 카멜레온, 코모도 드래곤, 보아뱀 같은 걸 보러 가겠다.”
“달라, 다르다고. 넌 모르겠지만 난 알아. 거기 나비들은 다른 데서 본 나비들과 완전히 달라.”
“그러니까 뭐가 다르냐고. 말을 하라고!”
이레가 다그쳐 물었지만 난 되레 다시 입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그건 갇혀 있으니까. 갇혀 있는 나비니까.”
“엥?”
그때의 이레 표정도 사진으로 찍어둘 걸 그랬다. 그건 마치 고기 반찬을 기대하며 도시락을 열었다가 온통 채소만 가득인 걸 알았을 때의 황당, 그 자체였다.
“갇혀 있는 게 뭐. 당연히 가둬 둬야지. 그래야 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지. 열어두면 다 날아가고 나비 전시회를 어떻게 하겠냐?”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야.”
“뭐라고? 이야… 얘가 늘 아파 보이긴 했지만 오늘은 더 많이 상태가 안 좋네. 야, 이거나 먹고 정신차려.”
이레가 내민 것은 콜라 맛 막대 사탕이었다. 난 그것을 싸고 있던 포장지를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벗기고 입안에 넣었다. 그것을 벗기고 입에 넣는 데에 들던 죄책감 따윈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역시 콜라 특유의 톡 쏘는 단 맛은 내 혀를 나비처럼 춤추게 했다. 이레를 따라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런데 사실, 이레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나비 전시관에서 본, 또다른 나의 모습에 관한 이야기다.
그날, 난 체험관 바닥에서 잘 날지 못 하는 나비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나비는 한 쪽 날개가 아직 온전히 펴지지 않아서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것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날지 못했으면 좋겠어, 영원히.”
나비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조금씩 움직여 구석으로 옮겨갔다. 난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들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나비는 길이 막히자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난 다시 또다른 나뭇가지를 찾아 다른 쪽마저 막아버렸다. 그러자 나비는 어떻게 해서든 뚫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날개는 아직도 접힌 채였다. 그렇게 내가 나뭇가지로 길을 막자 나비는 다른 쪽 길로 계속 방향을 바꿔 옮겨갔다. 그래서 점점 내가 조종하는 대로 나비는 움직였다. 길들이는 것이다.
또다른 내가 말을 걸었다.
“길들여지지 말고, 길들여. 길들여지는 건 관계 속에서 약한 쪽이 갖는 특성이야. 길들여지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야 말로 강한 쪽이 갖는 특권이지.”
난 진지하게 되물었다.
“꼭 길들여야 하는 거야? 아무도 길들이지 않으면 안 될까? 난 길들여지지도 않을 거지만, 길들이기도 싫어.”
그러자 또다른 내가 답했다.
“네 몸에 돋은 가시는 쓸모가 없구나. 그럴거면 다 뽑아 버려.”
그 말을 듣고 내가 다시 답했다.
“가시라도 만들어 내지 않으면 나를 지킬 수 없으니까. 길들여지지도, 길들이지도 않으려면 나름 이만한 힘이라도 길러야 하지 않겠어? 난 고작… 장미꽃이니까.”
그제서야 또다른 내가 말을 멈추고 내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